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만렙 공무원님 084화
23. 열일 한 번 해보려고요-3
“이거야 정말…….”
시장은 흡족한 표정이었다. 식사가 시작되어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식사 자리에는 이 국장과 김 읍장이 동참을 했다. 읍 센터로 가려는 경도와 읍장에게 점심 제의를 한 시장이었다.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오 주임, 특진시켜 줬더니 바로 성과를 보는군. 이거 특진 한 번 더 시켜야겠어?”
시장이 덕담을 던졌다.
“시장님이 지원해 주신 덕분입니다.”
경도가 답했다.
“출근 늦게 한 거 말인가?”
“만약 평소처럼 오셨더라면 좀 곤란할 뻔했습니다.”
“회칼하고 농약을 가지고 있었다지?”
“예.”
“허어, 그 사람…….”
시장이 탄식을 토했다. 살의까지 있었다고 하니 기가 막힌 것이다. 주변에 수행원들이 있지만 섬뜩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건 이 국장의 공이었다. 오남일 국장 사건 이후에 컴백한 이 국장은 오직 행정 능력으로 시청을 장악했다.
시장에게도 득이었다. 공명정대한 실무로 뒷받침을 해주니 시정에 바르게 선 것이다. 이후에 맡긴 두 국장의 정리도 대성공이었다. 그 후로 시장의 마음이 열렸다. 위기탈출의 일환으로서가 아니라 이 국장에 대한 신뢰가 형성된 것이다.
그 신뢰가 경도의 특진을 이끌었다. 특별인사위원회가 열렸다지만 시장이 반대하면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게 도미노가 되었다. 마침내 경도가 K시의 고질 풍경 하나를 없앤 것이다.
더 높이 사는 건 시장이 직접 나선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1인 시위는 어혁배만이 아니었으니 시장이 나서면 선례가 될 수 있었다.
“시장 나와.”
“시장이 직접 사과해.”
모든 민원들이 시장을 찾게 된다. 그건 시장이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국장 선에서 해결이 되었으니 앞으로도 국장이 마지노선이 될 일이다.
시장실로 데려다 위로한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자, 이제 자백해 보게. 이 일은 대체 누가 기획한 건가?”
시장의 시선이 경도와 이 국장, 김 읍장을 차례로 더듬었다.
“기획은 저희 읍장님께서 하셨고 이 국장님이 특별 지원을 하셨습니다. 저도 두 분이 밀어주신다기에 용기를 가지고 나서본 일이고요.”
“김 읍장님이?”
시장의 시선이 읍장을 겨누었다.
“저는…….”
“사실 제가 이룬 소소한 민원 공감도 읍장님께서 지지를 하셨기에 가능한 일들이었습니다.”
읍장이 주저하자 경도가 대화를 이어갔다.
“관상으로 말인가?”
“관상보다는 공무원의 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관상은 그저 분위기용에 불과하지요.”
경도의 답은 딱딱 부러졌으니 읍장이나 시장이 토를 달 기회도 없었다.
“읍장님이 큰일 하고 계셨군요?”
시장의 치사가 나왔다.
“아닙니다. 제가 부족해서 용포읍에 구설수가 많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용포읍이 우리 시 인구의 거의 절반이 아닙니까? 당연히 구설이 많을 수밖에 없지요. 제가 좀 더 신경을 쓰겠습니다.”
“시장님…….”
“그나저나 오경도.”
시장이 경도를 바라보았다.
“예, 시장님.”
“이번에 특진했는데도 용포읍에 있는 건가?”
“예…….”
“읍장님이 끼고 계신 거로군요. 이제는 시정 발전을 위해서도 시청으로 보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 이 국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시장은 이 국장의 동의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방금 말씀하신 말에 답이 있습니다. 용포읍이 우리 시 인구의 3할이 아닙니까? 김 읍장님과 오 주임 같은 사람들이 버티고 있어야 최전방이 안정되는 것이니 그때까지는 시장님이 양보를 하시죠.”
“그게 또 그렇게 되는군요?”
시장이 웃었다. 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오 주임, 내가 차 한잔 살까?”
센터 주차장 앞에서 읍장이 체리 커피를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두 말없이 뒤를 따랐다. 일이 밀렸겠지만 대타를 맡아준 은빛에게 커피 한잔 쏘면 될 것 같았다.
“자넨 앉아 있게.”
읍장이 빈 테이블을 가리켰다. 읍장이 주문을 하고 커피까지 받아왔다. 각별한 대우가 아닐 수 없었다.
“고맙네.”
커피를 내민 읍장이 나지막이 말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아까 자네 없는 동안에 이 국장에게 들었네.”
“무슨……?”
“지난번 정리된 국장 두 명…… 나를 기사회생시킨 일등공신이 자네라고…….”
“…….”
“그럴 줄 알았었네. 국장을 정리하게 되면 당연히 내가 끼어야지. 그런데 살아남길래 누군가 도움을 주었을 거라고 믿었지.”
“죄송하지만 누가 도움을 준 것이 아닙니다. 읍장님은 아직 정리할 공직 사명이 남으신 거죠.”
