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만렙 공무원님 088화
24. 현묘하고 또 현묘한-1
결론을 말하자면 이날의 풀코스는 엄 팀장이 쏘았다. 저녁 무렵이었다.
경도와 태술이 뭉칠 기세를 보이자 은빛이 끼어들었다.
“남자만 팀이냐?”
정곡을 찔렸다.
“듣고 보니 그러네? 우린 쏙 빼고.”
민지까지 도끼눈을 뜨고 가세한다.
“에이,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다 같이 가야죠.”
“그럼 나는?”
마지막으로 합류한 게 엄 팀장이었다.
“팀장님이 우리 감당이 되겠어요?”
은빛이 당찬 경고(?)를 날렸다.
“좋아. 오늘 하루 망가져 준다.”
엄 팀장은 파격으로 맞섰다.
경도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현 주임이 가고 태술이 왔다. 현 주임도 헌신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태술은 한 수 위였다. 엄 팀장은 아직은 겉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기회에 팀 분위기를 일신하고 싶었다.
“알았어.”
퇴근 무렵, 엄 팀장에게 속내를 밝혔다.
엄 팀장이 흔쾌히 접수했다. 어차피 남아야 하는 용포읍이었다. 저 유명하다는 천 거사의 상괘도 별 볼 일 없었으니 경도가 제시한 길을 가기로 했다.
“자, 여러분 천하제일 용포읍, 용포제일 맞복팀이 뭉쳤습니다. 우리가 다 쓰러져가는 용포읍 한번 바로 세워봅시다.”
“무적 맞복.”
건배사에 이어 은빛의 도발이 나왔다.
“팀장님 야자 타임 한 번 하죠?”
“엥?”
엄 팀장 미간이 구겨진다. 경도가 바라보자 그 미간이 다시 펴졌다. 다짐까지 하고 온 마당이었으니 허용이 되었다.
“그러자면 엄낙기 당신부터 잘해야 돼.”
은빛은 기다렸다는 듯이 몰아쳤다.
“……?”
“저 봐? 저 눈 째리는 거. 저 밴댕이 소갈딱지로 무슨 무적 맞복?”
“은빛아.”
당황한 민지가 약간의 제동을 걸지만 은빛은 폭주는 멈추지 않았다.
“배민지, 너도 마찬가지야. 알고 보면 우리 팀 최고참이잖아? 그런데 팀 리딩 한 번 제대로 한 적 있어? 맨날 착한 척 내숭 까면서 시키는 일이나 하고 말이야.”
“……?”
“에, 지금까지 엄 팀장님이 보장한 야자 타임이었습니다.”
모두를 놀라게 한 은빛은 엄 팀장을 내세워 면책을 받았다.
“야, 깜놀 했잖아?”
민지의 인디언밥이 은빛의 등짝에서 터진다.
“아파, 그만 때리고 언니도 팀장님에게 야자 타임해. 안 그러면 나만 찍히잖아?”
“그럴까?”
민지가 엄 팀장을 노려보았다.
“야, 너 엄낙기.”
손까지 허리에 올려놓고 목청을 돋운다.
“인간이 그러면 안 돼. 맨날 팀은 뒷전이고 저만 살 궁리야? 그럼 아예 팀장 자리 내놓든가? 너 지문 없지? 위에만 비비지 말고 아래에도 좀 비벼보란 말이야.”
“언니, 파이팅.”
민지와 하이파이브를 나눈 은빛은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좋습니다. 이 주임님, 배 주임님.”
엄 팀장이 화답에 나섰다.
“저도 알고 보면 쓸 만한 놈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두 분 주임님을 목숨 걸고 보필하겠습니다. 그럼 되겠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까지 조아린다.
“좋아, 좋아. 그런 정신이면 돼.”
은빛이 너스레를 떨었다. 엄 팀장의 표정을 보니 기분 나쁜 기색은 없었다. 진심으로 마음을 연 것이다.
