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만렙 공무원님 099화
28. 혼자 사는 세상 아닙니다-2
“혹시 결혼하지 않으셨나요?”
경도가 물었다. 왕년의 스타라지만 경도는 연예인에 큰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그가 스타였던 것은 알지만, 사생활까지는 몰랐다. 그러니 결혼 보도가 나왔더라도 몰랐을 일이었다.
“제가 아직 미혼입니다.”
대답이 상괘와 다르게 나왔다.
부부궁에는 분명 결혼운이 깃들었던 손민이었다.
47세를 가리키는 오른쪽 관골 유년운기에도 그런 흔적은 있었다.
그러나 다소 난해했으니 예상대로 엇갈리는 답이 나오고 말았다.
“미혼이라고요?”
경도가 시선을 집중시켰다.
“예, 사귀던 여자는 있기는 했지만…….”
“이상하군요. 9년 전의 6월쯤에 결혼운이 있었던 거 같은데?”
“9년 전 6월이면…… 아.”
시간을 더듬던 손민이 기억 하나를 끄집어냈다.
“그때 결혼할 뻔했었죠. 하지만 하필 그 직전에 엉뚱한 스캔들이 터지는 바람에…….”
손민이 한숨을 쉬었다.
“결혼을 안 하셨다?”
“우리끼리는 결혼할 호텔 연회장에 해외 신혼여행지, 주례와 사회까지 알아본 후였는데 결국…….”
“자세히 좀 말씀해 보시겠어요?”
“9년 전 결혼 예정 사건을 맞추시다니 정말 기막히군요. 그건 동료나 후배들도 잘 모르는 일인데…….”
“…….”
“그게 제 초등학교 동창생인 길주아입니다. 집안도 좋고 성격도 좋은 여자죠. 인기 절정일 때도 은밀한 연락은 끊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사람은 위로가 되고 활력이 되었거든요.”
“네…….”
“스타도 외롭습니다. 맨날 몰래 속삭일 바에는 결혼식으로 커밍아웃하면서 관계도 밝히고 세상도 놀래주자며 은밀하게 결혼식 추진할 때 어마어마한 스캔들이 터졌어요.”
“스캔들이라고요?”
“제 연예계 생활 동안 단 한 번의 스캔들이었죠. 하지만 메가톤급 치명타였습니다.”
손민의 시선이 과거로 날아간다.
그 안에서 사건을 더듬는 눈동자에 회한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날도 주아 말을 안 들어서 생긴 일이었습니다. 촬영 종료 후에 따로 만나기로 했는데 쫑파티가 열려 버린 거예요. 솔직히 대충 마시고 갈 수도 있었는데 신인 여배우들이 많았어요.”
“…….”
“뭐 그렇다고 흑심을 품고 있는 후배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냥 수컷으로서의 호기라고 할까요? 선배님, 선배님 하면서 따르는 여자들이다 보니 한번 누리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주아와의 약속을 깨고 오버하게 되었습니다.”
-미안, 스폰서와 투자자들이 몰려와서 도저히 못 빠져나가겠다.
“주아에게 핑계를 대고 밤새 달린 거죠. 여자 후배들이랑 새벽 3시 넘어서까지 마신 거 같습니다. 그야말로 만취였어요.”
“…….”
“결국, 후배들 셋에 저, 그리고 스태프 둘까지 여섯이 가까운 호텔 신세를 지고 말았습니다. 그게 쥐약이었죠.”
손민은 음료를 마시며 마음을 달랬다. 인생의 치명타를 떠올리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었다.
“거기서 사건이 터졌어요. 후배 한 명이 성추행을 당한 거죠.”
‘성폭행.’
경도가 더욱 집중했다.
“옆 방에서 자던 후배였는데 이른 아침에 누군가 거기로 들어갔었나 봅니다. 이 친구가 옷을 다 벗고 자는 취향이라는데 느낌이 이상해서 눈을 뜨니 누군가 자신을…….”
“…….”
“결국, 경찰이 출동하고 호텔이 뒤집혔죠. 저는 그때까지도 잠결이었는데 경찰의 노크에 잠이 깼습니다. 비몽사몽 중에 들은 경찰의 말이 아직도 귀에 선합니다.”
-서까지 같이 좀 가주셔야겠습니다.
손민의 인생을 바꿔놓은 한마디였다.
