관상만렙 공무원님 116화
32. 관상으로 만드는 작은 기적들-2
<시청으로 들어와 주어야겠네.>
이 국장의 말은 오랜 울림으로 남았다.
“국장님.”
“자네가 말했었지? 용포읍에 남아 복마전의 이미지를 씻어내고 싶다고?”
“예…….”
“그 정도면 되었네. 내가 살펴보니 용포읍의 실적과 민원인들 평가가 최상위에 속했네. 특히 시장 비서실에서 은밀하게 체크하는 민원만족도는 읍면동은 물론이고 시청 전 부서를 통 털어 1등이었어.”
“그런 것도 있었습니까?”
“왜 없겠나? 시장들은 시민들의 여론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네…….”
“그런데 말이야, 자네 혹시 최근에 김 읍장님 관상 체크한 적 있나?”
“왜 그러시죠?”
“새 시장 당선자 말이야, 간부들 중에서도 김 읍장님에 대한 자료를 1착으로 요구하시더군. 그래서 묻는 걸세.”
“관상으로 말씀드리자면…….”
“편안하게 말해보시게. 내가 보기에 나쁜 분위기는 아니었네.”
“제가 보기에는 영전이었습니다.”
“영전?”
이 국장이 반색을 했다. 이 국장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용포읍에 근무했다.
당시 김 읍장의 수하였다. 읍장 역시 그 당시의 이 국장과 같은 신세였다.
능력 때문이 아니라 김경동 시장의 눈 밖에 남으로써 좌천을 당한 케이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읍장은 새 시장의 당선에 기여한 사람이 아니었다. 며칠 동안 인수위를 지켜본 결과 내린 결론이었다.
그런 차에 새 당선자가 읍장에 관심을 가지니 궁금했던 것이다.
“그럼 안심이군.”
이 국장이 웃었다. 내심 읍장에게 권고사직이 떨어질까 우려했던 모양이었다.
“어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시청 진입.
변방 부서만 돌던 경도였다. 처음에는 자치행정과, 감사실, 기획예산담당관실, 도시계획과 등에서 꿀보직을 받은 동기들이 부러웠다.
고속승진코스.
그 부서들은 그렇게 불렸다. 실제로도 거의 그랬다. 권태술과 염정아가 증인인 것이다.
감사실.
캬아.
인사팀.
크하.
죽여준다. 누구나 가고 싶은 부서다. 하지만 변방으로 도는 동안 완전히 잊어버리고 산 경도였다.
이 국장의 시선은 경도 얼굴에 꽂혀 떨어지지 않았다.
이창교 국장.
경도가 부활을 도왔다지만 따지고 보면 경도도 그의 후광을 많이 입었다.
게다가 이미 한 번 사양했던 시청 진입이었다. 나아가 공무원은, 관련 법에 의해서도 한 자리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국장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경도가 콜을 받았다.
“고맙네.”
이 국장의 얼굴 근육은 편안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어느 부서로 중용할지는 말하지 않는다. 이미 바닥을 다 겪어본 경도였다. 이 국장을 믿었으니 굳이 묻지도 않았다.
“그럼 언제쯤 움직이는 겁니까?”
경도가 물은 건 시기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관상을 보면 될 일이지만 자기 관상만은 보지 못하는 경도이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새 시장님 취임 이후겠지. 늘 그랬듯이 취임 두세 달 후에 단행하지 않을까 하네만.”
두세 달이면 코앞이었다. 김경동의 잔여 임기는 고작 한 달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아, 김경동 시장님 말이야, 결재 받으러 갔더니 자네 얘기를 하더군.”
“무슨……?”
“관상이지 뭐겠나? 실은 그분이 점을 보았던 모양이야.”
‘점?’
“쌍봉리 호박신녀라고 들어봤나?”
“예.”
“사모님이 다녀왔던 모양이야. 틀림없이 당선될 거라기에 그냥 넘어갔다고 하더군.”
“패인이 시장님께 있었던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그것만도 아니었던 모양이야.”
“아니라면?”
“돈을 받았다는 운전기사 말일세, 따지고 보면 6촌 형제뻘이라시더군. 언젠가 자네가 형제 조심하라고 했다면서?”
“……?”
“눈썹을 만지면서 한을 곱씹으시더군. 친형 단속에만 신경 썼지 6촌이라 크게 개의치 않았다면서…….”
“……!”
놀란 건 경도였다. 운전기사가 친인척인 줄은 생각지 못했다. 이제 보니 그 상괘까지 적중시켜버린 경도였다.
“편히 쉬십시오.”
밤이 늦었으니 사모님에게도 인사를 하고 주차장으로 나왔다. 하늘의 별을 보니 싸목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김경동 시장의 패인이었던 운전기사.
사실 거기까지는 생각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 국장의 말을 듣고 나니 그가 금품수수를 한 게 이해가 되었다.
