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진운이 트이기 시작했어요-5 >
“뭐야?”
그 순간 민원실장의 목소리가 튀었다. 그도 전화를 받고 있었다.
“우리 이 과장님이 자치행정국장?”
그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진짜야? 그게 진짜냐고? 헐.”
민원실장은 시선은 전화기에 꽂혀 떨어지지 않았다.
“엄 팀장님, 소식 들었어요?”
민원실장이 엄 팀장을 바라보았다.
“......”
엄 팀장은 말이 없다. 조금 전에 가출한 정신줄이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그 틈으로 경도의 말이 떠올랐다.
유력한 과장들 사진을 들이댔을 때...
-과장님이나 잘 보필하시면...
그리고 조금 전...
-과장님 표정 환해지셨지 않아요?
상괘였다.
그걸 몰랐던 것이다. 경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력한 과장들 사진을 내밀어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렇기에 넌지시 이 과장을 지목했던 것이다.
‘관상...’
미치겠군.
엄 팀장은 다시 한 번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팀장님, 인사발령이 전격적으로 떴는데요?”
화면을 체크하던 현 주임이 소리쳤다.
“어디요?”
민지와 은빛이 화면으로 달려왔다.
<자치행정국장 이창교>
이 과장의 이름은 맨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시장의 승부수였다. 오남일에게 구속영장이 떨어지자 조직의 동요를 막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이창교의 중용은 뜻밖이었지만 시장으로서는 다른 묘책이 없었다.
자칫하다가 인심이 떠나면 3선은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그렇기에 오남일과 정경주 사건의 최대 피해자인 이창교를 구제하는 것으로 반전을 노린 것이다.
뜻밖인 것은 이창교의 경우만이 아니었다.
<용포읍 행정과장 육세창>
후임으로 올 사람이었다. 이창교가 공원기획과로 가기 전에 데리고 있던 팀장으로 탄탄한 행정실무능을 가진 인물. 그러나 묵묵히 일만 하는 스타일이라 매번 사무관 승진에서 밀리던 인물이었다.
‘이창교 사단?’
엄 팀장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이창교의 입김이라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온몸에 전율이 스쳐갔다. 현재는 엄 팀장이 이창교의 최측근(?)이었다. 바꿔 말해 이 과장을 잘 보필했다면 저 자리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과장을 닭 본 듯 대했던 엄 팀장이었다.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인사팀장 한기호>
그 다음으로 중용된 사람은 자치행정과의 주무 주임. 시장과 가까우니 예상되던 인물이었다. 위로 몇 자리가 채워지니 하위직 인사도 일부 있었다. 원래는 6급 이상과 이하가 시차를 보이지만 소폭이다 보니 동시에 발령을 낸 것이다.
“악.”
눈으로 훑어가던 민지가 비명을 질렀다.
“우리 오 주임, 오 주임이 승진이야.”
그녀가 화면을 가리키며 경련을 했다.
<행정서기 오경도>
8급 승진자 명단에 오경도가 있었다.
“그럼 시청 입성이야?”
은빛이 고개를 디밀었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용포읍 제자리 발령이었다.
“팀장님, 오 주임이...”
은빛이 돌아보지만 엄 팀장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소원했지만 마무리라도 해야 했다. 이 과장이 자치행정국장으로 중용된 바가 아닌가?
“......!”
간부실 문을 연 엄 팀장은 거기서 더 나가지 못했다. 이 과장 앞에는 이미 10여 명이 몰려와 있었다. 각 팀장들과 7급들이었다.
-빠르네.
등골이 시려왔다.
“축하합니다.”
“축하드립니다, 국장님.”
이 과장은 그들에 둘러싸여 인사를 받느라 바빴다. 경도는 거기 있었다. 놀랍게도 이 과장 바로 옆이었다.
“어, 엄 팀장님.”
겨우 숨을 돌린 이 과장이 엄 팀장을 발견했다. 엄 팀장은 비실비실 다가가 겨우 인사를 챙겼다.
“축하드립니다.”
“덕분이에요.”
이 과장의 응대는 의례적이었다. 엄 팀장의 억장은 또 한 번 무너져 내렸다. 그 모두의 시선 앞에서 이 과장의 치하는 경도에게 향했다.
“고맙네.”
양 어깨를 잡고 뜨거운 신뢰를 보내는 것이다. 팀장들의 눈이 뒤집혔다. 이제 K시의 직업공무원 최고봉에 오른 이 과장이었다. 그의 신뢰가 실린 사람이라면 누구도 함부로 볼 수 없다. 그게 바로 경도였다.
“여러분도 모두 고맙습니다.”
팀장들에 대한 답례는 경도 다음이었다.
“이 국장님.”
읍장이 들어왔다.
“축하하네.”
“고맙습니다. 읍장님.”
“이것 참... 역시 저력이 있으시군. 앞으로 우리 읍 좀 잘 부탁해.”
“예.”
“자자, 우리 모두 이 국장님에게 뜨거운 박수.”
