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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님의 반전-3 > (57/245)

< 공주님의 반전-3 >

“짜잔.”

체리 커피의 구석진 자리에서 은빛이 통장을 꺼내보였다.

“웬 통장요?”

“관상으로 맞춰봐.”

은빛이 밝은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리했군요? 부부궁 간문의 연인 빛깔이 사라졌어요.”

“또?”

“재복궁 코를 보니 재산이 묵직해요. 돈도 잃었던 걸 좀 회복했고요?”

“아, 씨, 졸 재미없다. 다 맞춰버리네?”

은빛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볼멘소리를 냈다. 그때 진동기가 울렸다.

“잠깐만요.”

경도가 카운터로 가서 커피를 가져왔다.

“계속해야죠? 담판이라도 짓고 온 겁니까?”

“응.”

은빛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늘 찬 바람이 불던 도도표 은빛 공주, 오늘은 애정하는 사람처럼 살갑게만 보였다.

“집에 갔는데 약이 올라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가만 돌아보니 처음에만 친절했지 나중에는 결국 돈이었어. 돈을 주면 잘 해주고 아니면 차갑게 나오고... 그래서 그 인간에게 돈 떡밥을 뿌렸어.”

“돈 떡밥이라고요?”

“돈 준비되었다고 오피스텔로 간다고 했더니 바로 물더라고.”

은빛의 무용담이 시작되었다. 방어막을 걷어내고 나니 싸가지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경도는 열심히 귀를 기우렸다. 실제로도 궁금했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건지.

“내가 최근에 스트레스 받아서 잠 오는 약 받아먹던 게 있어. 그걸 술에 타서 먹였어. 돈 주겠다고 하니 잘 마시네. 그리고는...”

잠들었지.

은빛이 줄인 말이었다. 그 길로 신분조사에 착수했다. 규정에 익숙한 공무원답게 하나하나 털어갔다. 지갑부터 열었다. 명함이 여러 장이었다. 이름은 하나인데 회사 직책은 여럿이었다. 그대로 두고 핸드폰 점검에 들어갔다. 핀은 화면에 묻은 지문흔적으로 유추했다. 불빛에 비추면 흔적이 나온다. 30분을 투자한 끝에 남자의 보안망을 뚫었다.

앗싸.

쾌재가 저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사실 이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은빛은 그래도 매너를 지켜주었다. 그가 먼저 잠들거나 술이 취해도 지갑을 뒤지거나 핸드폰을 체크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 날은 달랐다.

“......!”

사진파일을 열기 무섭게 심장이 내려앉았다.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경도의 관상예언이 거기서 현실이 되고 있었다. 유치원에 다니는 두 딸이었다. 양쪽 팔에 안고 자상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런 사진은 한둘이 아니었다. 당연히 와이프도 나왔다. 오동통한 여자였다.

다음은 전번 체크였다. 여자 이름은 한둘이 아니었다. 통화내역을 보니 하루에 여러 번 연락하는 여자만 여섯이 넘었다. 문자는 더 가관이었다.

-자기 굳모닝? 미소가 그리운 아침이야.

-꿀잠 잤어? 너무 보고 싶다.

-사랑해. 자기가 이 세상이 있어서 너무 좋아.

모든 여자에게 같은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우에엑!

은빛은 정말 오바이트를 하고 말았다. 이 말은 이 인간이 초기에, 혹은 돈을 줘서 기분이 좋은 다음 날 아침에 주로 날리던 멘트들이었다.

이번에는 동영상 파일을 열었다.

“ㅆㅂ놈.”

욕이 저절로 나왔다. 여자들의 영상이었다. 샤워장에서 나오는 나체도 있고 나체로 잠든 것들도 있었다. 이것만 봐도 이 인간은 악의적이었다. 이 인간의 구애는 사랑이 목적이 아니라 돈과 섹스였던 것이다.