술병이 비어가는 만큼 팀 케미가 좋아졌다.
“다음으로 너, 새로 온 감사실 출신.”
은빛의 화살이 태술에게 돌아갔다.
“너 잘해라. 감사실에서 왔다고 깝치면 나한테 죽는다. 특히 우리 오 주임, 잘 모셔라. 우리 센터에서는 국대급이니까.”
“이하동문이오.”
민지가 곁다리를 붙는다.
“저도 충심으로 두 분과 오 주임을 보필하겠습니다.”
태술도 일어나 두 여자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에라, 내친김에 내일 책상부터 바꾸자. 내가 민원 본다.”
엄 팀장이 분위기를 띄운다. 회식 때면 대접이나 받으려 하고 어쩌다 조크를 던져도 분위기만 깨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2차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음, 오늘은 기분도 낼 줄 안다.
체념.
그게 엄 팀장을 바꾼 것 같았다. 그 안에서 실속을 차린 것이다. 경도의 귀신 같은 관상. 허튼 생각 내려놓고 제대로 따르기로 한 엄 팀장이었다.
“2차는 노래방이야.”
원래 엄 팀장의 코스였다. 마이크 잡으면 기본이 다섯 곡이다. 100점이 나오거나 같은 숫자, 즉 77, 88, 99 같은 점수가 나오면 땡이라며 강제 징수까지 한다.
하지만 오늘은 읍내 최고층 빌딩의 스카이라운지였다. 어쩌다 은빛이 의견을 내면 핀잔을 놓기 일쑤더니 자진 납세를 한 것이다.
“아유, 우리 팀장님 이뻐 죽겠네?”
무려 1만 원짜리 커피를 받아 든 은빛이 애교까지 떨었다.
“흐음, 돈 쓰니까 야, 자에서 바로 최고 대우로 격상하네?”
“스카이라운지잖아요? 우리 여기서 파이팅 한번 할까?”
은빛이 경도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민지가 소스라친다.
“못할 거 없죠. 너무 크게만 안 하면 되잖아요? 팀장님부터?”
“나?”
“야자 타임까지 허락하신 배포인데 한번 밀어붙여 보시죠.”
“그래, 까짓거 누가 민원 넣으면 내가 책임진다. 맞!”
복.
파.
이.
“팅.”
마무리는 태술이 맡았다.
“괜찮은데? 한 번 더 하자. 맞.”
엄 팀장님, 재미 들렸다.
-복-파-이-팅.
야경을 따라 밤이 깊어간다. 맞복팀의 케미도 그 못지않게 깊어간다.
“아, 내가 용포읍 맞복팀을 애정하게 되다니…….”
“미투다.”
은빛과 민지는 의기투합한 채 구시렁거렸다.
공무원에게는 업무 분장이라는 게 있다.
이 분장은 팀장과 과장이 관장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위임사무인 경우가 대다수다. 즉 그 업무에 대해서는, 담당 직원만이, 국가를 대리해 처리한다.
그렇기에 책임과 한계가 따른다. 같은 공무원이라도 관여할 수 없으니 바로 ‘책임’ 때문이었다. 권한 없는 직원의 업무 행위는 무효가 된다.
그러나 운용의 묘라는 게 있기는 했다. 같은 공간에서 일어나므로 협력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생긴 게 직무대행 시스템.
다만 네 일 내 일을 나누다 보니 보이지 않는 벽과 알력, 차별이 생겼고 직원들 간의 피해의식이나 신경전까지 겹치면 팀 분위기는 개판이 된다.
“담당자 없어요. 내일 오세요.”
관공서에 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황당’이다.
-그럼 너는 뭔데?
-제 담당이 아니라 해드릴 수 없어요.
-그럼 너는 공무원 아니야?
