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주님의 반전-2 >
“비밀 지켜줄 거야?”
그녀가 웅얼거렸다.
“맹세하죠.”
“내가 말 안 해도 다 알고 있었지?”
“......”
“오 주임 얼굴 볼 때마다 뜨끔했어. 다른 사람 관상을 그렇게 잘 보는데 내 관상 못 볼리 없잖아?”
“......”
“화장을 더 진하게 한 것도 그것 때문이고...”
“......”
“그 남자... 사업자금이 딸린대서 조금씩 빌려줬는데 벌써 5년 차야. 그렇게 나간 돈이 1억도 넘어. 결혼도 자꾸 미루기만 하고...”
‘1억?’
“처음에는 잘 해주더니 요즘은 개짜증만 내고...”
“......”
“나 부자 아니야. 관상으로 다 알고 있었지?”
“네.”
조용히 답했다. 그녀의 자존심을 뭉갤 생각은 아니었다. 팩트를 인식 시켜야만 그녀의 사연이 나올 일이었다. 그걸 알아야 흙빛 법령이 암시하는 파국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우린 가난하게 살았어. 엄마는 강남의 대형마트에서 캐셔하시고 아빠는 그 마트 방문배달 기사야. 아빠 교장 엄마 교수? 다 구라야. 마침 같은 이름의 교장과 교수가 생각나길래 써먹은 건데 들은 사람들이 소문을 내면서 정설이 되어버렸어.”
“......”
“집은 양재천변 구형 빌라에서 월세 살았어. 엄마가 몸이 안 좋아서 일을 쉬다 말다 하셨거든. 강남 살면서 강북으로 학원 다닌 년은 나 밖에 없을 거야. 강남 학원들은 너무 비싸서...”
“학원이야 아무렴 어때요?”
“다들 그렇게 말하지만 내 기분 아무도 몰라. 애들한테 얼마나 눌려 살았는지... 덕분에 남은 건 깡 밖에 없어.”
“......”
“나 다른 것도 보여?”
은빛이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었다.
“험한 알바한 거요?”
별 수 없이 천기를 누설했다. 그녀의 유흥업소 경력이었다. 23살의 운을 보여주는 이마 모서리의 ‘변성’ 부위였다.
“진짜 귀신이네.”
은빛이 경도의 볼을 잡아 비틀었다.
“그래. 나 잠깐 클럽 나갔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발령 기다릴 때였어. 아빠가 사고를 내는 바람에 집안 형편이 엉망이 되었어. 그때 아는 사람이 솔깃한 제의를 해왔어. 두 달만 일하면 천만 원 안겨주겠다는 거야.”
“......”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 돈 많은 재벌3세나 유학생들 상대로 앉아서 말 상대만 해줬어. 물론 술은 같이 좀 마셨지만...”
“......”
“공무원에서는 무시 받고 싶지 않았거든. 옷도 좀 사야하고 얼굴도 투자가 필요하고... 그러자면 돈이 필요하잖아. 두 달 끝나고 800만원 받았어. 200만원은 소개비라네? 개자식, 그걸 왜 돈 줄 때 얘기하냐고? 욕이 나왔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야? 그러다 얼마 후에 전화가 한 통 들어왔어. 손님으로 왔던 사람인데 나 만나러 몇 번이나 클럽 갔었다고... 집안도 좋고 사람도 좋은 사람 같길래 사귀게 되었는데...”
“......”
“처음에는 선물공세에 외제차도 빌려주고 너무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돈을 빌려가기 시작했어. 부모님은 미국에 살고 있고 자기는 한국에서 사업 아이템 찾고 있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나? 쓸만한 아이템만 찾으면 미국 부모님이 바로 사업자금 꽂아줄 거라면서...”
“......”
“야금야금 빌려준 돈이 1억도 넘어. 공무원이다 보니 은행대출 잘 나오잖아? 나 사실 월급의 절반 가까이 대출금 상환해. 그런데 최근에 또 손을 벌리길래 이제는 어렵다고 부모님 지원 좀 받으라고 했더니 개짜증만 내고...”
“......”
“그럼 예전에 타고 왔다던 BMW가?”
“그 사람이 미국 들어갔다 온다고 며칠 빌려준 거야. 그때 우리 과장님이 가난한 직원 좀 무시하는 경향이 있길래 오기로 끌고 나왔어. 그랬더니 진짜 대우가 달라지더라. 공무원 세상도 별 다른 거 없어. 강남에서 학교 다닐 때처럼 집안 좋으면 우와, 빽 좋으면 우와, 돈 많으면 우와... 심지어는 BMW에도 우와 하더라고. 그거 그렇게 비싼 차종도 아니었는데...”
“......”
“그때 알았어. 아, 여기서도 잘못하면 평생 개무시 당하며 살겠구나. 집안 가난한 거 절대 드러내면 안 되는구나? 그러다 보니 옷이며 가방이며 투자하게 된 거야. 사실 다들 한두 개 말고는 다 짝퉁이고...”
은빛이 가방을 밀쳤다. 무려 300만원을 주고 득템했다던 록키BB, 여자는 가방이 얼굴이라더니 그 또한 짝퉁인 모양이었다.
