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울 자리 보고 발 뻗으셔야죠-1> (70/245)

관상만렙 공무원님 070화

19. 누울 자리 보고 발 뻗으셔야죠-1

늦잠을 자버렸다. 잔뜩 흐린 날 때문이었다.

늦게까지 중국 관상책을 보다 잠들었다. 중국어까지 챙기다 보니 새벽잠에 빠진 것이다.

센터로 가는 길에 민지에게 문자가 왔다.

[감사실에서 근태점검 나왔어. 늦지 않도록 조심해.]

[고맙습니다. 다 왔어요.]

문자를 보내고 속도를 높였다.

“……!”

차에서 내리자 반갑지 않은 얼굴이 보였다. 감사실에서 나온 두 사람 중의 하나가 권태술이었다. 9급 신참을 데리고 나왔으니 어깨가 부러져라 힘이 들어가 있었다.

“세무팀하고 행정팀에서 시건이 몇 건 걸렸대. 보안점검도…….”

민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엄 팀장은 태술 옆에 붙어서 수다를 늘어놓고 있었다. 딴에는 감사실 직원들과도 친하다는 과시였는데 경도는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아오, 우리 팀장님 언제 철드시나?”

경도 뒤에 들어온 은빛이 혀를 찼다.그녀의 복장과 화장은 오늘도 공무원 표준형이었다.

다른 팀의 점검을 마친 태술이 경도네 팀으로 다가왔다. 경도를 쓰윽 훑어보더니 임무에 돌입한다. 컴퓨터를 확인하고 서랍을 열어보고 심지어는 휴지통까지 체크했다.

‘타겟은 나군.’

경도는 알았다. 태술의 눈빛이 그랬다.

그는 여전히 의기양양했지만 찰색은 좋지 않았다. 이마의 천중에서 관록까지 청색이 내려왔으니 윗사람들로부터 질타와 책망이 예정된 것이다.

“뭐죠?”

태술이 은빛의 쓰레기통에서 한 건을 올렸다. 어제 어르신 민원의 신청서를 대신 쓰다가 실수하고 버린 것이다.

쓰레기통은 원래 퇴근과 함께 비워야 한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더러 그러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아, 그건…….”

“주민번호와 주소가 있는데 이렇게 버려도 되는 건가요? 여긴 개인정보를 이렇게 취급해요?”

구겨진 종이를 은빛 앞에 흔든다. 경도가 그 앞에 나섰다.

“내가 버린 거야. 내 옆에 쓰레기통이 없어서.”

“호오, 백기사 모드?”

“CCTV 확인해 보던가?”

“자수까지 하는데 그럴 수야 없지. 박 주임, 여기 자술서 확인받아.”

태술은 마무리를 잊지 않는다.

“오 주임?”

은빛이 무안한 표정을 짓는다.

“내 동기잖아요? 나중에 처리하면 돼요.”

경도가 은빛을 안심시켰다.

“다 썼으면 팀장님하고 오경도 주임님, 잠깐 보시죠.”

나름 정중하게 호명을 한 태술이 먼저 밖으로 나갔다.

“나?”

엄 팀장 표정이 급속히 냉각되었다.

“차 트렁크 좀 열어보시겠어요? 투서가 들어와서 말이죠.”

태술이 엄 팀장 차를 가리켰다.

“뭐야? 누가 그따위 투서를?”

엄 팀장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죄송합니다.”

“…….”

“트렁크요.”

엄 팀장이 딴전을 부리니 태술이 트렁크를 두드렸다.

“이봐요, 권 주임님.”

경도가 견제하자 바로 추가 주문이 이어졌다.

“오 주임님 차도 좀 부탁드립니다.”

차가운 존댓말이 나온다. 권위가 잔뜩 실렸다는 건 두 번 말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아침부터 꼭 이래야겠나?”

엄 팀장이 슬쩍 직급으로 눌러본다.

통통.

태술은 트렁크를 두드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주저하던 엄 팀장이 결국 트렁크를 열었다. 발렌타인 21년산이 나왔다.

“뭡니까?”

태술의 입술이 미묘하게 올라갔다. 한 건을 잡았다는 표정이었다.

“이거…… 내가 마시려고 산 거야.”

“발렌타인을 말입니까? 그것도 21년산을?”

“왜? 나는 그 정도 마시면 안 되나?”

“증명이 필요합니다.”

“그게…… 우리 마누라가 산 거라서…….”

“사모님이 산 걸 왜 팀장님이 싣고 다니십니까? 저를 좀 이해시켜 보시죠.”

“그거야…….”

“이따 감사실에 들어오셔서 경위서 내십시오.”

일방통고를 마친 태술이 경도 차로 다가왔다.

톡톡.