일반 민원인은 이해할 수 없다. 그 별것도 아닌 것을 옆자리 직원이 좀 해주면 될 것을 나중에 오란다. 혈압 게이지가 확 올라간다. 이때 뭐 하나 걸리면 바로 불만이 터진다.
공무원 조직도 할 말이 많다. 업무 대체성을 폭넓게 인정하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그렇기에 공조직은 여전히 보신주의로 평가받는다.
-말썽만 없게.
21세기에도 여전히 바이블로 불리는 공직문화였다.
<업무 연계>
다음 날, 회의실에 모인 맞복팀이 팀 케미를 폭발시켰다. 업무 분장의 원칙을 그대로 살리면서 민원인의 편의를 최우선하는 방식을 도출한 것이다.
긴급 지원이건 기초수급자건 담당자가 없으면 가접수를 받아준다. 취약계층이나 장애인들 중 보호자가 없으면 찾아가는 서비스 대상으로 뽑아 따로 관리한다.
현장확인이나 물품 배분, 연계 활동 같은 것은 딱히 업무 분장에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 요 문제는 업무대행이 아니라 업무중복 방식으로 해결했다.
각자의 업무 분장에 다른 업무를 하나 더 써넣으면 된다. 이렇게 되면 그 업무도 내 것이 되니 내 업무니 네 업무니 하며 미룰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 일은 팀 케미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시도할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업무까지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경도의 인맥(?)들이 엄청난 뒷받침이 되었다. 이장단과 부녀회장단의 협조가 나오면 업무가 배로 빨라진다. 다른 직원들은 할 수 없지만 경도라면 가능하다. 이렇게 세이브된 시간에 다른 업무에 집중하니 능률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엄 팀장도 솔선수범에 나섰다. 팀장 의자에서 모니터나 클릭하던 사람이 도우미 띠를 매고 현장에 나선 것이다.
민원인들이 몰리면 안내를 했고 신청서 작성에 쩔쩔매면 대리 작성을 도왔다. 그래도 팀장이라 팀 업무를 꿰고 있다. 행정직 20여 년 짬밥까지 더해졌으니 굉장한 힘이 되었다.
첫 실험은 대성공으로 끝났다. 일주일 동안 헤매던 업무를 단 이틀 만에 해치웠다.
“와우.”
마지막 민원인 처리가 끝나자 은빛이 환호를 울렸다. 태술과 민지에게 다가가 하이파이브로 자축도 한다.
“기분이다. 커피는 내가 쏠게요.”
은빛이 지갑을 들고 체리 커피로 뛰었다.
그때 경도 핸드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여보세요?”
구석으로 가서 전화를 받으니 저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천기득일세.
천기득.
승가리 관상철학관의 천 거사였다. 아내의 병원행이 끝나면 연락하겠다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그날이 아니었다.
-저녁에 시간이 되나?
“재택근무인데 바꿀 수 있는지 알아보고 연락 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끝내고 자리로 돌아왔다.
“바꾸긴. 내가 할게. 업무 파악하고 관련법 조항 숙지할 게 있어서 야근할 생각이었거든.”
태술이 그냥 해결해 주었다.
“고맙다. 대신 나중에 내가 한번 해줄게.”
감사를 전하고 천 거사에게 문자를 보냈다.
[7시쯤 들르겠습니다.]
천기득.
그는 일본 사람이었다. 그 누구도 말하지 않지만 경도는 알았다.
며칠 미친 듯이 바쁜 통에 잠시 잊고 살았다. 그러나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황순감 할아버지와 연관 때문이었다.
오래전 단 한 번의 상도(相圖)를 그렸다던 싸목 할아버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단 한 번의 그림은 천 거사 앞이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연락 온 시간 간격이 짧았다. 아내의 수술이 미뤄지기라도 한 것일까?
생각 끝에 천 거사의 집에 닿았다.
“들어오세요.”
보살이 경도를 맞았다. 그녀에게는 수술의 기색이 없었다.
