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만렙 공무원님 071화
19. 누울 자리 보고 발 뻗으셔야죠-2
굽신굽신, 패잔병처럼 허리를 조아리며 차에 올랐다. 몸은 땀으로 젖은 지 오래였다.
“갈까요?”
신참 직원이 태술에게 물었다.
“에이 씨…….”
대답은 없이 눈만 부라렸다. 닥치고 출발하라는 뜻이었다.
“앞으로 잘해.”
안선주의 불호령은 멀리멀리 태술을 따라갔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아침부터…….”
경도가 부녀회장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무슨 소리예요? 앞으로도 누가 주임님 건드리면 말만 하세요. 우리가 책임지고 막아드릴 테니까.”
안선주가 목청을 높였다.
“아유, 감사실? 기가 막혀서…….”
“맞아. 감사실이면 남의 성의를 뇌물로 몰아붙여도 되는 거야? 생각할수록 괘씸하네.”
“우리 열 받은 김에 시장실로 쳐들어갈까?”
“아, 아닙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시면 좋겠습니다.”
불씨가 살아나자 경도가 부녀회장들을 달랬다.
“이쪽으로들 오시죠. 제가 따뜻한 커피 한잔 쏘겠습니다.”
경도가 체리커피를 가리켰다.
바빠진 건 인희였다. 뭔가를 스케치하다가 단체손님(?)을 받은 것이다.
부녀회장들은 커피를 받아들고서도 성토를 멈추지 않았다.
대한민국 아줌마와 할줌마 파워, 함부로 보면 큰일 난다. 더구나 그녀들은 그냥 아줌마가 아니라 동네를 이끄는 사람들이었다.
“드세요.”
센터로 돌아와 엄 팀장에게 위로의 아이스커피를 건네주었다.
“부녀회장들 가셨나?”
“예, 방금…….”
“어휴, 이것 참…….”
엄 팀장이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 짜식들. 공무원은 양주 한 병도 못 사나? 저희들은 잘도 받아 처먹으면서…….”
“잊어버리세요.”
“다시 문제 삼지 않겠지?”
“그럴 겁니다. 보셨잖아요?”
“아니야. 알아보니까 권태술이라는 친구가 집요한 데가 있더라고. 어디 한번 찍으면 끝장을 본다는 거야.”
“좀 그런 편이죠.”
“오 주임 동기라지?”
“예.”
“집안이 빵빵하다던데? 큰아버지가 우리 시 예총고문에 체육회장, 문중회장을 지냈고…….”
“아마 그럴 겁니다.”
“이번 시장선거에 유력 후보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권우일 문화원장이 현직 안동권씨 문중회장이고?”
“그새 많이도 알아보셨네요?”
“싸가지가 없길래 말이야. 그런데 그 정도면 싸가지 없을 만하더라고. 승진도 초고속이라던데 그럴 만하고…….”
“…….”
“이놈의 공무원은 역시 빽이 든든해야…….”
엄 팀장이 괜한 분루를 삼킨다.
“오 주임, 과장님 호출.”
은빛이 수화기를 들고 말했다.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2층으로 올라와 수습에 나섰다.
“질책하려 부른 거 아닐세. 일단 앉게나.”
육 과장이 자리를 권했다.
“받게.”
육 과장이 작은 선물을 꺼내놓았다.
“과장님?”
“부녀회장님들 선물 보고서야 알았네. 그러고 보니 나도 선물을 안 했더라고.”
“과장님…….”
“넥타이야. 솔직히 말하면 사무관 승진하면서 받은 건데 내가 소화 시킬 수 있는 칼라가 아니야. 게다가 나는 넥타이도 잘 안 매는 스타일이고. 그러니 오 주임이 쓰게나.”
“그런 걸 제가 받아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내가 보니까 자네에게 잘 어울릴 것 같더라고.”
“그럼 고맙습니다.”
“아까 일은 잘했네. 엄 팀장까지 수습해 주었으니 기막힌 대응이었어.”
“안 그러면 과장님이 또 확인서 써주실까 봐…….”
“자네 일이라면 백 번이라도 써주지. 직원이 일하다가 발생하는 파편은 부서장이 막아야지 누가 막겠나?”