“다른 객실에 투숙한 투숙객이 잘못 본 거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투숙할 때 제가 취중에 호기를 좀 부렸다더군요. 그걸 못마땅하게 생각한 투숙객의 증언이었는데 제가 아니라 제 옆 방의 투숙객이 나오는 걸 룸 넘버를 착각했던 겁니다. 하지만 복도 CCTV 화질이 엉망이라 구분이 어려운지라 결국 제가 성추행범으로 몰리고 말았죠. 영상분석 전문가를 동원해 바로 잡았지만 이미 몇 달이 흐른 후였습니다. 누명은 벗었지만, 명예는 회복되지 않았고 결혼 역시 주아 부모님의 반대로 물 건너가 버렸습니다.”
“…….”
“그 사건 후로 주변 사람들에게 환멸을 느꼈습니다. 저를 색안경을 끼고 보았거든요. 그게 제 몰락의 시작이었습니다. 사람들 시선이 싫어 미국 유학길에 올랐는데 거기서도 일부 교민들이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는 바람에 마음을 잡지 못했습니다. 결국, 함께 가신 어머니는 사업을 하다가 심장병으로 사망하시고…… 몇 년 후에 돌아와 영화로 재기를 노렸는데 역시 실패했습니다. 그때 주아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때까지 선생님을 기다렸죠?”
“……?”
“지금도 선생님을 기다리고요?”
“……?”
손민의 이마가 하얗게 질려갔다.
길주아의 이야기는 유빈에게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녀가 지금도 자신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도의 상괘는 손민의 비밀들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었다.
손민이 놀라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계속해 주세요.”
“흠…….”
목청을 고른 손민이 말을 이어갔다.
“박사님 말이 맞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 연락을 받았어요. 좀 놀랐습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줄 알았거든요. 게다가 저는 이미 폐인에 가까웠고요.”
“…….”
“주아는 그때까지도 다른 남자를 사귀지 않았더군요. 어느 날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요. 내 스캔들 때문에 결혼 반대하시던 부모님 다 돌아가셨으니 이제라도 결혼하자고. 굉장히 놀랐어요. 고맙기도 하고…… 그런데 제가 뭐 가진 게 있어야죠? 주아는 사회적으로도 성공했고 계속 결혼 종용을 하지만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뜨문뜨문 만나기만 하는 사이입니다.”
“…….”
“사실 주아 때문에도 더 태국으로 가려는 거죠. 지금의 제 모습은 주아가 바라던 남자가 아니거든요. 그러다 보니 비애감만 늘고 꼴에 가오는 있어서 동정심은 받고 싶지 않고…….”
“여자분 사진 가진 거 있나요?”
“있기는 합니다만.”
“보여주세요.”
“제 일에 주아는 끌어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선생님 관상을 보기 위해 보려는 겁니다. 두 분이 특별한 인연이 아니라면 9년 전 예정하던 결혼색이 아직까지 남을 리가 없거든요.”
“꼭 봐야 하는 겁니까?”
“예.”
경도가 완고하니 손민이 화면을 열어주었다.
사진이 나왔다.
첫 이미지부터 감이 왔다.
“역시.”
사진을 확대한 경도가 감탄을 터뜨렸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반대입니다. 선생님 태국 별로 가고 싶지 않죠?”
“예?”
“마음은 연예계에 있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저는 이미 맛이 간 인간입니다. 제 시대는 끝났어요.”
“그럴지도 모르죠. 지금의 관상만 딱 떼어놓고 판단하면 태국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주아라는 여자분이 없다면 말이죠.”
“……?”
“관상을 초월해서 허심탄회하게 말해볼까요? 모든 것을 떠나 다시 옛날의 인기를 찾고 싶으시죠?”
“그건 물론입니다. 아직도 그런 꿈을 꾸거든요. 천만을 넘는 영화…… 시청률 40%에 도전하는 드라마…… 각종 시상식의 붉은 카펫…….”
“다시 그런 스타가 될 수만 있다면 이 여자분 청혼을 받아주실 수 있나요?”
“그렇게만 된다면 마다할 필요 없죠. 저도 주아를 좋아하니까요.”
“그럼 답은 간단하네요.”
“……?”
“결혼하세요.”
경도가 내준 상괘는 거의 강요에 가까웠다.
“박사님, 제가 알고 싶은 건 결혼이 아니라 태국행입니다.”
“저는 궁극을 말하는 겁니다. 이 여자분과 결혼하면 선생님의 인기 운은 다시 꽃을 피웁니다. 그러니 태국행이 아니라 결혼을 서두르라는 겁니다.”
“……?”