엄 팀장이 나서서 눈길을 끌어본다. 이 과장은 그래도 쫄보는 아니었다. 그 노력이 눈물겨우니 어깨를 두드려 답례를 했다.
“아, 사실 축하 받아야할 건 저 뿐만이 아닙니다. 여기 우리 오 주임도 서기보 떼었습니다.”
하객을 진정 시킨 이 과장이 경도를 토닥거렸다.
“다들 저보고 불운이라고 하는데 진짜 불운에 시달린 건 우리 오 주임이었을 겁니다. 무능한 과장이라 행정능력을 개발 시켜주기는커녕 신경도 쓰지 못했으니까요.”
“과장님...”
“이번에 제가 뜻하지 않게 운이 트여 자치행정국으로 데려갈까 싶었는데 본인이 고사를 합니다. 여기서 제대로 한 번 일해보고 싶다면서 말입니다.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다들 알짜부서만 찾아다니려고 운동 하는 판에...”
“......”
팀장들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그나마 8급다는 거라도 보고 가게 되어 짐을 덜지만 최근의 활약을 보면 그걸로 턱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부족한 제가 챙겨주지 못했던 것들을 여러 분께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과장이 팀장들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쿠궁.
팀장들의 가슴에 경종이 울렸다. 이것은 분명 부탁이자 경고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핵심 국장으로 중용되어 가는 마당에 9급, 아니 8급 따위를 챙길 리 없었다.
“......!”
엄 팀장은 반쯤 넋을 놓았다. 이제야 보였다. 이 과장의 이마에서 빛나는 광채. 화투의 팔광보다도 더 빛나는 저 광채...
‘아아, 이 놈의 눈...’
파내고 싶었다. 지척에 구세주를 놔두고 먼 시청만 바라보았던 눈알...
<엄 팀장이 엄 팀장 했네.>
딱 그 꼴이었다.
그날, 이 과장은 꽃다발과 축하전화로 즐거운 몸살을 앓았다.
경도도 나름 선방했다. 소식을 들은 김재웅 이장단 회장이 꽃다발을 전해오고 안선주 부녀회장은 꽃다발 배달에 전화까지 해온 것이다.
“언제 시간 좀 내세요. 제가 부녀회장단 끌고 가서 한 번 쏠 게요.”
“고맙습니다.”
통화가 끝나자 인희가 달고나 라떼를 선물해 왔다. 그새 거기까지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축하해요. 서기님.”
인희가 가지런한 배꼽인사를 한다. 이제는 공무원 직급까지 줄줄이 꿰고 있는 인희였다. 한 모금 마시니 머리가 띵할 정도로 달았다. 으음, 에너지 풀충전... 굳...
동기 중에서는 조유란과 마지웅이 카톡 인사를 전해왔다. 소폭 인사라 명단이 눈에 띄었던 모양이었다. 확인하는 사이에 잘 나가는 권태술의 문자도 도착했다.
<운빨 좋네. 기사회생 하는구나. 8급에서는 정신 차려라.>
축하가 아니라 태클이었다. 이모티콘으로 대충 답해주었다. 빚을 갚아줄 시간은 아직도 30여 년이나 남아있었다. 공직 경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
지방행정서기보 오경도.
지방행정서기에 임함.
용포읍 근무를 명함.
난생 처음 맛본 승진...
인사발령 파일을 보고 보고 또 보았다.
개꿀맛이었다.
이 과장과 함께 올라가니 더욱 그랬다. 첫 발령 때 신적인 존재로 보였던 이창교. 나락에서 만났지만 그 인연은 이렇게 각별해졌다.
[형, 나 승진했어.]
발령파일을 찍어 보냈다. 형에게 득달 같은 전화가 들어왔다.
“통화 되냐?”
“그럼.”
“짜식, 서기보 떼니까 목소리에 힘 팍 들어가는데?”
“당연하지.”
하마터면 울 뻔했다. 동기들이 승진할 때마다 삼켰던 비애와 불운의 시간이 떠오른 것이다. 권태술과 염정아 등이 7급으로 고속승진하면서 한 턱 내던 날은 테이블의 구석에서 얼마나 비참했던가?
서기보에서 서기.
6급 이상이 볼 때는 별 것도 아니다. 하지만 경도에게는 달랐다. 이 8급은 남들처럼 때가 되어 올라간 게 아니라 자력으로 따낸 승진이었다. 통화하면서 생각했다. 다시는 그런 비애를 맛보지 않을 거라고. 공수겸장이라는 말처럼 능력과 승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거라고.
“좋아. 그 기백으로 7급, 6급 가는 거다?”
“오케이.”
“엄마한테는 알렸냐?”
“전화하려고 하는데 형이 새치기한 거야.”
“으아, 우리 엄마 당분간 밥 안 먹어도 배 부르시겠다. 사실 말은 안 했지만 가끔 너 승진 언제하냐고 물어보셨거든.”
“ㅋㅋ 원래 대기는 만성이거든.”
“내 동생인데 어련하겠냐? 저녁 같이 먹을까?”
“내가 봐서 연락할게.”