당연히 은빛의 것도 있었다. 그것들을 내려받고는 모든 영상과 사진을 지웠다. 대신 다른 것들을 채워주었다. 그 또한 ‘나체 영상’이었다.

뒹뒤디둥디디~

이른 아침, 핸드폰이 울렸다. 남자의 손이 소리를 따라 더듬었다. 핸드폰이 잡혔다.

“여보세요?”

겨우 대답하며 주변을 둘러본다. 남자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오피스텔 침대 위였다.

“굳모닝?”

전화 속에서 은빛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계를 보니 아침 8시를 조금 넘고 있었다.

“뭐야?”

남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 자신은 완전한 나체였다.

“잘 잤냐고?”

“장난해? 언제 갔어? 아우, 머리...”

“그러게 술은 조금만 마셔야지. 애가 둘이나 있는 사람이 과음하면 되겠어?”

“야, 장난하지 말고 지금 어디... 응?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남자가 핸드폰을 고쳐잡았다.

애가 둘이나 있는 사람...

스쳐들었지만 가슴이 뜨끔한 말이었다.

“둘 다 딸이네? 하나는 정은이 또 하나는 상은이... 지금 유치원 가는 길인가 봐?”

전화가 영상통화로 변했다. 저만치 유치원 차량이 보였다. 두 딸이 엄마와 함께 나와 선생님에게 인계되고 있었다.

“야.”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옷 입어. 그 축 쳐진 거 딸들이 보면 어떻겠어?”

“야, 너 지금...”

“노봉철? 이게 본명이야? 이름 죽인다?”

“야!”

“ㅆㅂㄴㅇ, 개소리 말고 잘 들어. 뭐? 앤더슨 리? 미국에서 투자자문회사 운영하는 아버지? 란섬 근무? 미혼에 사업 아이템 구해서 한국에 정착하려고 방한?”

“야야...”

“이 사기꾼 새끼야, 핸드폰 봤더니 화려하더라? 대체 너 지금 만나는 여자가 몇이야? 세 명, 네 명? 니 마누라까지 합치면 캔맥주 한 세트 쯤 되는 거 아니야?”

“야야, 너 지금 뭔가 오해를...”

“오해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5분 줄 테니까 그동안 나한테 가져간 돈 다 게워라. 아니면 저기 니 마누라인지 뭔지한테 그동안 니가 찍은 동영상하고 아침에 새로 저장된 동영상 전송이야. 전번이 010...33 맞지?”

“......!”

“아니지. 니 딸 유치원 차 따라가서 거기도 뿌려줄까? 지금 니 그 꼴 사나운 모습 말이야?”

“......?”

“5분 준다. 아니면 니 폰에 있던 자료들 니 마누라하고 경찰서로 보낼 거야. 전과 화려하실 테니 변호사 미리 선임하시던가.”

톡.

통화가 끊겼다.

“뭐, 뭐야?”

혼이 나간 남자가 핸드폰을 열었다. 동영상을 체크했다. 돈줄이던 동영상들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단 하나의 동영상이 남아있었으니 바로 어젯밤과 아침에 촬영된 것이었다.

“으억!”

남자가 경악을 했다. 화면 속에 뻗은 남자는 자신이었다. 적나라한 나체도 있고 여자 속옷을 머리에 쓰거나 고추 옆에 놓은 것도 있었다. 한 마디로 변태에 가관이었으니 공개되면 매장될 판이었다.

‘대체...?’

머리를 굴려보지만 늦었다. 이건 완전히 수습불능이었다.

“으아, ㅆㅂ.”

나오는 건 욕 뿐이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어보지만 대책은 없었다. 황급히 은빛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이은빛.”

“송금했냐?”

은빛의 대꾸는 냉담했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여자는 이미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다. 여자 후리는 게 일이었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냐?”

남자가 물었다.

“됐고, 송금.”

“야, 너 오해야. 니 사진은 너무 예뻐서 찍은 거고 다른 여자들은 그냥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거 받아놓은 거야. 남자들은 그런 게 좀 있어.”