“처음 선생님을 봤을 때 사실 의아했습니다. 삼정의 조화에 오관, 12궁까지 다 문제가 없는데 이렇게 초라한 중년이라뇨? 보다시피 지금 관골과 재백궁의 형세도 나쁘지 않거든요. 그런데 왜 폭망이 들었을까?”
“……?”
“자세히 보니 선생님은 9년간 재수가 없는 관상 운세에 접어들었습니다. 관상에서는 얼굴 생김새 외에 기색을 중시하는데 이게 문제가 된 겁니다. 막히고 체하면 기는 9년이오, 색은 3년간 운이 풀리지 않습니다.”
“예?”
손민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이 세 가지가 다 약하면 빈곤한 노년은 떼놓은 당상이죠. 다행히 선생님은 이 막힌 기를 뚫을 수 있으니 그게 바로 그 여자분입니다.”
“주아가 돈이 많으니 그걸 누리라는 건가요?”
“아뇨. 선생님의 9년 체기는 간문에서 막힌 건데 이게 뚫리면 기본이 된 오관과 12궁에 두루 기색이 통하게 됩니다. 막혔던 관이 제대로 뚫리면 물 빠지는 소리가 시원한 건 잘 아시죠?”
“……?”
“즉, 선생님은 제2의 전성기를 누린다는 뜻이니 여자문의 관상에서 답이 나옵니다.”
경도가 손민의 핸드폰을 잡았다.
화면을 손민에게 보이며 얼굴을 키웠다.
여자의 얼굴이 화사하게 확대되었다.
“보세요. 이 분은 등이 두툼하고 어깨가 둥근 데다 코와 준두가 길하니 남편의 성공을 돕는 관상입니다. 이게 바로 기를 뚫는 상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이런 분이 선생님을 기다렸다는 건 행운입니다.”
“그래요?”
“이런 행운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죠. 혹시, 남몰래 선행을 베푼 적이 있으십니까?”
“선행이라고 따로 한 건 없습니다. 늘 스케줄에 바빠서 스캔들 나던 밤에 후배들에게 쏜 거 말고는 밥도 한번 제대로 못 사는 주제였고요.”
“있을 겁니다.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선행이라…… 아, 그것도 선행이라면 선행일까요?”
뭔가를 떠올린 손민이 내용을 밝혔다.
“전에는 제가 CF 좀 찍었거든요. 광고비 중에서 제가 1.5%, 광고주가 1.5% 해서 3%씩 조손가정 어린이들에게 보내긴 했습니다만.”
“얼마나 오래 하셨나요?”
“당시에 CF를 10여 편은 찍었으니 꽤 했겠죠.”
“다른 건요?”
“다른 거라면…… 한국 농촌에서 일하던 캄보디아 청년이 악덕 주인에게 임금을 못 받고 돌아가게 되었을 때 딱해서 비행기 표 끊어줬던 거 정도?”
“그거로군요.”
“예?”
“선생님의 은덕 덕분에 아직까지 기회가 남은 겁니다. 이 불운의 시작이 9년 전이라고 하셨으니 장담하건대 1년 안에 재기에 성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박사님…….”
“유빈 씨에게 제 관상 이야기는 들으셨죠?”
“예…….”
“그럼 믿고 밀어붙이세요. 이 여자분의 재운도 괜찮은 편이지만 선생님이 재기에 성공하면 더 큰 재운을 누리실 겁니다. 그거야말로 선생님이 바라던 미래가 아닌가요? 게다가 호텔 지배인은 선생님에게 맞지 않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얼굴이 귀상이니 멋 모르는 사람은 잘 맞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대중 영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귀상이나 위상은 손님들의 시기를 받아 일을 그르치게 만들 수 있습니다.”
“…….”
“복채 가져오셨죠?”
“예? 예…….”
손민이 봉투를 꺼내놓았다.
“얼마입니까?”
“제 형편이 이래서 많이는 못 넣고 200만 원입니다.”
“일단 여자분에게 전화를 걸어서 결혼을 수락하세요. 그리고 이 복채는 잘 넣어두셨다가 선생님 축의금의 맨 윗자리에다 적어주시고요, 제가 확인하러 갈 테니까 꼭 초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상괘를 끝낸 경도가 다짐을 두고 일어섰다.
가만 돌아보니 손민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그는 전화를 걸 것이다. 운명이 당기는 일이니 벗어날 수 없었다. 무려 9년이나 당긴 인연이 아닌가?
3-9-0
숫자를 생각하며 한 번 더 웃었다.
기(氣)가 막힌 상과 색(色)이 막힌 상 공부 한 번 제대로 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