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이제 찌질 말단이 아니거든요-5 >
“어떻게 된 거야?”
노순애가 나가자 엄 팀장과 팀원들이 몰려들었다.
“오 주임.”
민원실장도 다가왔다. 경도 보기를 껌딱지 보듯 하던 그였다. 그 태도에 금이 간 건 화장실 몰카 건이었다. 그때 남은 선입견은 이날 깔끔하게 사라졌다. 이건 인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대박 쾌거였다.
“우석 씨, 아까 뭐 찍더니 그거 좀 보여드려.”
경도가 우석을 불렀다. 우석이 현장 동영상을 재생 시켰다.
<박관철 씨?>
역사의 현장은 경도의 호명으로 시작했다. 화면 속 경도의 표정은 카리스마의 화신이었다. 냉혹하면서도 절제된 표정으로 노순애를 압도하고 있었다. 동시에 노순애에게 당한 것들을 그녀의 방식으로 돌려주고 있었다.
“크아아아.”
“푸어어.”
동영상을 확인한 직원들이 혀를 내둘렀다. 동영상 속의 경도는 그들이 알던 소극적이고 주눅든 모습의 9급이 아니었다.
“노순애가 임자 제대로 만났구만. 이거 내가 알던 오경도 맞아?”
민원실장의 눈에는 경외감마저 깃들었다.
“뭐니뭐니해도 이 과장님 직원들은 다르다니까. 명장 밑에 약졸 없다잖아요?”
“아유, 우리 엄 팀장님 맨날 죽는 소리하더니 이제 보니 직원 복 터졌네. 문제아가 아니라 일당 백이네, 일당 백.”
언제 내려왔는지 행정팀장과 안전팀장도 입을 모아 중얼거렸다.
“험험.”
엄 팀장 목에 힘이 들어갔다.
“다 보여드렸으면 그만 삭제하자.”
경도가 우석에게 말했다.
“삭제라니? 왜?”
민원실장이 나섰다.
“사생활은 보호해 드려야죠. 이게 만약 인터넷상에 공개되면 오히려 우리가 당할 수 있잖아요.”
“......!”
경도의 판단은 정확했다. 이제 완전한 반전을 이룬 노순애 사건. 그러나 동영상이 공개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노순애에게 빌미를 주게 되는 것이다.
“삭제해.”
모두가 아쉽다는 표정이지만 경도는 단호했다. 우석이 [삭제]를 눌렀다. 자인서가 있으니 다른 증거 따위는 필요없었다.
“기분이다. 오늘 저녁 우리 팀 회식이다.”
엄 팀장이 공개선언을 했다.
“그 저녁은 내가 사야 할 것 같은데?”
엄 팀장 말에 끼어든 사람은 이 과장이었다. 읍장도 그 옆에 있었다.
“과장님.”
엄 팀장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수고했어. 오 주임.”
과장이 경도 손을 잡았다.
“아까는 경황이 없었는데... 대단하네. 읍장님도 속이 다 시원하시다더군.”
“감사합니다.”
“아무튼 저녁은 내가 사요. 배 주임이 예약 좀 해주고... 아, 읍장님에 희망복지과장과 팀장도 참석하기로 하셨으니 그렇게 알고.”
“희망복지에서도요?”
은빛이 물었다.
“방금 전화가 왔어요. 노순애 씨 사과전화 받고 놀란 모양이더군. 믿을 수가 없어서 확인 전화했다는 거야.”
“그럴만 하죠.”
현 주임이 웃었다.
“자, 그럼 저녁에 봅시다.”
이 과장이 마무리를 선언했다.
“오 주임.”
노순애에게 치를 떨던 여직원들이 커피를 쐈다. 일부 팀장들도 피자와 스폰지 케이크, 음료수 등을 선물로 가져왔다. 선물이 많아 경도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
[뻥튀기대첩]
노순애 사건에 붙은 타이틀이었다. 작명은 은빛이 했다. 나름 센스 있는 타이틀이었다. 다시 출장을 나온 경도의 차는 시청 앞 도로에 멈췄다.
딸깍.
여행사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여직원이 경도를 맞았다. 분위기는 썰렁하다. 여행업은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았다. 해외건 국내건 다르지 않았다. 코로나 19가 종식되어 가면서 조금씩 기지개를 켜고 있지만 완전회복까지는 2-3년이 걸릴 판이었다.
