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진운이 트이기 시작했어요-4 >
“오 주임.”
기척을 느낀 이 과장이 고개를 들었다. 윤기가 눈부신 표정이었다.
“저 약속 지켰습니다.”
“약속?”
“과장님의 명예회복 말입니다.”
“그럼 오남일 국장 구속 건이?”
이 과장이 촉을 세웠다.
“......”
경도는 구구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과장은 알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경도의 양팔을 으스러지도록 강하게 잡았다.
“관상이었나?”
“아뇨.”
경도가 고개를 저었다.
“제 마음이었습니다. 과장님께 인정 받고 싶었던 불운한 9급의...”
“인정...”
“......”
“그건 내가 할 말이네.”
이 과장의 목소리가 출렁거렸다.
“예?”
“이제 한 물간 똥차... 자네만이 인정해주었던 거야.”
“과장님.”
“조금 전에 인사과장 전화 받았네. 잠깐 들어오라고 하더군. 좋은 소식 있을 거라고.”
“축하드립니다.”
“시로 돌아가면 있는 힘을 다해 자네부터 구제하겠네.”
“아, 아닙니다. 과장님.”
경도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라고? 자네도 여기가 좌천이지 않았네.”
“알고 있습니다. 시의 모든 과장, 팀장님들에게 기피인물이라 밀려왔던 거. 과장님도 마찬가지였고요.”
“그건 면목이 없네.”
“그동안 패배의식에 더불어 자괴감이 깊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제 슬슬 재미를 붙이고 있습니다.”
“오 주임.”
“건방지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제 작은 힘으로도 읍 센터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읍은 시의 골칫덩이 아닙니까? 그 이미지를 좀 없애고 싶습니다.”
“장족의 발전이군. 신들린 관상처럼 민원행정의 정도를 깨쳤어.”
“제가 그래도 과장님 부하 아닙니까?”
“그래서? 여기에 남겠다고?”
“예, 민원실을 시작으로 긍정의 메시지를 퍼트린 후에 시청 각 부서의 업무를 배우고 싶습니다. 가능하면 다시 과장님 밑에서요.”
“내가 시청으로 컴백하는 것도 관상에 나왔나?”
“그냥 컴백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냥이 아니라고?”
“이마 전체와 인당에 따뜻한 햇살이 그득합니다. 아마 승진하시고 중용되실 겁니다.”
“오 주임.”
“그때는 많은 분들의 축하를 받으실 테니 저는 미리 축하를 드립니다.”
경도가 고개를 숙였다. 이 과장이 그 어깨를 당겨 가만히 안았다.
“고맙네.”
“과장님...”
“20여 년 공직 생활 중에 만난 부하직원 중에서 최고로 부끄럽네. 내 좌절감을 핑계로 자네의 능력을 알아주지 못했어.”
“저는 아직 행정서기보입니다. 능력이라는 말은 당치 않습니다.”
“떡잎이라는 게 있거든. 관상실력을 떠나 마음씀씀이만으로도 자네는 최고의 직원이었네.”
“고맙습니다.”
이 과장과의 감회는 더 이상 나누지 못했다. 하천 환경미화 지원을 나갔던 팀장들이 돌아온 것이다.
“오 주임. 나 좀 보세.”
민원실로 돌아오자 엄 팀장이 그 손을 잡아끌었다.
상담실로 들어선 엄 팀장은 문부터 잠갔다.
“팀장님.”
“쉬잇.”
“또 왜요?”
“나 좀 도와주시게.”
엄 팀장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관상을 보지 않아도 그의 속을 알 것 같았다. 시청의 상황이 궁금한 것이다.
“오 국장 구속된 건 알지?”
“......”
“자네는 아직 9급이라 잘 모르겠지만 국장자리가 공석이 되면 연쇄이동이 불가피하다네. 일단 나 좀 봐주시게? 이번에 시청으로 갈 수 있겠나?”
“말씀 드렸잖습니까? 당분간 이동운 없다고...”
“아, 공덕 쌓으면 관상이 변한다며?”
“공덕 조금 밖에 안 쌓으셨잖아요?”
“무슨 소리야? 이장단 부녀회장단 박카스에 직원들 커피에...”
“원래 진짜 공덕은 음덕입니다. 생색내지 않고 남들 모르게 베풀어야 빛나는...”
“그럼 우리 마누라는? 내가 마누라 덕에 산다며?”
“아직은 아닙니다.”
경도가 일어섰다.
“사람, 왜 이래? 내 얘기 아직 안 끝났어.”
“저 수급자 상담 있거든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잠깐만 앉아 봐.”
엄 팀장은 똥줄이 탄다. 이번에는 사진 몇 장을 꺼내놓았다. 시청 과장들 사진이었다.
“하마평에 오르는 인물들이야. 좀 봐줘. 이 중 누가 국장승진운인지?”