역시 트렁크를 두드린다. 열라는 뜻이었다.

“나도 투서 들어왔냐?”

톡톡.

태술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가에 썩소만 가득할 뿐이다.

그냥 넘어갈 인간도 아니니 트렁크를 열었다. 특별한 게 나올 리 없었다.

태술의 인상이 구겨졌다. 뭐라도 흠을 내고 싶은데 걸리는 게 없는 것이다.

그냥 물러서니 뭣하니 차 안을 기웃거린다. 뒷좌석에 뭔가가 보였다. 그걸 가리키는 태술이었다.

“높은 분이시니 얼마든지……?”

아무 생각 없이 뒷문을 연 경도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

태술이 다가와 경도를 밀었다. 뒷좌석에 문제가 있었다.

시트 아래의 작은 상자에 선물이 꾸역꾸역 담겼던 것이다. 넥타이도 있고 벨트에 지갑도 있고…… 심지어는 10만 원 봉투도 여럿이었다.

“호오, 대박.”

태술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누가 봐도 뇌물로 보이는 그림이었다.

“설명해 보시지?”

그가 돈봉투를 흔든다. 순간 경도도 당황했다. 이런 그림은 기억에 없었다. 재빨리 어제를 되감아본다.

퇴근 때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 다른 부서들처럼 업자를 상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어떤 업자가 몰래 넣고 갔을 리도 없다.

어제 따로 만난 사람은 부녀회장단과 두나였다.

‘엇?’

그제야 그림의 출처가 떠올랐다. 경도가 장미순의 상괘를 내고 있을 때였다.

부녀회장 하나가 차를 빼야 한다고 경도 차 키를 받아간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한 선물에 작은 카드가 보였다.

[승진 축하해요, 현풍리 이경순]

봉투에도 흔적이 남았다.

[승가리 안선주]

그녀들의 선물이었다. 승진축하선물을 경도 몰래 차에 실어둔 것이다.

“이런 일에 전문일 테니 직접 알아보시죠.”

경도가 안선주 전화번호를 넘겨주었다.

“업자?”

“우리 읍 부녀회장님.”

“장난하냐?”

“확인시켜 주지.”

경도가 안선주의 번호를 눌렀다.

-어머, 관상박사님,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전화기 속의 안선주가 반색을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곤란한 일이 생겨서요.”

-어떤?

“어젯밤에 제 차에 선물을 실어놓으셨네요? 이게 지금 감사반에 걸려서 뇌물로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뇌물요? 아니, 어떤 정신 나간 놈이 그걸 뇌물로 봐요?

안선주의 목소리가 천둥을 울렸다.

-죄송합니다. 감사실 직원 바꿔드릴 테니 통화 좀 해보시겠어요?

경도가 전화를 넘겼다.

“여보세요.”

태술이 전화를 받아들었다.

-감사실 직원이시라고요?

“그렇습니다만.”

-나 용포읍 총부녀회장이에요. 그 선물들 우리 부녀회장단이 오 주임님 승진선물로 준 거 맞아요. 목록도 확인해 드릴 수 있어요. 그러니 엄한 사람 잡지 마세요.

“이보세요, 현금에 고가 명품에…… 김영란법 모르세요?”

-김영란법? 알죠. 아는데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리고 우린 오 주임님에게 청탁관계도 아니에요. 비리 같은 게 일어날 일이 없다고요. 그냥 우리 용포읍을 위해 애쓰는 게 고마워서 마음을 모아준 건데 그게 문제가 돼요?

안선주의 목소리는 초스피드로 울려 나왔다.

“이봐요. 무슨 핑계를 대건 이건 김영란법 위반입니다. 불법에 직무위반입니다.”

-불법? 그럼 우리가 전부 범법자란 말이에요?

“아무튼 그렇게 아시고 자중하세요. 잘하신 일이 아니라고요.”

훈계를 마친 태술이 핸드폰을 경도에게 던져주었다.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못 빠져나간다.”

태술은 몹시 흐뭇했다. 신참을 시켜 목록을 만들고 사진을 찍었다.

그 기고만장함은 딱 거기까지였다. 어디선가 굉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안선주가 파이버도 없이 소형 오토바이를 끌고 도착한 것이다.

“오 주임님.”

그녀는 타고 온 오토바이부터 팽개쳐 버렸다.

“누구예요? 그 감사과 직원인지 뭔지?”

소매를 걷고 콧김을 뿜는다.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말릴 수도 없는 게 그로부터 10여 분만에 용포읍 부녀회장단 열여섯 명이 속속들이 도착한 것이다.

“뇌물?”

그녀들이 치를 떨었다.

“당신 째진 아가리라고 함부로 놀리지 마. 보아하니 젊은 게 뇌물과 선물도 구분 못 해? 니 눈깔에는 이게 뇌물로 보이냐?”