“공직 사명?”
“아까도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용포읍의 도약.”
“…….”
“이번 인사이동으로 읍장님은 재신임이 되신 겁니다. 우리 센터 직원들은 물론이고 시청의 직원들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러니 그 동력으로 용포읍의 도약을 이끄셔야죠.”
“재신임이라…….”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없는 힘이나마 다른 부서로 가는 날까지 읍장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오 주임.”
“어혁배 사장님 건도 잘 해결이 되었으니 이제 접었던 날개를 펴주시기 바랍니다.”
“날개?”
“관상으로 봐도 이마 보골에 이어 준두와 양 관골에 윤기가 서리고 있습니다. 장수로 치면 거병하고 출병하여 명예를 드높일 때이니 의욕을 가지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관상으로도 그렇다?”
“예, 읍장님.”
“고맙네. 사실 아까 시장님 말 들으면서 결심은 섰다네.”
“커피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시청에서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직원들이 고생했을 테니 그것도 읍장님이 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거 가지고 되겠나? 안 그래도 어혁배 사장이 우리 용포읍 관련 민원이라 늘 찝찝했는데 이제 속이 다 후련하니 직원 전체에게 쏘겠네. 여기요 우리 직원 숫자대로 커피 배달 좀 부탁해요.”
주문을 넣는 읍장의 목소리가 사이다처럼 느껴졌다.
“시청 앞 용포읍 관련 장기 1인 시위를 우리 오 주임이 설득해서 종식 시켰습니다.”
“……!”
읍장의 선언을 들은 과팀장들이 경악을 했다.
“오늘부터 나도 심기일전해서 용포읍의 복마전을 종식할 생각입니다. 이제 인사이동도 끝났으니 여러분도 분발해서 협력을 경주해 주시기 바랍니다.”
읍장의 선언은 짧았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묵직한 메시지였으니 과팀장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날이 시간이나 때우던 읍장이 변모한 것이다.
“오 주임.”
민원실로 내려온 엄 팀장이 경도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하이파이브를 원하니 손을 부딪쳐 주었다.
“기어이 대형 사고 쳤네, 쳤어.”
엄 팀장의 목소리에는 뿌듯함이 담겨 있었다.
“오 주임 대형 사고가 한두 번인가요? 그보다 현 주임님 자리는 어떻게 된 거예요?”
은빛이 현실을 상기시켰다.
“아, 그거…… 과장님이랑 계속 얘기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똥 밟을 거 같아.”
“똥이요?”
“그 개싸가지 감사실 직원 있잖아? 과장님이 그 인간을 우리 팀으로…….”
“네에?”
은빛과 민지가 동시에 경기를 했다.
“그 인간이 인수인계니 뭐니 하면서 이틀이나 늦게 왔잖나? 아침에 과장님에게 과 총괄 서무 자리를 원한 모양이야. 과장님은 두말없이 우리 팀으로 밀었고.”
“말도 안 돼요. 그러잖아도 바빠 죽겠는데 사회복지도 아니고 행정직을…….”
민지가 울상을 지었다.
“언니, 오 주임도 행정직이야. 물론 나도…….”
은빛이 볼멘소리를 냈다.
“두 사람이야 그렇지만 그 사람이 민원 보겠어? 차라리 복지행정팀으로 보내고 거기서 사람을 바꾸면…….”
“나도 그랬지. 감사실에서 콧대 높이던 사람이 민원실 근무가 되겠냐고? 하지만 과장님이…….”
“지금 어디 있죠?”
경도가 물었다. 태술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과장님이 우리 팀으로 보직 내줬더니 병가 내고 들어가 버렸다네. 시청 여기저기서 나한테 압력 들어오는 거 보니 어디 가서 인맥 동원하고 있겠지. 감사실 쪽에 알아보니 뭔가 실수를 해서 견책 처분을 받는 바람에 밀려나는 눈치더라고.”
“사람도 없는데 우리가 받죠? 그래도 남자니까 물품 배급 등의 노가다는 뛸 수 있을 겁니다.”
경도가 짐짓 의사를 밝혔다.
“그 사람이 할까? 괜히 우리 분위기만 깰 거 같은데?”
“제 동기예요. 제가 잘 구슬려서 적응하도록 할게요.”
우려하는 민지를 경도가 설득했다.
“관상 봤어?”
“그럼요. 기초미소 종필창대(起初微小 終必昌大)형이에요.”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창대하리라?”
“네.”
“진짜?”
“네.”
“오 주임이 그렇다면 믿어야지 뭐. 시청 앞 장기 시위자까지 해결하고 왔다니…….”
민지는 경도를 믿었다. 시청의 쾌거는 경도의 설명으로 알고 있었다.
“그럼 업무 분장은 내일 그 친구 오면 하도록 하고 오 주임은 나 좀.”
엄 팀장이 상황을 정리했다.
“앉아.”
상담실로 들어서자 엄 팀장이 자리를 권했다.
“하실 말씀 있습니까?”