경도가 보니 이 과장 사진은 없었다.
“딱하시네요.”
“뭐가?”
“헛다리 짚으셨어요. 이 분들은 승진운 없습니다. 차라리 이 과장님이나 잘 보필하시면...”
“우리 이 과장님은 이미 끝난 거 몰라? 다시 좀 봐봐. 감사과장, 인사과장, 도시계획과장, 자치행정과장... 새 국장은 이 중에서 나오게 되어 있어.”
“아무튼 아닙니다.”
사진을 밀어놓고 상담실을 나왔다.
“오 주임.”
이번에는 현 주임이 다가왔다.
“국장 자리 말이야, 누가 될 거 같아? 그 귀신 같다는 관상으로 한 번 예측 좀 해봐.”
그가 내민 건 과장단 얼굴 사진이 박힌 조직도였다. 묻는 표정도 건성이다. 그야말로 재미삼아 던지는 것이다.
“죄송하지만 관상 아무데서나 보는 거 아니거든요.”
심심풀이 땅콩은 절대사절.
조직도를 밀어내고 세올에 로그인을 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
모두가 그랬다.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린다. 그들의 하마평에 인사과장과 자치행정과장 등이 오르내렸다. 그렇기에 이 과장이 내려와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들 눈에는 여전히 끈 떨어진 과장일 뿐인 것이다.
“시청에 좀 가네.”
이 과장이 경도 앞으로 다가왔다.
“다녀오십시오.”
경도가 꾸벅 화답을 했다. 그 정중함은 이미 국장급 예우에 속했다.
“시청에 줄 대러 가시나?”
“그래봤자 못 돌아갈 걸? 워낙에 찍힌 몸이라...”
직원들의 시선은 냉소적이다. 엄 팀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눈앞의 인물을 두고 먼 데서 답을 찾는 것이다.
내일이나 모레...
인사가 발표되면 다들 어떤 표정이 될까? 혼자 즐거운 상상을 하며 공문작성에 돌입했다.
토닥다닥.
자판이 기가 막히게 먹혔다.
유후.
“어떻게 됐어?”
문화누리카드 실적보고 마감일이 되자 민지가 물었다.
“결과는 신경 안 씁니다. 최선을 다했거든요. 현 주임님, 배 주임님, 그리고 이 주임님, 우리 우석 씨까지 고맙습니다.”
경도의 인사는 엄 팀장에게로 이어졌다.“팀장님도요.”
“몇 %야?”
조직표를 보고 있던 엄 팀장이 건성으로 물었다. 며칠 새 엄 팀장은 조직표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자신의 라인을 동원해 열심히 체크도 했다. 경도가 상괘를 주었건만 그래도 미련을 놓지 못하는 엄 팀장이었다.
“얼마 쯤 될 것 같으세요?”
“한 70%?”
“인심 좀 더 쓰세요.”
“80%?”
“94.6%입니다.”
“그래?”
엄 팀장이 고개를 빼들었다. 순간 경도 책상의 행정전화가 울렸다.
“감사합니다. 용포읍 맞춤형복지팀...”
“오 주임.”
복명을 하기도 전에 저쪽 말이 들려왔다. 희망복지과 주무 주임이었다.
“이야, 이거 믿어야 돼, 말아야 돼?”
“뭐가 말입니까?”
시치미 뚝 떼고 응수를 했다.
“이번 실적 말이야. 꼴찌에서 2등으로 수직 상승이야.”
“그래요?”
“하지만 실질적 1등이나 다름없어. 1등은 대상자가 52명에 불과한 강변면이거든.”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우리 과장님이 상 챙겨주실 눈치야.”
“그래요?”
“국무총리상이 하나 내려와 있는데 그건 좀 힘들 거 같고 도지사상 아니면 시장상 중에서 택일 될 거 같아.”
“예.”
경도가 답했다. 공무원의 상은 여러 가지가 있다. 소속기관장의 상을 시작으로 도지사, 장관, 총리, 그리고 대통령상... 당연히 대통령상의 훈격이 가장 높다. 훈격이 높으면 타기가 어렵다. 복마전의 용포읍으로서는 도지사상이나 시장상도 감지덕지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이렇게만 하라고. 오 주임이 선방한 덕분에 우리 시 지표도 도에서 꼴찌는 면할 것 같아.”주무 주임의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희망복지과?”
민지가 관심을 보였다.
“예.”
“뭐래?”
“2등이라네요.”
“2등, 와아.”
민지 표정이 확 밝아졌다.
“으엇, 그럼 내 재택, 일직 대타는 물 건너 갔네?”
현 주임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알았으면 약속이나 지키세요.”
경도가 우석을 가리켰다.
“야, 우석아, 너 오늘부터 내 대출 해방이다. 우리 관상천재님이 너 건드리면 그냥 안 둔단다.”