“왔나?”
거실에 앉아 있자니 천 거사가 나왔다. 이번에는 지팡이를 짚지 않았다.
그의 오른쪽 눈은 보인다. 정상인처럼 밝은 시력은 아니지만 보행 정도는 가능했다. 경도가 알고 있으니 지팡이를 놓은 것이다.
보살은 국화차를 놓고 물러나 앉았다.
“사모님이 병원에 가지 않으셨군요?”
경도가 먼저 운을 떼었다.
“대단하군.”
“질병궁에 맺힌 어두운 기색이 그대로지 않습니까? 수술을 했다면 사라졌겠지요.”
“기왕 시작했으니 더 해보게. 또 뭐가 보이나?”
“시험입니까?”
“황순감의 적통이라면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볼 수도 있겠지.”
“거사님이 본 것은 체념이군요.”
“……?”
경도의 말에 천 거사가 고개를 들었다. 안색은 이미 창백해진 후였다. 경도의 상괘가 또 한 번 그를 흔들어놓은 것이다.
“적색 가운데 섞인 자색과 흑색……. 역시 보이는 게로군?”
“…….”
“까마귀 깃털 색도 보았나? 그게 이룬 점점의 형태들…….”
“입꼬리 구각의 청색 역시 거사님의 체념에 불을 붙였겠죠?”
“허어. 그것까지?”
“거사님은 찰색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 정도 시력은 되지 않는 거 같은데?”
“찰색은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네. 나는 미치지 못했지만 반열에 오르면 인체의 에너지로도 느낄 수 있으니 고래의 관상 대가들은 주렴 뒤의 상도 읽어냈다네.”
“그렇군요.”
경도가 시선을 가다듬었다. 주렴 뒤의 찰색을 읽는다는 건 경도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튼 구각이 푸르면 저승사자가 코앞에 온 것이지요. 그래서 거사님 표정이 어두운 것입니까?”
“자네가 말했지 않은가? 내 눈의 어미에 점이 박혔으니 이혼점이라, 그럼에도 부부를 이루고 사는 것은 저 사람에게 질병이 있는 거라고. 외로운 불운에 힘이 되는 사람인데 천기를 읽는다는 내가 해줄 것이 없음이라.”
“그렇게 사모님을 애정하신다면 다시 확인해 보시지요. 주렴 뒤의 찰색을 읽는 전설은 아시면서 찰색 속의 찰색은 왜 모르십니까? 찰색이라는 것은 조변석개하는 것이니 그래서 어려운 것이 아닙니까?”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니라.”
“그럼 눈을 더 뜨십시오. 신장과 간장의 기를 모으면 조금 더 밝아질 겁니다. 그 노력은 곧 애정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인 것이니 관상불여심상이라, 그 정성 덕분에 겉으로 드러난 찰색 아래에 서린 화색이 보일지도 모르죠.”
“그대는 본다는 것인가?”
“제가 봐 드리면 황순감 어르신과의 사연을 말해주시겠습니까?”
“상을 보거라. 어차피 이리 연결된 것. 공감할 만한 상괘를 내놓으면 네 궁금증을 풀어주겠다.”
“그럼 한 번만 더 사모님의 상을 보겠습니다.”
경도가 보살에게 시선을 돌렸다. 관상에 익숙한 그녀였으니 경도를 향해 고개를 들어주었다.
“손바닥도 좀 보여주시죠.”
얼굴을 뜯어본 경도가 보살의 손을 요구했다. 중요하고 또 중요한 일이니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는 것이다.
손바닥.
거기서 천 거사의 미간이 살짝 구겨진다.
바닥을 본 경도 입가에 엷은 미소가 피었다가 스러졌다.
기선을 잡았다.
천 거사의 관상 성취는 굉장했지만 싸목 할아버지의 수준에는 견줄 수 없었다.
“사모님의 상은…….”
경도가 그 증명을 내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