그런 연줄이 있으니 운전기사에게 뇌물이 들어온 것이다. 결국 김경동의 패인은 형제궁을 뜻하는 눈썹이었다.
‘할아버지…….’
새삼 싸목 할아버지가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고맙습니다.
인사에 이어 보고를 했다.
‘저 이제 시청 입성합니다.’
다시는 전처럼 존재감 없는 사람은 되지 않겠습니다.
하늘에 대고 다짐을 했다. 할아버지가 알았다는 듯 별똥별을 신호를 내려보냈다.
몇 달 남지 않은 용포읍의 생활이다.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할 것 같았다.
***
잘 받아야 한다.
문제가 될 만한 건 아예 넘보지도 말아야 한다.
김경동 시장의 낙선에 치명타를 가한 문제가 용포읍에도 발생했다.
금요일 오후에 찾아온 도매상 유 사장이 그랬다. 민지의 관할구역에서 도매상을 하는 그가 읍 센터를 찾아온 게 시작이었다.
“쌍봉리에서 즉석식품 종합도매상 하는 사람입니다.”
상담실 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놓았다.
“코로나 극성기 이후로 일자리 잃은 분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작은 도움이나 될까 해서…….”
그가 물품기탁의 뜻을 밝혀왔다. 다양한 즉석식품의 현물기탁으로 총액이 2,000만원을 상회하는 거액이었다.
“너무 고맙습니다. 큰 힘이 될 거예요.”
민지는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밖으로 나가니 그와 함께 온 트럭이 있었다. 기사와 직원이 물품을 내려주었다.
꽁치조림과 고등어조림, 사골곰탕, 햇반 등으로 구성된 물품이었으니 구성도 좋았다.
단점은 물품 간 편차가 커서 세트를 구성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간편식으로 즐길 수 있으니 장애인이나 소년소녀가장, 독거노인 등에게 유용할 것으로 보였다.
“잠깐만 기다리시면 기탁식 준비해 드릴 게요.”
민지가 말했다. 기탁식은 일종의 의례적인 행사였다. 그런데 유 사장이 사양의사를 밝혔다.
“제가 그런 거 싫어해서요. 그냥 기탁확인서나 한 장 써주시기 바랍니다.”
“왜요? 좋은 일 하신 건데?”
“죄송합니다.”
유 사장은 거듭 손을 저었다. 별수 없이 기탁확인서만 넘겨주고 매듭을 지었다.
“수고했어.”
보고를 받은 엄 팀장이 민지를 치하했다. 후원물품이 들어오면 수급자와 극빈층들 혜택이 늘어난다. 동시에 팀의 위상도 올라간다.
그동안 주로 경도가 분투하던 차였는데 민지까지 동참을 하니 즐겁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과장과 읍장에게도 보고가 되었다.
하지만 즐거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물품 확인을 돕던 은빛의 눈이 제품의 유효기간에서 멈춘 것이다.
“언니.”
은빛이 꽁치조림 포장을 민지 앞에 내밀었다.
“왜?”
“이거 유효기간…….”
“유효기간이 뭐?”
“일주일밖에 안 남았잖아?”
“어머, 진짜네?”
민지가 소스라쳤다.
“고등어조림도 일주일이야. 사골곰탕은 2주일…… 그나마 즉석밥은 양호하고…….”
은빛이 체크하는 동안 민지의 표정은 점점 어둡게 변해갔다. 기탁품의 물량은 주로 꽁치와 고등어조림 즉석식품이었다.
이 제품들의 유통기한은 9개월이었다. 거기서 남은 기한이 딱 1주일인 것이다.
하늘이 노래졌다. 품목확인을 마치고 수혜자를 결정하고 실제로 수급자 등의 가정에 배분까지 하려면 적어도 1주일이 걸린다.
분량은 대개 가구당 10개나 20개 정도씩 나눠주는 게 관행이다. 그걸 한 번에 먹을 수 없으니 보관하다 보면 저절로 유통기한을 넘는다.
통조림이므로 유통기한 하루나 이틀 정도 지난다고 해서 큰 문제는 없다. 문제는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였다.
-못산다고 유통기간 지난 거 줬네.
-우리한테 음식물 쓰레기 처리한 거야?
이런 오해가 나올 수 있었다.
물품 분량이 많으니 내일부터 수혜자 결정하고 모레와 글피에 총력 분배한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 주임.”
은빛이 출장에서 돌아온 경도를 불렀다.
“……!”
상황을 본 경도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유효기간이 지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역시 문제의 소지가 다분했다.
“어쩌지?”
민지는 거의 울상이었다.
“허어.”
보고를 받은 엄 팀장도 심각해졌다. 후원품 기증에 유효기간에 대한 항목은 없었다.
법에 규정되지 않은 일이라면 공무원들의 판단이 곤란해진다. 안 받으면 안 받아서 문제가 되고 받으면 받아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2천만 원 이상의 후원물품.