현 주임이 소리쳤다.
“고맙습니다.”
우석의 인사는 경도 쪽이었다.
“야, 넌 내가 해방 시켜주는데 인사는 왜 오 주임한테 하냐?”
“오 주임님이 아니면 안 될 일이었으니까요.”
우석이 얼굴을 붉혔다.
“짜식이...”
현 주임이 우석의 머리를 마구 문질러댄다. 미안함의 표시였다.
“자자, 그동안 저를 많이들 도와주신 데 대한 보답으로 우리 엄 팀장님이 커피 쏘신답니다.”
“내, 내가 왜?”
경도의 선언에 엄 팀장이 정색을 했다.
“이거 다 팀장님 실적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한 턱 쏘셔야죠.”
“그렇게 따지면 과장님이 쏴야지.”
“그렇게 따지면 읍장님이 되는 데요? 읍장님께 그렇게 말씀드려요.”
“됐어. 쏘면 될 거 아냐? 요즘 커피값이 밥값보다 비싼데...”
엄 팀장이 투덜거리며 지갑을 열었다.
“웃는 얼굴로 베푸셔야 음덕이 되는데...”
“알았어, 알았다고.”
엄 팀장이 억지 웃음을 웃는다. 쌀쌀맞고 인정이 없어 보이지만 전처럼 개싸가지는 아니다. 츤데레 느낌도 조금은 나는 것 같았다.
“인희야.”
체리커피점에 들어섰다.
“옵빠.”
뭔가를 스케치하던 인희가 황급히 종이를 치운다.
“웹툰 원화?”
경도가 고개를 빼드니 더 깊이 감춘다.
“손님이 없길래 공모전 연습하느라고...”
“그런데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지냐? 우리 센터 조직표는 또 뭐고?”
경도 시선이 카운터 옆의 종이로 향했다.
“이, 이거 별 거 아니에요. 커피?”
“뭐야? 설마 나 짝사랑하는 건 아닐 테고.”
“그건 절대 아니거든요. 빨리 주문이나 하세요.”
추출기 앞의 인희가 볼멘소리를 냈다.
“아메리카노 여섯 잔, 한 잔은 투샷으로.”
“팀장님 카드네요?”
“응.”
“웬일이래? 짠돌이 구두쇠가 요즘 자주 쏘시네?”
“앞으로 계속 자주 쏘실 거다. 그러니까 오시면 잘 좀 해드려.”
“정이 가야 잘 해주죠. 맨날 댁댁거리기만 하시고. 인간미 제로 빵.”
“그래도 전보다 좀 나아진 거 같지 않냐?”
“음... 그렇기는? 그것도 옵빠가 한 거예요?”
“응?”
“직원분들이 그러시던 데요? 요즘 센터에서 옵빠가 제일 핫하다고.”
“너도 곧 핫해질 거야. 커피 땡큐.”
컵 캐리어를 양손에 들고 커피점을 나섰다.
“이햐, 팀장님이 쏘는 커피는 이상하게 맛있단 말이지?”
“팀장님 종종 좀 부탁해요.”
커피를 받아든 현 주임과 은빛이 일회용 아부(?)를 떤다.
“거, 이럴 때만 팀장님 찾지 말고 뒤에서 씹지나 말라고.”
엄 팀장이 빨대를 꽂을 때였다. 시청에 들어갔던 이 과장이 돌아왔다. 그의 이마는 이제 완연한 햇살이다. 경도 앞으로 다가오니 주변이 다 밝아지는 것 같았다.
“시간 괜찮으면 잠깐 올라오게.”
한 마디를 남기고 2층으로 향한다.
“헐, 관상 봐달랄 기세네. 보아하니 시청 컴백 꿈꾸는 모양인데 꿈도 야무지지...”
엄 팀장은 어림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표정이 환해지셨지 않아요?”
경도가 다시 암시를 줬다.
“환해지기는, 맨날 우거지상인데.”
“잘 보세요. 엄청 환해지셨거든요.”
한 번 더 힌트를 주고 2층으로 향했다.
“무슨 뜻이야?”
엄 팀장이 뒷북을 칠 때였다. 그 책상의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용포읍 엄낙기입니다.”
“나야.”
전화의 주인공은 자치행정과에 근무하는 권 팀장이었다.
“그림 좀 나왔어?”
은밀하게 속삭이던 엄 팀장, 상대의 말이 이어지자 그대로 석고상이 되어버렸다.
“누구? 우리 과장님?”
하얗게 질린 엄 팀장은 결국 수화기를 놓치고 말았다.
-이창교 과장이 자치행정국장으로 중용되었대. 조금 전에 시장님 결재 떨어졌다는구만.
권팀장이 급보로 전해온 정보였다.
< 승진운이 트이기 시작했어요-4 > 끝
ⓒ 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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