“닥치고 송금.”

“아, 너 사람 그렇게 못 믿냐? 우리 마누라하고 딸은 이미 별거한 지...”

딸깍!

은빛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야, 이은빛.”

다시 통화버튼을 눌렀다. 남자는 이제 필사적이었다.

“나 지금 니 목소리 듣는 것도 역겹거든. 그러니까 송금이나 해. 그럼 경찰에 제공은 안 할게.”

“아, ㅆㅂ. 알았어, 알았다고.”

“추가로 말하는데 앞으로 내 눈에 띄지마라. 한 번만 띄면 나 이 사진하고 동영상 니네 가족한테 다 풀어버린다.”

“......!”

다시 전화가 끊겼다.

“그래서요?”

은빛의 무용담에 빠져있던 경도가 물었다.

“잠깐 뒤에 전화가 왔더라고 돈은 당장 동원할 수 있는 게 7천만 원 밖에 없다고.”

은빛이 답했다.

“그렇게 끝난 건가요?”

“마지막으로 오 주임이 알려준 천기 좀 누설했지. 고름 흘리고 다니지 말고 성병이나 좀 고치라고.”

“오.”

“거품 물고 쓰러지대? 마음 같아서는 거기를 한 대 걷어차주고 싶었는데...”

“......”

“그런데 실은 겁도 많이 났어.”

“예?”

“그 인간이 질이 나쁘다며? 나도 악에 바쳐서 시작한 일인데 이 인간이 센터에 찾아와서 까발긴다고 하면 어쩌나 했거든. 하지만 증거 영상에 나체 영상을 가진 건 나니까 눈 딱 감고 밀어붙여본 거야.”

“대단하네요. 그렇게 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열 받잖아?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전부 사기 수법이었다니...”

“그럼 이제 정리가 된 거네요.”

“그러려고. 조금 손해이긴 한데 다 받으려다 보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

“지금 내 관상 어때?”

은빛이 얼굴을 내밀었다.  

“어디 보자... 재복궁 준두의 칙칙한 황색은 거의 걷혔고 눈썹과 눈썹 사이의 트러블도 가라앉았네요. 열린 금고에 자물쇠가 턱 채워진 격이니 앞으로는 재산 샐 일 많지 않겠는데요?”

“진짜지?

”“네, 선배님.”

“음... 그럼 고민인데? 그동안 내가 좀 얌체처럼 군 거 같아서 내일 점심 쏠까했는데 금고 잠가야하면...”

“뭐 공덕 쌓는 지출은 상관 없습니다.”

“그렇지?”

“아무튼 축하합니다.”

“그럼 나도 이제 운이 풀리는 거야?”

“액운이 걷혔으니 그렇겠죠?”

“하지만 내 일은 절대 비밀, 알지?”

“당연하죠. 약속합니다.”

“그럼 이거 받아.”

은빛이 봉투를 내밀었다.

“설마 복채?”

“맞아. 조금 넣었어. 너무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은빛 목소리가 은근히 젖는다.

“또 뭐가요?”

“내가 사수인데 맨날 부려먹기만 하고... 내가 생각해도 좀 재수없는 선배였던 거 같아.”

“그거 잊은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나를 도와줬잖아? 진짜 오 주임 아니었으면...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해. 그 인간이 사업 벌이면 사모님 소리 들으며 사표 던질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선배님은 그 복 누릴 자격 있어요. 혼자 힘으로 해냈잖아요?”

“그야 오 주임이 기막힌 상괘를 줬으니까 그렇지. 정답표 들고 시험본 건데 그것도 못하겠어?”

“선배님 강단 정도 되니까 해낸 겁니다. 내 생각에는 예전에 어렵게 살았던 게 도움이 된 거 같아요.”

“그런가?”

“그러니 이 복채는 다른 좋은 일에 쓰세요. 저는 기념으로 이거 한 장만 가질 게요.”

