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상 믿고 갑니다-1 >
지병으로 사망.
자주 듣는 말이다.
=지병(持病)
[명사] 오랫동안 잘 낫지 않는 병.
사전의 뜻풀이처럼 주로 나이 든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으니 불치나 난치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이 그랬다.
이유빈의 출장 복명을 마친 후에 또 출장을 달았다. 이제야 비로소 경도가 벼르던 건에 시동을 건 것이다. 미리 전화를 걸어 방문약속을 잡았다. 읍내의 소아과 개원의로 명혜의 주치의이기도 했다.
소아과로 가는 길에 명혜의 집에 들렀다. 두어 달 보지 못했으니 근황파악이 필요했다. 아이의 아버지 안계홍의 낡은 트럭은 보이지 않았다. 행상을 나간 모양이었다.
“저 왔어요.”
안으로 들어서며 돌봄 도우미와 인사를 했다. 그녀와는 몇 번 안면이 있었다.
“명혜 안녕?”
침대에 누운 명혜에게 다가섰다. 변함없이 수액과 반바지로 보이는 기저귀를 달고 있는 아이는 글자 없는 동화책을 보고 있었다. 동화책은 이동도서관에서 방문대출서비스를 해주고 있었다.
“선생님.”
명혜가 반색을 한다. 병마에 시달리지만 붙임성이 있는 아이였다. 이 아이의 소원은 수영이다. 집 앞에서 가까운 냇물 때문이다. 여름이 되면 아이들이 모여든다. 수영복에 색색의 튜브를 타고 물장구를 한다.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라도 부러울 일이었다.
아이 머리맡에 쌓인 건 꿈이 아니라 약봉지들이었다. 눈에 선한 장면이지만 굳이 방문한 건 결의를 다지기 위해서였다.
“짜잔.”
경도가 색종이를 내밀었다.
“와아.”
빼앗듯 받더니 인사와 함께 먹기 시작한다. 아이들에게 인싸템으로 불리는 식용색종이였다. 정보는 도우미가 주었다. 방송을 보더니 먹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경도도 음덕 좀 베푼 셈이었다.
“우리 명혜, 이번 여름에는 수영 좀 해야 할 텐데?”
경도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길고 긴 코로나의 겨울, 기특하게도 잘 버텨준 명혜였다.
“명혜 수영 하고 싶어요.”
대답하는 아이의 혀가 파랗게 보였다. 물을 좋아하니 파란색부터 먹은 것이다.
“그러려면 빨리 나아야지.”
“네. 명혜 낫고 싶어요.”
대답은 야무지다. 이 아이에게는 아직 절망이라는 게 없었다. 절망은 아이 병의 무게를 아는 아빠와 어른들의 몫이었을 뿐.
명혜의 관상은 보지 않았다. 이 일은 경도가 스스로에게 내린 미션이기 때문이었다.
나오는 길에 안계홍을 만났다. 그는 피로에 쩔어 있었다. 얼굴에 기름때가 좔좔 흐르는 것으로 보아 또 차가 퍼졌던 모양이었다. 명혜보다 3배 이상 늙은 그의 포터는 툭하면 도로에서 퍼졌고, 그때마다 수리비 아끼느라 자가 수리를 하는 안계홍이었다.
쓸만한 포터라도 한 대 알아봐줄 수 있다면.
기왕 꿈꾸는 김에 메뉴를 하나 추가했다.
“명혜 수술요?”
소아과에서 만난 원장 눈빛이 가파르게 올라왔다.
“방법이 없을까요?”
“늦었죠. 게다가 선천성이라...”
원장은 고개부터 저었다.
“혹시 미국 같은 곳으로 가면?”
“명혜 같은 환자가 비행기 한 번 타려면 얼마나 비싼 줄 아세요? 생명을 위협 받을 수도 있으니 태워주지도 않을 거고요.”
“완전히 불가능한 겁니까?”
“미국의 병원을 한국으로 옮겨오면 가능할 수도 있죠.”
“그럼 일부 수술은 어떨까요?”
“요로폐색에 소아 수신증... 둘은 다른 병이지만 같은 병이기도 해요. 아무튼 한국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너무 늦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독지가라도 나타났나요?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수술비가 굉장히 많이 나올 텐데?”
“의료수급비로 지원해보고 모자라는 건 사회복지기금, 그래도 모자라면 독지가들에게 부탁해 보겠습니다.”
“수술비는 가능하다?”
원장이 말끝을 흐렸다. 뭔가 방법이 있는 눈치였다.
“방법이 있기는 합니까?”
“그게...”
“말씀해주십시오. 한 번 해보기라도 하고 싶습니다.”
“미국 얘기하니까 생각난 건데... 잠깐만요. 잠깐만 나가계시겠습니까?”
문을 가리킨 원장이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잠시 후에 다시 문이 열렸다. 경도가 앞에 앉자 원장의 고개가 맥없이 기울었다.
