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첫단추는 제대로 꿸 겁니다-1 >
“수고하셨습니다.”
원룸 앞에서 대리기사에게 인사를 했다. 머리가 약간 알딸딸했다. 이 과장이 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마신 탓이다.
이 과장도 취했다. 근래 들어 처음이라고 했다. 술을 즐겨하지 않지만 술술 들어간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동병상련이었다. 둘 다 개바닥에 처박혔던 신세. 그러다 광명으로 나왔으니 어떻게 마시지 않으리.
이 과장의 인간적인 면도 많이 보았다. 그 역시 9급 신규 때는 실수를 많이 했다고 한다.
행정법은 다소 난해하다. 변화도 심하다. 처음에는 선배들에게 의존했지만 알고 보니 그들 역시 허당이었다. 그때부터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모르는 규정은 법전과 법무팀에 기댄 것이다.
그래도 의문이 풀리지 않으면 중앙의 부처 담당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유권해석을 들었다. 난이도가 높은 규정은 사례를 찾아 메모를 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중앙부처의 엘리트들이 시군구의 신규와 통화를 해줄까 겁도 났다.
“이봐, 우리가 당신 따까리 하는 부처야?”
호통이라도 나오면 어쩌나?
완전한 기우였다. 그들이 지방직이라고 무시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개중에는 지방의 실무 직원들의 의견을 역으로 물어오기도 했다. 중앙부터의 공무원이라고 해서 모두 관련규정에 해박한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기본자세를 갖추니 어떤 상황에도 대처가 가능했다. 그게 실무에 투영되자 선배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민원과의 쟁점을 명쾌하게 파악하고 있으니 나중에는 팀장과 과장들조차 그를 찾기 바빴다.
그때부터 관운이 열렸다. 인사철이 되면 그는 최고의 스타였다. 그를 빼가기 위해 국장들이 피를 튀겼고, 한 번 데려가면 맥시멈 기한까지 내주지 않으려고 했다.
이 과장은 행정의 달인 선정횟수만 해도 세 차례나 되었다. 남들은 생애 한 번도 선정되기 어려운 행정의 달인이었다. 이 과장의 행정실력이 얼마나 혁신적이고 효율적인지 알 수 있었다.
영웅담도 좋았지만 시행착오의 경험담도 좋았다. 알고 보니 이 분도 신규 때 결정적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경도처럼, 출생신고 때 남과 여를 바꿔버린 것이다.
3일 동안 몸살을 앓고 나온 날이었다. 약이 너무 세서 몽롱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무원의 실수는 어떤 이유로도 용납되지 않으니 그때 마음 고생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식은땀이 난다고 했다.
이 과장과 마신 건 술이 아니라 공감이었다. 그렇기에 그때는 멀쩡했던 술이 때 늦게 올라오고 있었다.
발길을 마트로 돌렸다. 꼭 사고 싶은 게 있었다. 신선식품과 해물 코너로 가서 원하는 걸 득템했다.
땡.
엘리베이터가 8층에서 멈췄다.
그런데...
“어.”
경도가 걸음을 멈췄다. 원룸 복도에 아는 얼굴들이 서있는 것이다.
“아오, 그냥 가려고 했더니 오네?”
경도 품에 꽃다발이 안겨졌다. 동기 마지웅과 조유란이었다.
“마지웅? 유란 누나?”
경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승진 축하해.”
“그것 때문에 찾아온 거야?”
경도가 물었다.
“우리만 먼저 승진해서 미안했었거든. 그거 갚으러 왔어.”
조유란이 방긋 웃었다. 말 수가 많지 않아 크게 부각되지 않던 조유란. 마지웅과 같은 국에 있다 보니 의기투합한 모양이었다.
“그럼 전화 때리지?”
“잔무정리 끝내고 방금 왔거든. 집에 없길래 어쩔까 싶을 때 네가 온 거야.”
“그래?”
“야, 꽃다발 받았으면 다음 액션이 있어야 할 거 아냐? 꽃만 줍줍하고 아몰랑 버전이냐?”
마지웅이 괜한 핀잔을 주었다.
“어? 알았어. 내 방은 난장판이라 곤란하고, 잠깐만 기다려.”
문을 열고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이 과장이 준 행운의 열쇠도 그 위에 놓았다. 마트에서 산 것은 냉장고 안에 고이 모셔두었다. 이건 내일 아침 기원용 아이템이었다.
**
“대기만성 오경도를 위하여.”
마지웅이 호프잔을 들었다. 조유란도 기꺼이 가세했다. 전작이 있지만 술은 여전히 달았다. 동기 단톡방에서도 쫓겨난 신세건만 완전히 왕따인 건 아닌 모양이었다.