“알았다. 다시 한 번 축하한다.”
형의 전화가 끊겼다. 그길로 주차장으로 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패했다. 밭에 나가셨을까? 시골 사는 분들은 핸드폰을 잘 챙기지 않으니 별 수 없었다.
‘저녁에 해야겠네.’
화면을 닫을 때 문자 하나가 들어왔다. 이 과장이었다.
[저녁에 시간 좀 되겠나?]
문자가 반짝거린다. 대답은?
당연히 예스였다.
**
저녁 시간 이 과장을 따로 만났다. 이 과장의 승진 이임과 새 과장의 환영회는 같은 날 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약속장소에 경도가 먼저 도착했다. 이 과장은 30여 분 정도 늦었다. 덕분에 형과의 약속은 자동 연기가 되었다.
“미안하네. 여기저기서 축하전화가 많이 오는 바람에...”
“바쁘시면 다음에 뵈어도 되는 데요.”
“은인에게 그럴 수 있나?”
“은인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여기였지? 오 주임이 살괘의 상괘를 내준 곳이?”
“예.”
“그때보다 지금이 더 황당하네.”
“예?”
“그때는 솔직히 이 친구가 뭘 어쩌려고 그러나 하는 마음이었지만 지금은 그걸 실현시켜놓지 않았나? 아직도 잘 믿기지가 않네. 자네의 관상실력...”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마운 걸 날세. 난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거든. 오남일의 그런 감정에 대해서도...”
“과장님 잘못이 아닙니다. 그분의 관상이 그랬으니 과장님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살괘를 던졌을 겁니다.”
“그건 좀 위로가 되는군.”
“이제 먹구름이 걷혔으니 퇴직 때까지는 큰 대과 없이 가실 겁니다.”
“새로운 상괘인가?”
“예.”
“그럼 복채를 줘야지. 지난번에도 못 줬으니...”
이 과장이 꺼내놓은 건 행운의 열쇠였다. 열 돈 쯤 되어보였다.
“과장님...”
“받게. 집사람에게 말했더니 이걸 추천하더군.”
“복채는 행정으로 알려주시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주는 걸세.”
“예?”
“행정은 민원인의 마음을 열어보는 거라네. 일선 행정의 궁극은 주민만족과 편익증진이니까.”
“과장님.”
“받게.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해.”
“......”
“그렇지 않으면 공직생활 노하우 전수는 없네.”
이 과장이 협박(?)까지 하니 하는 수 없이 열쇠를 챙겼다.
“좋아. 그런데 사실 자네에게 전수해줄 행정 노하우는 없네. 자네가 이미 몸으로 익혔더군.”
“제가요?”
“첫째는 업무개선이었으니 나순애 씨 사례가 그렇네. 불합리한 것을 고치려는 의지의 실행이었지 않은가? 외부업무든 내부업무든 그런 자세를 가지면 되는 것일세. 둘째는 업무효율과 협조를 이끌어내는 재량인데 그건 문화누리카드 실적 건이 대표적일세. 팀원과 관련 단체의 협조를 이끌어내면서 효율성을 제고 시키지 않았나?”
“과장님 그건...”
“행정의 달인이라는 거 별 거 아니네. 그런 마인드를 발전 시켜 나가면 돼. 그러니 자네는 이제 업무숙련도만 갖추면 기본 세팅이 끝나는 거야.”
“......”
“업무숙련은 관련 규정의 숙지와 해석능력이지. 이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네. 규정을 모르면 민원인에게 피해가 돌아가고 자칫 잘못되면 소송도 당하게 되니까. 우리 공조직은 외부 소송에 대해 특히 질색하는 거 알지?”
“과장님.”
“가르치기 귀찮아서 칭찬으로 때우는 거 아닐세. 시련 속에서 자네는 스스로 길을 찾았고 그게 자네에게 살이 된 거야. 자네는 이미 바른 공무원이 될 수 있는 기초체력을 다진 걸세.”
“제가요? 아직도 민원인이 문제를 제기하면 어쩔 줄을 모르는데...”
“그건 단점이 아니라 장점일세.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있는 사람은 채워나가기 마련이니까.”
“......”
“추가할 게 주체의식이네. 많은 공무원들은 자신을 정부의 피고용인으로 생각하는데 국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공무원 하나하나가 바로 ‘작은 정부’라네. 이 개념에서 소홀한 공무원은 철밥통 월급쟁이로 끝나는 거고.”
이 과장의 말은 귀에 쏙쏙 꽂혀왔다. 마치 싸목싸목 할아버지의 관상 전수 같았다.
“명심하겠습니다.”
경도는 이 과장의 말을 기꺼이 접수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게. 나도 빚은 갚아야하니까.”
“알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잔 할까? 지방행정서기 오 주임?”
이 과장이 정식으로 경도의 직급을 불러주었다.
“감사합니다.”
인사와 함께 술을 마셨다. 술이 아니라 꿀이었다.
< 승진운이 트이기 시작했어요-5 > 끝
ⓒ 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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