“감사합니다.”
“후원회 일은 잘되어가나? 이 국장님이 체크 들어오시던데. 잘 좀 밀어주라고…….”
“곧 발족해 볼 계획입니다.”
“잘해보시게. 이 국장님도 기대가 큰 모양이야.”
“예, 과장님.”
인사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태술의 전화가 들어왔다.
받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두 번이 더 걸려왔다. 그래도 받지 않았다.
[아침 일은 미안하게 됐다. 저녁에 시간 좀 내줘라. 술 한잔 살게.]
문자도 들어왔다. 너무나 가볍게 씹어주었다.
10분이 지나자 또 전화 공세가 시작되었다. 꼬리 잡힌 동영상 때문에 똥줄이 제대로 타는 모양이었다.
벨소리가 성가시기도 하니 그쯤에서 받아주었다.
“웬일이냐? 바쁘신 분이.”
-미안, 일하는 데 방해됐어?
절친이라도 된 양 공손 모드로 나온다.
“괜찮다. 읍면동 민원실 뺑이치는 걸 높으신 감사실 직원들이 알겠냐?”
-…….
“용건만 말해라. 앞에 민원계신데 민원 앞에서 핸드폰 받는 것도 너희들이 암행으로 단속한다며?”
-…….
“할 말 없으면 끊는다.”
-아, 아니 잠깐만.
“…….”
-저녁에 잠깐만 보자. 잠깐이면 돼.
“바쁜 분이 나 같은 허접 민원담당을 왜?”
-미안하게 됐다. 아무튼 시간 좀 내줘라.
“…….”
-우리 동기들 모이는 호프집 알지. 거기서 기다릴게.
“알았다. 하지만 업무가 많아서 칼퇴근은 못 한다.”
-괜찮아. 나오기만 해.
통화가 끝났다.
인간의 이중성. 그 단어가 떠올랐다. 딱히 만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궁금한 게 있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경도에게 비호감인지. 그것만은 체크하고 싶었다.
퇴근 무렵, 조경철의 방문을 받았다. 업무를 마감하고 체리커피에서 그를 만났다.
“후원의 밤이요?”
놀라운 제의를 해왔다.
“뭘 그렇게 놀라?”
조경철이 핀잔을 주었다.
“제가 무슨 인기인이나 정치인도 아니고 후원의 밤이라고 하시니…….”
“왜 인기인 아니야? 알고 보면 짭짤한 셀럽이지.”
“지국장님…….”
“우리 김 교수님과 자제분도 그렇고 최 사장님에 부녀회장단들도 그렇고…… 심지어는 명혜 아버지께서도 오 주임 후원회라면 참가하시겠다고 하더라고.”
“명혜 아버지가요?”
“포터로 부부가 장사를 나가신다네. 첫날 수입은 꼭꼭 묶어놨대. 나중에 자네에게 선물이라도 하려고.”
“억.”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 한마디에 가슴이 먹먹해진 것이다.
“천기누설하고 다니는 사람이 그만 일에 왜 이래?”
“하지만…….”
“시청 회의실, 의회 회의실에 구민회관 본관까지 섭외 가능하네. 어디로 정할까?”
“그렇게까지…….”
“아니면? 오 주임이 찜해둔 데라도 있어?”
“저는 그냥 단출한 것이 좋습니다.”
“그럼 연화교 옆에 있는 중국요리 전문점 화홍 어때?”
“괜찮은데요?”
“그럼 거기로 하고 내가 모르는 사람들 리스트 인계하라고.”
“리스트까지야…….”
“어허, 얼른 제출하세요. 어차피 이런 일은 중이 제 머리 못 깎아.”
“알겠습니다. 문자로 넣어드릴게요.”
“그리고 아침에 큰 사건 있었다면서?”
“큰 사건요?”
“어허, 후원회장 맡겨놓고 마음을 안 여네? 감사실 직원들하고 오 주임님 지지파 부녀회장들하고 세계대전을 벌였다며?”
“그게 지국장님 귀에까지 들어갔어요?”