“기왕 판 벌린 거 동기들 좀 소집해볼까?”
마지웅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괜히 무리하지 마. 막차로 8급 단 게 무슨 자랑이라고...”
“하긴 태술이가 소집하면 몰라도 내가 하면 호응 안 할지도 모르지.”
“......”
“태술이 아직도 너한테 까칠하냐?”
“까칠은 뭐, 만날 일도 없는데...”
“그런데 왜 제자리 발령이야? 이번 기회에 용포읍 떴어야 하는 건데...”
조유란이 턱을 괴며 물었다.
“아직 문제아 딱지가 안 떨어진 모양이죠.”
“열 받네, 누군 실수 안 하나? 실수 하니까 신규고 9급이지.”
“괜찮아요. 용포읍도 나름 재미있거든요.”
“재미 같은 소리... 게다가 너네 팀장님 보통 빌런이야? 인간미 없다고 악명이 자자한데...”
“이제 많이 좋아지셨어요.”
“아무튼 경도가 승진하니까 너무 좋다. 오늘 한 번 죽어보자.”
“그럼 같이 죽어야지.”
유란이 잔을 들 때 어깨 너머에서 기척이 들렸다. 추병승을 위시해 다섯 명이나 몰려온 것이다. 마지웅이 기어이 카톡을 때린 모양이었다.
동기들 중에서 말없는 신뢰를 받고 있는 마지웅. 덕분에 술판이 커졌다. 불참자는 셋이었으니 공교롭게도 7급을 달고 있는 초고속 승진자 권태술과 염정아에 최고령 정락현이었다.
“아오, 7급은 빼고 8급끼리 죽자.”
조유란이 잔을 들었다. 이제 보니 입술이 두툼하다. 이런 사람은 속마음이 충직하다. 경도에게 마음을 나눠주는 원동력은 그녀의 입술이었다. 하지만 명궁에 근심이 보인다. 청색과 흰색, 보라색이 함께 아른거린다. 몸에 병이 들어온 것 같았다.
‘술 취하기 전에...’
경도의 관상 파워에 불이 들어왔다. 동기들은 재산이다. 그러나 그 속을 알 수 없다. 이들 중에도 권태술이나 염정아처럼 뒤통수를 쳐댈 성향이 있을 수 있었다. 전이라면 몰라도 관상 스펙을 장착한 지금은 뒤통수를 허용할 생각 없으니 간단한 체크에 들어갔다.
우선 나도규.
일자 눈썹의 상이다. 더 볼 것도 없다. 이런 상은 평탄한 삶을 살아간다. 어떻게 보면 하급 공무원에 잘 어울리는 상일 수도 있었다.
추병승도 유사하다. 더 보지 않고 프리패스권을 안겨주었다.
“......!”
민현아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평상시에는 잘 모르겠지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면 검은자위가 내려온다. 똥고집에다 아부하는 스타일이다. 같이 일하기엔 불편한 편에 속한다. 게다가 귀 아래의 턱뼈가 돌출형이다. 치과학적으로는 턱이 잘 빠진다고 하지만 욕구가 강한 상이다.
머리털 언저리가 단정하지 못하니 상사와 의견이 맞지 않는다. 상사들이 피곤해 할 상이다. 하지만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장 챙겨서 하니 당근을 내세우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경도의 상괘는 이경섭에게서 끝났다. 코가 위로 향하고 콧구멍이 엿보인다. 턱까지 뾰족하고 모가 났으니 뒤끝 있는 관상. 요주의인물로 마음에 새겼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2차까지 달린 후에 모두를 보냈다.
[애정하는 유란 누나, 내가 관상 좀 배웠는데 얼굴에 병색이 들었어. 병원 한 번 가보세요. 틀리면 병원비 전액부담함.]
조유란에게 카톡 애교 좀 떨었다. 첫 승진의 밤은 이렇게 깊어갔다.
~i miss the taste...
이른 아침 전화벨이 울렸다. 경도의 벨소리는 마룬5의 맵스였다.
“아들.”
아침을 깨우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머니였다.
“엄마.”
“승진했다며?”
다짜고짜 직구를 날리신다.
“응, 어제 전화했는데 안 받길래.”
“어제 밤에 형이 전화했더라. 그래서 기다렸는데 안 오데?”
“미안해. 회식하느라고.”
“회식해야지. 우리 아들이 승진했는데.”
“이제 겨우 8급인데 뭐.”
“급이 문제냐? 요즘 세상에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공무원인데. 니 덕에 엄마 목에 힘주고 산다.”
“8급은 별 거 아니야.”
“차차 올라가면 되지. 7-6-5-4-3...”