“이제 속 시원해?”
자작을 하던 그녀가 경도를 바라보았다.
꾸에엡!
목도리도마뱀이 떠올랐다. 자신의 나약함을 숨기기 위해 목도리를 펼치고 질주하는 목도리 도마뱀. 그녀의 위장과 딱 떨어지는 이미지였다.
각이 풀린 눈동자에는 인간미가 들어있었다. 도무지 곁을 주지 않던 이은빛. 그녀에게 이런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그 남자 사진 있어요?”
사진이 필요했다. 은빛의 파국은 연인에게서 오는 것이지만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없어.”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사진이 없다고요? 오래 사귀었다면서요?”
“하지만 그 인간이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해서.”
“카스 같은 데도 없어요?”
“없어.”
“허얼.”
경도의 맥이 풀렸다. 사진에 목 매는 커플은 많이 봤지만 사진이 하나도 없는 연인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결정적으로 사진조차 없다면 경도의 관상은 무용지물이었다. 은빛을 도울 수가 없는 것이다.
모처럼 결심하고 자신을 커밍아웃한 이은빛...
고민하는 사이에 무슨 소리가 들렸다. 경도 핸드폰 벨소리가 아니다.
“그 인간이네.”
번호를 확인한 은빛이 핸드폰을 가방에 처박았다.
“그 분이세요?”
경도가 물었다.
“응, 보나마나 또 돈 빌려달라고 그러는 걸 거야? 낮부터 전화해대고 있거든.”
“그럼 받으세요?”
“이 꼴로?”
“영상 통화 있잖아요? 그거 하면서 화면 캡처하면 내가 관상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 지금...”
“이 주임님 변신의 천재잖아요? 어떻게 좀 해봐요.”
“알았어.”
은빛이 재빨리 티슈를 뽑아들었다.
“큼큼, 캡처만 하면 되는 거지?”
핸드폰을 집어들고 목청을 고른다.
“예, 많을수록 좋아요.”
경도는 그새 옆 테이블로 옮겨가 손나팔을 하고 속삭였다.
“여보세요.”
은빛이 통화를 시작했다.
“술 마시냐?”
남자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회식 끝나고 가려는 길이야.”
은빛은 제대로 둘러댔다. 나름 임기응변은 강하기 때문이었다.
“나 돈 없다니까. 대출도 만땅으로 받은 거 알잖아?”
은빛 입에서 한숨이 나온다.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지나 싶더니 통화가 끝났다.
“에후.”
은빛이 남은 한숨을 밀어낸다. 경도가 앞자리로 돌아오자 화면을 내밀었다. 남자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미식가군요.”
일단 좋은 말부터 시작했다.
“맞아. 입은 고급져서 맛집 엄청 좋아해.”
은빛이 확인해 주었다. 미식형이라는 건 입술 때문이었다. 약점이 있지만 어쨌든 두툼한 편이었다.
“서른 여섯이고요?”
“서른 여섯? 아니야, 서른 셋.”
“서른 여섯 맞습니다. 서른 셋이면 올해 운이 눈썹 끝인데 눈꺼풀 위에 있어요.”
“그럼 나한테 나이 속였던 말이야?”
“이 사람 미혼인가요?”
“그거야 당연하지.”
“아뇨. 이 사람 결혼했습니다. 게다가 딸만 둘이에요.”
“왓?”
은빛이 바로 뒤집어졌다.
“오경도.”
술까지 깨는 모양이었다.
“잠깐만요, 이 사람은 보통 바람기가 아니네요. 코의 기색이 광대뼈를 돌아 부부궁인 간문까지 물들였으니 여자가 적어도 셋입니다.”
“뭐야?”
“병까지 걸렸고요.”
“병? 그런 건 없어? 그 인간이 코로나 유행할 때 확진자를 둘이나 만나고도 멀쩡했거든.”
“그 병이 아니라 성병입니다.”
“......?”
“명궁이 칙칙하고 희멀건한 기세가 콧구멍까지 내려왔어요. 이건 임질 같은 성병을 나타내는 신호입니다.”
“악.”
은빛이 비명을 질렀다. 종업원이 돌아보기에 경도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신호를 주었다.
“그래서 엊그제 만났을 때 바쁘다며 그냥 간 건가? 그럼 혹시 나도?”
“이 주임님은 아직 괜찮은 것 같습니다.”
“어휴, 그건 그렇고 이 인간이 유부남이라고? 딸이 둘이고?”
“그건 틀림없습니다. 집에 가보셨어요?”
“근처에만...”
“BMW 그 사람 차 확실해요?”
“그야.. 그 인간이 끌고 다녔으니까.”
“체크해 보세요. 이 사람 턱이 돌출형이라 거짓말 밥 먹듯이 할 수 있어요. 게다가 입술에 흐린 반점 같은 게 있는 걸 보니 사업 같은 거 성공할 스타일 아닙니다.”
“그럼 백수라는 거야?”
“직업이 있기는 하겠죠. 사기라든가...”
“아니야. 사업 아이템 찾는 동안 대형투자회사 란섬에서 자문역 맡고 있었어. 그 회사 로비 커피점에서 만난 적도 있는데? 직원들과 같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것도 봤고.”