그러나 유효기간 임박.
네 종류의 개수가 무려 4,000개에 달하니 그냥 버리게 된다면 음식물 쓰레기 봉툿값 마련도 문제가 될 일이었다.
“아, 그 사람…… 이제 보니 안 팔릴 물건들을 기부랍시고 떠넘긴 거네? 자기는 생색내고?”
사태를 파악한 엄 팀장이 혈압을 올렸다.
“죄송해요.”
민지가 고개를 숙였다. 천국에서 지옥 추락이다. 졸지에 면목이 없어진 것이다.
맞복팀이 모여 머리를 맞댔다. 하지만 뾰족수가 없었다. 나눠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한 가지 대안이 있기는 했다. 수급자나 극빈자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서…….
-유효기간이 다 된 즉석식품이 있는데 드시겠어요?
……하고 의사를 타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두 개가 아니다. 적어도 수백 가구에 전화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와중에 유효기간이 넘어가 버리면 더욱 곤란해진다. 후원물품을 버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 주임, 관상으로 안 될까?”
은빛이 경도를 바라보지만 경도 역시 묘수가 없었다. 관상으로 내용물을 신선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유효기간이 긴 즉석밥만이라도 먼저 돌리죠?”
태술이 현실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좋은 해결책이 아니었다. 구성으로 보아 이것들은 같이 돌려야만 하는 물품이었다.
고민하는 때에 경도 전화가 울렸다.
“잠깐만요.”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조경철 지국장이었다.
-우리 회장님, 제주도까지 가서 대박을 치셨다고?
“아, 지국장님.”
-지방세체납 징수액이 무려 6억 3천만 원이라던데? 이거 실화야?
“그렇긴합니다만…….”
-왜? 무슨 일 있어?
경도 목소리에서 감을 잡은 그가 물었다.
“그래?”
설명을 들은 조경철이 솔깃한 말을 해왔다.
“잠깐만 기다려. 그건 내가 해결해 줄 테니까.”
통화가 끝났다.
경도는 민원실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묘안은 나오지 않았다. 다들 무거운 표정으로 책상에 앉았다.
경도가 보니 민지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조경철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지국장님.”
경도가 그를 맞았다.
“배 주임님이 담당이라고?”
조경철이 민지를 돌아보았다. 맞복팀 정도는 훤하게 꿰고 있는 그였다.
“네…….”
민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오 주임에게 대충 설명 들었습니다. 문제가 되는 후원물품 어디 있어요?”
“……?”
민지가 경도를 바라본다. 경도는 어깨를 으쓱함으로써 조경철과 호흡을 맞췄다.
“야, 이거 완전 의도적이네. 유효기간 임박해서 반품된 거 같은데?”
물품보관실에 들어선 조경철이 혀를 찼다.
“하지만 아직 유효기간이 지난 것은 아니니…….”
민지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어허, 왜 이러십니까?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 수준이 얼마나 높은 데요. 배 주임님은 마트 가면 이 물건 사시겠어요?”
“…….”
“솔직히 바로 견적 나오지 않습니까? 뜨거운 감자. 이거 누가 찍어서 여기저기 올려대면 읍 공무원이 독박 쓸 수 있어요.”
“…….”
“언니, 전화. 물품 후원한 도매상 사장님이래.”
은빛이 보관실 문으로 와서 민지를 불렀다.
“이제 연락이 오는군. 가서 받아보세요.”
조경철이 문을 가리켰다.
“잘 되는 겁니까?”
민지가 나가자 경도가 물었다.
“오 주임이 용포읍을 위해 분골쇄신하는데 내가 이 정도는 도와야지. 안 그래?”
조경철이 찡긋 윙크를 날렸다. 표정을 보니 여유만만이다. 좋은 해결책을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이유는 머잖아 밝혀졌다. 돌아온 민지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사연을 전한 것이다.
“그 사장님이 물건 바꿔주신다네요. 창고 인부들이 잘못 반출한 거라는 데요?”
그 말을 들은 경도가 조경철에게 엄지척을 보냈다. 그들은 잘못 반출할 이유가 없었다.
“지국장님이 도와주신 거죠?”
감을 잡은 민지가 물었다.
“별거 아닙니다. 취재 나왔다가 우연히 본 걸로 하고 조졌죠. 이거 미담 특집기사로 내려다보니 기증물품들 유효기간이 코앞이더라. 제대로 보내신 거 맞냐? 그랬더니 바로 체크해 보겠다고 하더군요. 품목구성도 제대로 맞춰주고요.”
“우와…….”
“아마 유효기간 넉넉한 걸로 가져올 테니 걱정 뚝 끊어버리고 배분 절차나 밟으시죠.”
조경철이 민지를 안심시켰다. 그 사이에 주차장에는 유효기간 빵빵한 즉석식품을 실은 차량이 도착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