“나 참, 우리 관상박사님이 사람 우습게 아네? 이 K시에 일어나는 일은 다 내 귀에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
“뭐 팩트를 말하자면 부녀회장 한 분이 제보를 하셨지. 안하무인 감사실 조지는 기사 좀 내달라고.”
“그랬군요.”
경도가 웃었다.
“누가 우리 오 주임 씹었어? 한번 까줘?”
“아닙니다. 그냥 해프닝이었으니 넘어가세요.”
“진짜?”
“예.”
“좋아. 나중에라도 문제 생기면 말만 하라고. 안 그래도 누군가 오 주임 시샘해서 일 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건 근본적인 건데…… 언제 분위기 봐서 시장에게 허락을 득해두라고. 관상 활동 말이야.”
“가능할까요?”
“당연하지. 기관장의 허락이 나오면 만사형통이야. 게다가 관상은 오 주임의 업무와 직접 연관도 없는 일이니까.”
“…….”
“후원회 발족한 다음에 첫 타로 후원한 기사 들고 가서 담판 지어봐. 내가 기사로 지원해 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조경철의 자문을 받아들였다.
공무원은 겸업 금지다. 그러나 업무와 관련되지 않는 활동은 기관장의 허가를 득하면 가능했다. 그렇게만 되면 편안하게 관상과 후원회를 이어갈 수 있었다.
조경철을 보내고 나자 카톡이 들어왔다. 태술이었다.
시간을 보니 8시에 가까웠다. 그사이에 들어온 문자만 세 개였다.
[언제쯤 오는 거야?]
[아직 멀었냐?]
[바쁘면 내가 센터로 갈까?]
답하지 않았다. 원래도 칼퇴근하고 달려갈 생각은 없었다. 조경철의 방문으로 시간을 지체했으니 이 정도면 되었다.
경도가 차에 올랐다.
“여기야.”
호프집에 들어서자 태술이 손을 들어 보였다. 약점이라는 게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었다.
“뭐 먹을래?”
메뉴판까지 알아서 대령시킨다.
“생각 없다. 용건이나 말해봐.”
“이 집 치킨 괜찮은데…….”
“높은 분 앞에서 먹다가 체할 거 같아서.”
“아직도 화났냐?”
“아니. 솔직히 너랑 나랑 화내고 말고 할 사이도 아니잖아?”
“…….”
“용건.”
“실은 오해가 있는 거 같아서.”
“무슨?”
“아침의 그 동영상, 보기에 따라서는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그 팀장님이 외국 다녀오셨거든. 내가 면세품 하나 부탁한 거야. 봉투는 남은 돈 주신 거고.”
제법 아귀를 맞춰놓는다. 아마 온종일 궁리를 했을 것이다.
“그래?”
“그렇다니까. 팀장님에게 확인해도 좋다.”
“그런데 아까는 왜 그렇게 혼비백산하셨을까?”
“야, 아까도 말했지만 앞뒤 자르고 영상만 보면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네.”
“그렇다니까. 아버지께서 문중 일 보시는데 문중회장님께 선물하고 싶다고 해서…….”
“그분이 이번 시장선거에 나올 예정이라지?”
“그래.”
태술의 안면근육이 풀리는 게 보였다. 경도가 장단을 맞춰주니 말이 통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럼 떳떳하네?”
“바로 그거야. 내가 너를 오해했듯 너도 나를 오해한 거라고.”
“진짜냐?”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그거 삭제해라. 대신 내가 감사실에 있는 동안 너는 감사 열외다.”
“오. 특혜씩이나?”
“그리고 동기 단톡방 제명도 취소한다. 그러면 됐지?”
“아, 이거 하해 같은 성은에 눈물이 다 나네. ㅆㅂ.”
“ㅆㅂ?”
“권태술.”
여기서 경도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눈빛도 레이저처럼 매섭게 정돈되었다.
“왜 그래? 잘 나가다가?”
“너 나를 아직도 찌질이로 생각하냐?”
“찌질이라니?”
“아니면? 그날 네가 받아 처먹은 봉투에는 적어도 50만 원이 들어 있었어. 뿐만 아니라 그 나흘 전에도 봉투를 먹었고, 그 이틀 전에도…… 네 이마에 누리끼리하게 서린 찰색이 부수입을 말하고 있는데 뭐 면세양주? 너는 면세양주 사는데 백만 원도 넘게 찔러주냐?”