부녀회장이 열여섯 명이었다. 맹세컨대 그들의 기세는 하느님도 꺾지 못할 것 같았다.

게다가 그녀들은 단순히 대한민국 열혈 아줌마로서의 악다구니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개중에는 시장에 국장들과도 친분이 있었으니 당장 요로에 전화를 걸어 떼거지 항의를 쏟아놓았다.

“잠깐만요, 여러분 흥분하지 마시고요.”

의기양양하던 태술은 혼이 나가고 말았다.

혈압 오른 아줌마, 할줌마들은 그 잘난 감사실의 위엄 따위로 넘볼 수 없었다.

당장 감사실장의 전화가 오고 담당 팀장의 전화가 왔다. 심지어는 시장까지 즉석 명령을 내려왔다.

-사과드려.

시장의 엄명이었다.

바야흐로 선거 시즌을 앞두고 있었다. 인구 10만이 넘는 지역의 부녀회장단 심기를 거슬리고 시장에 당선될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들어보니 문제 될 일도 아니었다.

“……!”

돌변한 상황에 태술은 말을 잃었다. 주차장에는 용포읍 직원들의 눈이 수십 개나 쏠려 있었다. 추상처럼 집행 중이던 감사실의 위엄이 땅에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시장의 명령이었다. 감사실장의 명령이었다.

‘으윽.’

사표를 내지 않는 한 굽히지 않을 수 없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뭐야? 그게 사과하는 거야?”

“태도 봐라?”

“젊은 게 왜 이렇게 뻣뻣해?”

부녀회장들은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태술의 허리가 더 내려갔다.

“권태술? 당신 내가 기억할 거야. 앞으로 조심해. 우리 오 주임 잘못 건드리면 우리가 당신 목 따버릴 거라고.”

안선주의 경고는 극한이었다. 자존심이 상한 탓이었다.

그러잖아도 경도의 관상에 빠져 뻑 가버린 안선주였다. 그녀들의 선물로 경도가 곤란에 처했다고 하니 더더욱 열을 받은 것이다.

“예.”

태술이 답했다.

“우리 오 주임에게도 사과해. 어딜 감히 그 잘난 감사실 감투 따위로…….”

안선주의 추가 주문이 나왔다.

“……!”

태술의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시비를 건 건 태술이었다. 기어이 ‘건수’를 올렸다. 그러나 그게 쥐약이었다. 처참한 반전이 되어버린 것이다.

부녀회장단의 기세는 태산처럼 등등했다. 내키지 않지만 별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네가 이런 마음의 선물 한번 받아봤겠냐?”

경도는 우아한 비유로 사과를 수용했다.

‘으윽.’

태술의 자존심은 한 번 더 무너졌다.

“그런 면에서 미안한 건 나지. 오늘 니 관상이 높은 분들에게 깨지는 상이었는데 보자마자 잡아먹으려고 나오니 말을 못 했네.”

“…….”

“그리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 팀장님 일도 지워 버려라. 솔직히 팀장님이 너처럼 은밀하게 받아먹은 거 아니거든? 알잖냐? 맞춤형복지팀에 고급 양주 안겨줄 업자 없다는 거.”

“나처럼이라니?”

경도가 속삭이자 태술이 화들짝 놀랐다.

“엄 팀장님 일 누군가가 제보했다고?”

“…….”

“미안하지만 나도 제보받은 거 있다.”

경도가 화면을 열었다. 이 국장을 만나던 밤에 찍은 동영상이었다. 화면 속에의 진상수와 태술은 정다워 보였다.

“이 사람 환경과 진상수 팀장님이지? 이건 그냥 선물일 테고?”

“……!”

태술이 사색으로 변했다. 그게 찍혔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얼굴이었다.

“선물일 거 아냐? 놀라기는…… 너 나한테 개인감정 있는 모양인데 이 동영상 지우고 싶으면 언제 한번 찾아와라. 그래도 동기니까 시간은 내볼게.”

등을 두드려주고 밀어냈다. 더 이상 속삭일 자비는 없었다.

“회장님들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경도가 사태수습에 나섰다.

“아유, 아니에요. 우리가 미안해요. 그 잘난 선물 준답시고 오 주임님 곤란하게 만들고…….”

태술의 뼈라도 추려낼 듯 펄펄 뛰던 그녀들이 급 공손해졌다.

태술은 직접 당하고도 믿기가 어려웠다. 지역의 인심을 완벽하게 사로잡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젠장.’

식은땀이 물처럼 흘러내렸다.

부녀회장단에 더불어 진상수에게 뇌물을 먹는 동영상.

경도의 흠을 잡기는커녕 그 자신이 아킬레스건을 잡힌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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