“사람, 그런 쾌거를 올릴 때는 나한테 먼저 말을 했어야지?”
“죄송합니다. 준비가 끝나면 말씀드리려 했는데 돌발이 있었습니다.”
“그 돌발이 시위 종료야?”
“그렇게 되었네요.”
“아무튼 자네…… 다시 봐야겠어. 이제 못 하는 게 없을 정도잖아?”
“고맙습니다.”
“권태술인가 하는 인간이 우리 팀 오는 것만 빼고.”
엄 팀장이 쓴 물을 넘겼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과장님께 말씀드려 봐. 그 인간 다른 팀으로 보내자고. 자네 말이라면 과장님이 받아들일지도 몰라.”
“팀장님.”
“배 주임 말도 일리가 있어. 은빛이가 이제 문제 안 일으키고 일하고 있는데 개싸가지가 웬 말인가?”
“팀장님의 리더십으로 포용하시면 되잖아요?”
“감사실에서 놀던 놈이 내 말 듣겠어? 보나 마나 시청으로 복귀할 궁리만 하고 있을 텐데?”
“복귀 못 합니다.”
경도가 잘라 말했다.
“지금 뭐라고 했나?”
“복귀 못 한다고요. 적어도 팀장님보다 빨리는요.”
“관상인가?”
“예.”
“우리 팀으로 오는 것도?”
“예.”
“허어, 사람 미치겠군.”
“어차피 벌어진 일입니다. 그러니 팀장님 권위로 휘어잡으세요. 그게 최선입니다.”
“좋아. 그럼 업무 분장은?”
“감사실 출신이라고 해도 우리 팀에서는 신참 아닙니까? 그럼 교육 빡세게 시키셔야 정예병으로 거듭나지 않을까요?”
“신참처럼? 지역 문중에 다음번 시장 후보 빽을 가진 친구를?”
“그 말씀 홍 의원님이 들으시면 좀 섭섭하시겠는데요?”
“……!”
-양다리 걸치시게요?
엄 팀장은 경도가 날린 견제구를 알아들었다.
“그럼 저는 밀린 일이 많아서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오, 오 주임.”
엄 팀장이 말렸지만 그대로 문을 나왔다. 그 길로 태술에게 깨톡을 날렸다.
[어디냐?]
첫 깨톡은 제대로 씹혔다.
[나 아침에 용포읍 관련 시청 1인 장기 시위자 문제 해결하고 왔거든?]
[시장님이랑 점심 식사하느라고 좀 늦었는데 너 왔다가 갔다더라?]
[미안하지만 우리 팀이 감사실처럼 한가한 곳이 아니다. 졸 바빠.]
[내일은 꼭 나와라.]
두 번째 보낸 깨톡에 10여 분만에 답문이 들어왔다.
[알았어.]
그 시간, 태술은 시청에 있었다.
방법을 알아보지만 도리가 없었다. 조기룡의 강경함 때문이었다. 어느 과의 팀장이나 과장이 도와주려 하면 조기룡이 선을 그었다.
이제 감사실장 된 조기룡. 누구든 그를 적으로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 경도가 시장과 식사를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분위기상 별수가 없으니 하는 수 없이 답문을 보낸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마침내 태술이 출근을 했다.
<전출>
떠나기를 원하는 직원에게는 신세계 같은 단어지만 원치 않는 직원에게는 발암 같은 단어였다.
새로운 부서에서 새로운 사람과 함께 새로운 업무에, 새로운 법-조례-규칙을 익혀야 하는 것이다.
그건 마치 신입사원으로 돌아가는 것과도 같았다. 7급이건 6급이건 5급이건, 당분간은 완전히 초짜가 되는 것이다.
“반갑다.”
경도가 손을 내밀자 태술이 떨떠름하게 잡았다.
“총괄 서무는 오 주임, 업무대행은 배 주임, 복지 사각지대와 주거 취약 계층 주거 지원은 이 주임, 그리고 새로 온 우리 권 주임, 긴급 지원에 이웃돕기 배분 및 관리, 이재민, 무연고, 행려자 지원업무 담당. 이상.”
엄 팀장의 업무 분장이 끝났다. 현 주임의 자리에는 경도가 앉았고 경도의 책상은 태술에게 돌아갔다.
“부탁해.”
경도가 물품 배분 대장과 리스트를 건네주었다. 업무 인계였다.
“이, 이걸 나보고 가가호호 배달하라고?”
물품 리스트를 본 태술이 거품을 물었다.
“내일부터는 칼각 양복 말고 평상복 입고 와라. 우석 씨, 우리 새로 오신 주임님 지원 좀 부탁해.”
경도가 우석을 불렀다. 태술은 황당하지만 항변할 기회도 없었다. 경도와 민지, 그리고 은빛이 일제히 민원상담과 입력 모드로 들어간 것이다.
“……!”
물품 창고로 간 태술은 한 번 더 좌절했다. 그 복도에 쌓인 휴지와 생리대, 담요, 10㎏ 쌀부대, 선풍기와 라면은 거의 한 트럭 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