어머니는 멀리도 질러갔다.
“3급은 무리지.”
“그런 게 어디 있어? 우리 아들인데.”
“일찍 일어났네?”
“너도 늙어봐라. 다섯 시만 되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별 일 없지?”
어머니와의 대화는 늘 이렇다. 마음 속에는 할 말이 많은데 자꾸 단문이 나온다.
“아들이 이렇게 좋은 소식 전해주는데 무슨 별 일? 엄마는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알았어. 시간 봐서 한 번 내려갈게.”
“벌써 끊게?”
“더 할 말 있어?”
“아침은?”
“먹어야지.”
“설마 우유 한 잔은 아니겠지?”
“오늘 8급 다는 날이라 특별히 알탕 재료 준비했어. 엄마가 그랬잖아? 복 받으려면 알탕이 좋다고.”
경도가 알탕을 강조했다.
아픈 추억이 있었다. 9급으로 발령나던 날이었다. 그 전날 어머니가 올라와 알탕을 준비해주고 갔다. 원래는 아침에 끓여주고 간다는 걸 억지로 밀어버린 경도였다. 결론만 말하자면 먹지 못했다. 새로 산 셔츠와 넥타이가 잘 매칭이 되지 않아 시간을 허비하다 홀랑 태워버렸다. 탄 냄새만 잔뜩 먹었다.
악재가 겹칠 때마다 어머니의 알탕이 떠올랐다.
-그걸 제대로 먹었어야하는 건데.
그래서 지난 밤 취중에도 부득 준비를 한 것이다.
“진짜지?”
“그럼, 신용카드 영수증 보내줘?”
“됐어. 엄마가 우리 아들 못 믿으면 누가 믿어?”
“알았으면 끊어. 나 알탕 끓여야하거든?”
“된장 반 숟가락 잊지마. 청양고추는 반만 잘게 다져넣고.”
“예, 잔소리 셰프님.”
공대를 하고 통화를 마쳤다.
냉장고를 열고 재료를 꺼냈다. 알은 생태알이다. 동태알하고는 급이 다르다. 백미 즉석밥을 오븐에 넣고 해물탕을 준비했다. 육수도 사왔으니 준비는 완벽했다.
먼저 다시마 한 장에 사각썰기로 자른 무를 넣었다. 된장도 살짝 풀어 넣는다. 어머니의 비법이다. 이렇게 하면 잡내도 가시고 맛이 깊어진다.
보글보글.
작은 뚝배기가 터지도록 끓어오른다. 마무리로 쑥갓을 올리면 끝이다.
음...
냄새 죽인다.
어쩐지 8급의 시작은 탱글탱글 알 찰 것만 같았다. 즉석밥을 그릇에 옮겨 담고 김에 더해 김치를 꺼내놓았다. 이만하면 경도의 아침 식사로는 수라상급이었다.
앞에는 싸목도감과 관상책들이 고이 쌓여있다. 이 과장, 아니 오늘부터 국장이 되는 그 분의 황금열쇠도 그 위에 있었다.
황 할아버지의 관상선물과 행정달인이 준 행운의 열쇠 선물. 그 앞에서 먹는 알탕은 느낌부터 달랐다. 미슐랭 별 세 개 레스토랑도 부럽지 않았다.
“아유, 이거 먹으면 생태를 몇 마리나 먹는 거야?”
어머니가 자주 하던 말까지 귀에 아른거린다.
‘좋다.’
해장까지 해결 되니 든든했다. 넥타이를 조여 매고 길을 나섰다.
“가지.”
수화기를 놓은 엄 팀장이 일어섰다. 읍장실의 연락이었다. 임명장을 받으라는 것이다.
“오경도?”
거기서 육세창 과장을 처음 보았다. 먼저 와있던 그가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경도가 인사를 했다.
“부탁은 내가 해야지. 난 용포읍 신참이니까.”
육 과장이 웃었다.
“오경도, 지방행정서기에 임함, 용포읍 행정총괄과 근무를 명함.”
읍장 손의 발령장이 경도 손으로 전해졌다.
짝짝!
행정팀장과 생활과장, 엄 팀장과 육 과장을 비롯해 몇몇 배석자들이 박수를 쳐주었다. 임명장은 경도 혼자 받았다. 육 과장은 사무관이니 시청에서 따로 받고 온 까닭이었다.
길고도 험난했던 9급 신규 생활. 이제 안녕이었다. 이제부터 경도도 정식 8급이었다.
‘8급.’
가만히 발음해 보았다.
어리바리하던 9급보다는 어감부터 ‘완전’ 안정적이었다.
< 이번 첫단추는 제대로 꿸 겁니다-1 > 끝
ⓒ 초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