“그 직원들 소개 받았어요? 그리고 그런 로비는 아무나 이용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어머.”
은빛이 경기를 했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자기 직원들이라고 했지만 인사는 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후우, 나쁜 건 다 가지고 있네.”
화면을 확대하던 경도가 한숨을 쉬었다.
“또 뭔데?”
“눈을 좀 보세요. 뱀 눈을 닮았죠?”
“뱀?”
“보세요.”
핸드폰을 뱀 이미지를 찾아낸 경도가 두 그림을 붙여놓았다.
“어머.”
은빛이 소스라쳤다. 뱀의 이미지가 남자의 눈에 있었다.
“이런 눈은 가진 사람은 범죄자일 가능성이 높아요.”
“범죄자?”
“혹시 주민번호 알아요?”
“아니.”
“아니, 대체 아는 게 뭐예요? 둘이 오래 사귀었다면서?”
“그게... 이제 보니 그렇네? 사진도 못 찍게 하고 민쯩도 안 보여주고...”
“참, 그 사람 확진자를 둘이나 만났다면서요? 그럼 방역당국에서 역학조사 했을 거 아니에요?”
“그것도... 자기가 비즈니스 때문에 방역당국 전화 오는 거 피해야 한다고 호텔비 좀 보내달라고만...”
“그럼 BMW 번호는요? 그건 기억해요? 차적조회 해보면 나올 거예요.”
“오 주임...”
“왜요?”
“오 주임 관상이 맞으면 나 사기 당하고 있는 거야? 딸 둘 달린 유부남에게?”
“......”
“전과자일 수도 있는 인간에게?”
"......"
“BMW 번호는 어디 있을 거야. 그때 내가 인스타에 뿌리느라고 사진 좀 찍었거든?”
은빛이 사진을 찾아냈다. 번호판이 제대로 보였다.
“일단 내일 란섬에 전화해서 진짜 근무하는지 알아보고 차적 조회해보세요. 그런 다음 내 말이 맞거든 남자 집 직접 확인하세요.”
“오피스텔은 가봤어.”
“24시간 거기 있어요?”
“아니, 가끔... 사업 아이템 알아본다고 전국을 싸돌아다니거든.”
“거짓말일 겁니다. 분명 본가가 따로 있을 겁니다. 오피스텔은 이 주임님하고 여자들 만날 때 쓰든지, 빌리든지...”
“......”
“빌려준 돈이 얼마라고 그랬죠?”
“1억 남짓...”
“재복궁 보니까 아직은 돈이 곤궁하지 않습니다. 입술이 두툼하니 나름 마음 약한 구석도 있고요. 결정적으로 늘그막에는 버림받지만 지금은 자식에 대한 애정이 강해 딸들에게 나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을 겁니다. 그걸 잘 이용하면 얼마건 돈을 회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짜?”
“술이 깨거든 이마 라인 아래를 잘 살펴보세요. 거기 윤기가 나거나 혹은 입 주변에 윤기가 돌면 불특정 수입이 생긴다는 징조니 담판 벌여볼만 할 겁니다.”
“사기꾼을 상대로?”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세요. 지구대 계 경위하고 친하니까 도와드릴 수 있을 겁니다.”
“후아. 미치겠다.”
은빛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남자가 앞에 없으니 더 할 것도 없었다. 일단은 날이 밝아야했다. 그래야 차량관리사업소에 차적 조회도 하고 직장 확인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날 은빛은 출근하지 않았다.
“오늘 연가 달아달라던데?”
민지가 말했다. 그녀와 연락이 된 모양이었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
경도와 은빛이 커피점으로 가는 걸 보았던 민지였다.
“별 일 없었어요.”
대충 대답해 버렸다. 그러면서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취중에 경솔하게 남자에게 전화해 버린 건가?
-아니면 충격이 너무 컸나?
아무래도 취중에 관상을 봐주는 게 아닌데...
오전은 잡생각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녀가 없으니 차적 조회도 오피스텔 확인도, 직장 확인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후가 되었을 때였다. 임시회기가 끝난 홍 의원이 센터를 찾아왔다. 경도에게 축하를 전하고 저녁식사를 약속했다. 엄 팀장도 함께 지명을 받았으니 그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그가 나간 얼마 후였다.
“어.”
민원인을 맞이하던 우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동문으로 들어선 사람은 은빛이었다. 그러나 은빛이 아니었으니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캐주얼풍 복장으로 등장한 것이다.
“언니.”
민지에게 손 인사를 한 은빛이 경도 앞으로 다가와 멈췄다. 센터 직원들이 한결 같이 놀란다. 그녀, 화장도 없는 쌩얼이었으니 그런 모습은 다들 처음이었다.
그러나 명궁과 인당에서 빛나는 윤기가 화장빨보다 화사했다. 재복궁의 금갑도 묵직해 보인다. 돈이 들어왔다는 얘기였다.
“오 주임, 나 좀 볼래?”
환한 표정의 그녀가 경도를 호명했다.
< 공주님의 반전-2 > 끝
ⓒ 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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