“으음, 역시 어렵네요.”
“......?”
“실은 미국 보스턴 어린이병원에서 소아비뇨기과 과장을 맡고 계신 신 선배님이 방한 중이에요. 이분이 SS병원에 최신 수술법 연수지도 차 들어와 있거든요. 해서 SS병원 닥터들 중에서 가능성이 있나 알아봤더니 역시 어렵다는군요.”
“그럼 그 선배님이라는 분은요?”
“신 박사님이라면야 물론 가능하죠. 하지만 SS 병원 닥터가 아니잖습니까? 게다가 곧 미국으로 돌아가실 거고.”
“죄송하지만 그 분이 지금 SS 병원에 계신가요?”
“그렇긴 합니다만.”
“알겠습니다.”
경도는 두 말 없이 일어섰다.
“이봐요. 당신 설마 그 선배님?”
“설마가 현실이 되기를 기도해주세요. 원장님도 명혜가 낫기를 바라셨잖아요.”
“이, 이봐요. 마음은 알겠는데 허튼 짓입니다. 이 선배님은 워낙 바빠서 당신 정도는 만나주지도 않을 겁니다.”
“그러니 더 빨리 가봐야 하지 않겠어요? 원장님 입장 곤란하실 테니 원장님 팔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명혜 진단자료 좀 내주시겠어요.”
경도는 굽히지 않았다. 애당초 누워 떡 먹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전처럼 비겁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부딪쳐 볼 생각이었다. 9급 때는 없었던 두 가지, 공무의 자부심과 공무관상이라는 스펙을 갖췄으니까.
바아앙.
가속판을 밟았다. K시에서 SS병원까지는 1시간 안 쪽이었다. 잘 하면 왕복 2시간이지만 3시간은 걸릴 것 같았다. 원래는 센터에 들어가 출장을 새로 달아야하는데 시간이 없었다. 10-20분 정도 늦은 복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으니 일단 강행했다.
천만 원 이상의 수술비.
약간은 무모했다. 아직 독지가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돈보다 의사가 급했다. 돈을 구할 통로는 몇 군데 있지만 의사는 유일하기 때문이었다.
<선천성 요로협착에 수신증>
병의 기전은 잘 모른다. 경도가 아는 건 명혜가 옆구리로 소변을 본다는 것 뿐이었다. 요도폐색으로 인해 옆구리에 연결한 피부 누공으로 수시로 배출되었다. 덕분에 가슴 밑까지 올라오는 기저귀를 차고 산다. 평생 동안 그래야 할 판이었다.
SS 병원은 컸다. 겨우겨우 소아과 병동을 찾아갔지만 그 의사는 없었다. 묻고 물어 그가 수술실에 있는 것을 알았다. 소아비뇨기환자의 수술을 집도하면서 SS 병원의 소아과 의사들에게 기술전수를 하는 모양이었다.
공무원 신분 덕을 보았다. 공무원이 좋은 게 이런 때였다.
보호자 대기실에 도착했다. 수술실 현황이 나오지만 신 박사의 수술방은 보이지 않았다. 수술실 입구로 가서 수술을 마치고 나오는 의사를 붙잡고 물었다.
“아, 신준표 박사님요?”
“몇 번 수술실인지 나오지를 않아서요.”
“왜 그러시죠?”
“제가 공무원인데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다시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이번에도 먹혔다.
“그 수술은 여기가 아니라 저쪽 중앙수술실입니다. 계단 옆의 큰 문 보이죠?”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그쪽으로 뛰었다. 안에서 나오는 간호사에게 다시 질문을 날렸다.
“끝나면 나오실 거예요.”
간호사가 경도를 지나갔다.
닥치고 기다려.
그렇게 알아듣고 시계를 보았다.
전략을 짜야했다.
<도와주세요, 가엾은 아이가 있습니다.>
신파적이다. 생면부지의 경도를 보고 ‘그럽시다’ 하며 나서줄 것인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살려주십시오.>
무릎을 꿇는다. 그 또한 꼰대법이다. 게다가 무릎은 왜 꿇는단 말인가?
어떻게 하면 신 박사의 도움을 이끌어낼 것인가?
결론은 관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상대가 의사라는 게 문제였다. 의학은 관상과 거리가 너무 멀었다. 행여 관상에 부정적이라면 모욕까지 당할 수 있었다.
고민하는 사이에 중앙수술실 문이 열렸다. 두 간호사가 연 문 사이로 의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족히 20여 명은 될 것 같았다.
“신 박사님 나오시나요?”
선두의 의사에게 물었다.
“곧 나올 겁니다.”
의사의 말도 간호사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의사들 가슴에 임시 명찰이 붙었다. 수술참관을 위해 만든 것 같았다. 하나하나 쏘아보다 마침내 그 이름을 만났다. 부원장에 더불어 소아과장, 두 레지던트와 함께 나오는 신준표였다.
“신준표 박사님.”
용감하게 진로를 막아섰다.