경도가 뽑은 건 5만원 한 장이었다. 안에 든 액수는 아마도 100만원으로 보였다.

“그럼 안 되지. 돈이 적어서 그래?”

“공덕 쌓으라니까요.”

“그럼 코로나 때 자기 마스크 기부했더 할아버지 파스하고 민어나 한 마리 사다줄까?”

“그 할아버지 아직 요양원 안 가셨어요?”

“그 고집 누가 꺾겠어? 딸이 와야 꺾을 텐데 인연 끊고 사는 딸이 올 리 없잖아?”

은빛이 고개를 젓는다. 마스크 할아버지는 80대 초반의 독거 노인이다. 코로나가 기승일 때, 마스크 한 장 사려고 온 동네 사람들이 줄을 설 때 마스크 100여 장을 싸들고 왔었다. 황사용으로 배분한 것과 동네에서 한두 장씩 사모은 것이었다.

“우리 딸에게 보내주세요.”

할아버지가 은빛에게 말했다. 은빛이 담당자였다.

“따님 줄 걸 왜 나한테 맡기세요? 본인이 보내든 말든 알아서 하세요.”

성깔 센 은빛이 그냥 넘어갈 리 없다. 단칼에 거절이었다.

“부탁해요. 얘가 어릴 때부터 기관지가 약해요. 읍 사무소에서는 컴퓨터로 찾을 수 있잖아요?”

“우리가 어떻게 찾아요? 가져가세요.”

“부탁해요.”

“가져가라니까요. 여기 두면 다른 사람들이 집어간다고요. 할아버지.”

은빛이 외쳐보지만 할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멀어져 버렸다. 은빛이 세 번이나 전화를 해도 할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마스크는 결국 수급자들에게 돌아갔다. 며칠 동안 은빛의 책상 옆에 있던 마스크를 본 민원인들이 공무원들이 마스크 빼돌리는 거 아니냐고 난리를 치자 은빛이 풀어버린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 후로 센터에 오지 않았다. 은빛은 그 일을 잊고 있었다. 자기 과실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마스크 또한 다 나눠줬으니 꺼릴 것이 없다는 쪽이었다.

“그런데 민어는 왜요?”

경도가 물었다.

“할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거래. 딸이 독립선언하면서 남긴 말이 나중에 돌아오면 민어사와서 구워준다고 그랬다나 뭐라나... 행여 그 딸이 돌아올까봐 이사도 못 간다지?”

“딸바보였나보네요?”

“그건 모르겠고 아무튼 그래.”

“툴툴거리더니 잘도 기억하시네?”

“마스크 때문에 민원인들이 난리친 거 생각 안 나? 그것만 생각하면... 어유.”

은빛이 몸서리를 쳤다. 코로나의 여파는 아직도 이렇게 남아있었다.

“그럼 내일 같이 출장 나가요. 나도 그 근처 수급자 안부 확인도 해야 하고...”

“고마워.”

“고맙긴요. 2인 1조 원칙인데다 맨날 짜증만 내다가 그렇게 밝은 얼굴하고 있으니... 이거 우리 은빛 선배님 맞나 몰라요?”

“미안해. 관상박사님이 이해하셔.”

“자, 그럼 가실까요? 썬배님.”

경도가 문을 가리켰다.

“잘 마셨어요.”

카운터를 지나던 은빛이 인희에게 인사를 했다. 인희 눈이 휘둥그레진다. 반말 찍찍 뱉던 싸가지 목소리가 아니었다.

도도 공주님의 반전이었다. 정체도 반전, 사건해결도 반전... 

사수 은빛은 이렇게 경도 라인이 되었다. 

스트레스 팍팍 주는 동료나 선배의 피곤함,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게 가셨으니 내일부터는 센터 분위기가 더 밝아질 일이었다.

< 공주님의 반전-3 > 끝

ⓒ 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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