“……!”
“게다가 그 진상수 팀장, 관상 체크했는데 엄청나게 해먹는 인간이더군. 그러다 너한테 꼬리를 밟혔겠지. 그 무마를 위해 따로 만난 거고.”
“……!”
“더 계속할까? 네 최근의 운을 나타내는 유년운기부위에는 다른 뇌물도 다 나와 있어. 보름 전에 한 건, 한 달 전에 두 건. 기왕이면 작년 것도 좌라락 뽑아줄까?”
“……!”
“개자식, 어떻게 나오나 보려고 했더니 사람을 븅신 호갱으로 알아. 내가 이창교 국장님 폰 번호 아는데 한번 전송해 볼까? 그분은 과연 어떻게 판단하실지.”
“야, 오경도…….”
태술이 하얗게 질려갔다. 관상으로 아킬레스건을 찔러대니 바로 내상을 입은 것이다.
“개자식, 저는 감사실 직원이라는 권세로 온갖 비리를 자행하는 주제에 부득이한 근태 단속에 약소한 승진선물 같은 거나 뇌물로 몰고…….”
“미안하다. 오경도.”
태술이 바로 꼬리를 내렸다. 이제야 경도를 제대로 파악한 것이다.
“됐고, 그보다 내가 여기 나온 이유는 한 가지다.”
“뭐?”
“너 나한테 왜 이렇게 비호감이냐? 그거나 한번 들어보자.”
“그건…….”
잠시 주저하던 태술이 호프를 들이켰다. 한 잔을 원샷으로 비워내더니 겨우 말을 이었다.
“대학 때문이다.”
“대학?”
“우리 임용교육 들어갔을 때 정락현 형님이 기수장 맡고 네가 부기수장 맡았잖아?”
“…….”
“그때 네가 폐교된 부실대학 나온 교육생도 있는 모양이라고 말한 적 있었다. 동기들이 미친 듯이 비웃었었지. 분명 저소득전형일 거라고.”
“생각난다. 교육운영과에 리포터 내러 갔다가 직원들이 하는 말 들었던 거. 하지만 다른 시군구 합격생이라고 말했을 텐데?”
“나도 그 대학 나왔다.”
“……?”
“우리 대학이 구리긴 했지. 하지만 다들 쓰레기취급을 하니 기분 무쟈게 조졌다. 그때부터 네가 싫었다.”
“허얼.”
황당했다. 그러나 이해가 되었다.
경도 입장에서는 하나의 화제에 불과했지만 태술은 치욕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무섭다. 그건 내 실수 같다만 그걸 가지고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미안하다. 대학은 구린 데 나왔지만 좋은 보직을 받고 보니 너희가 다 우스워지더라. 나보다 조금 좋은 대학 나왔다고 으스대던 놈들이 읍면동이나 찬밥 부서에서 비실대는 걸 보니. 게다가 감사실 프라이드로 잘못된 우월감을 갖다 보니 좀 오버했다.”
“대학 문제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때는 다른 교육생들의 일거수일투족과 비교가 되던 때라서 위로차 전한 말이었는데…….”
“…….”
“이 파일 말이다. 사실 이 국장님이나 아는 기자들에게 보내서 처리할 생각이었다. 네가 너무 재수 없게 권세를 부리길래.”
“기자들?”
태술이 소스라쳤다.
“하지만 나도 과오가 있었네?”
“…….”
“그래서 말인데 내가 제의 하나 하고 싶은데?”
“어떤 제의?”
“감사실에 있다 보니 우쭐하는 프라이드에 읍면동 직원들이 우습게 보인 거라며?”
“…….”
“그런데 거기가 대한민국 행정의 최전방이거든. 읍면동 없이 행정이 돌아갈 것 같냐?”
“…….”
“나 승진선물 돌려주고 자술서 낸다. 그러니 너도 양심껏 셀프 징계로 셀프 디스 처먹고 우리 용포읍 자원해서 와라.”
“뭐?”
경도의 돌발 제안에 태술의 시선이 멋대로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