“뭐죠?”
레지던트가 먼저 물었다.
“K시 공무원입니다. 공무가 있습니다.”
일단 공무원증부터 내밀었다. 공무보다 더 먹힐 말은 없었다. 물론, 센스를 발휘해 직급 부분은 살짝 가려주었다.
“공무요? 저한테요?”
신준표가 나섰다. ‘공무’의 위력이다. 일단 관심은 끈 것이다.
절체절명의 기회.
그 단어가 떠올랐다. 그 순간이 지금이었다. 어느새 경도의 안광은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단숨에 얼굴 형태를 파악하고 삼정에 이어 사독, 오악, 육요에 12궁까지 질러가버린 것이다.
“어떤 일입니까? 제가 좀 바쁘거든요?”
신준표가 물었다. 부원장과 소아과장은 눈 인사를 남기고 저만치 멀어졌다.
“코로나 아시죠?”
화두는 코로나 19로 꺼냈다. 전세계를 강타한 신종 바이러스였으니 신 박사도 외면하지 못했다.
“코로나?”
“소아 코로나 말입니다.”
그의 전공에 맞춰 수식어를 넣었다.
“저를 찾아온 거 맞습니까? 저는 바이러스나 전염병 전문가가 아닙니다만.”
신 박사의 대꾸가 나왔다.
좋아.
경도가 탄력을 받았다 일단 말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러니까 제 말은 선천성 요관 폐색으로 인한 소아가 코로나에 감염되면 어떻게 케어를 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5분만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한 편 명혜의 진단서를 꺼내보였다. 선천성 요관 폐색과 신우의 이상으로 인한 수신증 진단이 또렷했으니 그가 외면하지 않았다.
“부탁드립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케이스를 아는 의사가 없습니다.”
신 박사의 프라이드를 살려주면서 몰아친다. 궁하면 통한다더니 경도조차 놀랄 순발력이었다.
이건 극혐 나순애 등을 상대하면서 쌓인 노하우 같았다. 신 박사의 중량이 노순애와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 악다구니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백 배 나았다.
“이런 일이라면 제 이메일을 알려드릴 테니 그곳으로...”
“죄송합니다. 아이 목숨이 달린 일이니 5분만...”
“어헛.”
“부탁합니다. 박사님.”
경도가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그 정성으로 겨우 5분을 허락 받았다.
5분.
하기 싫은 스피치 같은 경우라면 하루보다 긴 시간이지만 눈 깜박하면 지나가는 시간이다. 경도의 머리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관상으로 짚어낸 신준표의 화두는 대략 세 가지였다.
1-양자 입양예정
2-손재주 약점
3-거액지출예정
이 세 가지 상괘가 미션성공을 위한 재산의 전부였다.
돈이냐, 양자입양이냐?
[Money]-굉장히 중요하다. 게다가 거액이었다.
[양자입양]-돈보다 인간이 우선이지.
갈등이다.
과연 어떤 화두를 내밀어야 신 박사를 흔들 수 있을 것인가? 우열을 가리기 어렵지만 오래 생각할 수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관상을 좀 보는 데요, 보답으로 관상을 먼저 좀 봐드리겠습니다.”
“관상요? 그런 건 필요 없고 용건부터...”
“곧 양자 들이실 거죠?”
거절하는 신 박사에게 선제타격을 감행했다. 양자의 단서는 이마 때문이었다. 거기서 흘러내린 찰색이 눈썹 아래까지 넘보고 있었다. 양자를 받아들인다는 신호였다.
“이, 이봐요?”
신 박사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당해하지만 부정하지 못하는 건 미국으로 돌아가는 즉시 입양이 예정된 까닭이었다. 그러나 와이프와 자신만 아는 비밀이다. 그걸 들이대니 황당할 수 밖에 없었다.
“날짜도 짚어드릴까요?”
“날짜?”
“오늘이 15일이니 일주일 정도 남았군요.”
“......!”
신 박사의 미간이 사정없이 경련한다. 관상 조예가 깊다면 찰색으로 15일 간의 운세는 짚어낼 수 있었다. 쌀알의 줄을 세우는 경도였으니 그 정도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박사님 운명이니 어쩔 수 없지만 또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액지출 예정.”
“......!”
신 박사의 눈이 더 구겨진다. 친아들은 아니지만 양자도 아들. 혈연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건 금전이었다.
“옛말에 버는 사람 따로 있고 쓰는 사람 따로 있다했으니 그 또한 박사님의 운명이군요.”
“......?”
거푸 이어진 공습에 신 박사가 하얗게 질렸다.
이 인간 뭐야?
긴장에 땀이 맺힌 신 박사가 경도를 바라보았다. 느닷없이 나타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공무원. 그 눈은 이미 말단공무원의 것이 아니었으니 마주보기가 섬뜩할 정도로 불붙고 있었다.
< 관상 믿고 갑니다-1 > 끝
ⓒ 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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