“어떻게 오셨죠?”
여직원이 물었다.
“용포읍 직원인데요. 대표님 좀 뵈러 왔습니다.”
“잠깐만요.”
여직원이 일어나 대표실로 들어갔다. 그 사이에 벽에 걸린 상품들을 바라보았다. 주력은 해외여행이다. 기타 국내 여행들 역시 제주와 홍도, 울릉도 등이었다. 잠시 후에 나온 여직원이 대표실 문을 가리켰다.
“어르신들 온천관광이라...”
경도의 제의를 받아든 박 사장, 다리를 꼰 채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안 될까요?”
“차 과장님 전화는 받았는데... 아시다시피 여행업이 고사 직전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이제 겨우 숨통이 트이는 판이라 큰 건 잡아야지 이런데 한 눈 팔 시간이 없어요.”
퇴짜가 나왔다.
“그건 알겠지만 지역을 위해 편의를 좀...”
“게다가 노인들이에요. 사회복지업무 하신다니 아시겠지만 노인들 관리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막말로 노인들 데리고 관광 갔다가 누구 하나 쓰러지기라도 하면 덤터기 제대로 쓰게 됩니다.”
“......”
“예전이라면 몰라도 이런 거 세팅해줄 여행사는 없을 겁니다. 차라리 다른 아이템 알아보시는 게...”
대표는 완곡했다. 이해했다. 민간기업의 첫째 목적은 이윤이다. 어르신들 당일치기 온천여행은 큰 돈도 안 되고 손도 많이 간다. 그러니 뺀찌를 놓는 것이다.
짐작하고 온 경도였다. 얼씨구나 받아들일 일이었다면 무엇하러 찾아왔을까? 센터 책상에 앉아 폼나게 견적이나 내달라고 하면 될 일이었다.
“아쉽군요. 대표님은 새 부모님 일로 운이 막혀서 자선봉사 좀 하시면 운이 트일 것 같은데...”
슬쩍 상괘 하나를 던지고 일어섰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대표의 반응이 걸어나오는 경도의 뒤통수를 때렸다.
“어머니 말입니다. 새로 오신...”
“당신!”
흥분한 대표가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뭐라고 내지르지는 못했다. 순간적으로 차 과장이 헛소리를 지껄인 줄 알았다. 하지만 어머니 일은 차 과장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디서 들었어?”
대표 목소리가 거칠게 변했다.
“들은 게 아니라 본 겁니다.”
“봤다고?”
“대표님 관상요. 이마의 일월각이 기울고 두 눈썹의 형태가 완연히 다르지 않습니까? 계부모를 모실 상입니다.”
“......?”
“이삼 년 되었군요. 그렇잖아도 여덟 팔자가 거꾸로 달린 듯한 눈썹이라 하는 일마다 쉽게 풀리지 않는데 새어머니까지 속을 뒤집으니 사업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그래서 덕 좀 쌓으시라는 의미로 찾아온 거였는데...”
새어머니로 인한 스트레스는 대표의 이마 월각에서 알았다. 사색이 보이지만 일반적인 경우와 차이가 났으니 친어머니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당신, 관상가요?”
“조금 배웠습니다만.”
“미치겠군. 핀셋처럼 집어내니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고...”
“그리고 성공하시려면 여직원부터 바꾸시기 바랍니다. 저 직원은 눈이 짧고 단추처럼 동그라니 뭐하나 끝까지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
“그럼...”
추가 맛배기를 끝으로 돌아섰다.
“잠깐만요.”
대표가 일어서며 경도 걸음을 막았다.
“앉으세요. 이제 보니 관상 제대로 보시는군요.”
대표가 소파를 가리켰다. 못 이기는 다시 앉았다.
“귀신이군요. 새어머니 일은 차 과장님도 모르는 건데... 기왕 맞추셨으니 말인데 이 나이에 새어머니가 속 썩이는 거 맞습니다. 우리 미스 백이 끈기 없는 것도 맞고요.”
“......”
“그럼 혹시 우리 새어머니 극성에 처방 같은 건 없겠습니까?”
“그 분 사진 같은 게 있나요?”
“잠깐만요... 얼마 전에 이 분 생신이라 같이 찍은 게 있는데...”
대표가 화면을 열었다.
“다혈질이시군요?”
사진을 보기 무섭게 상괘가 나갔다.
“이야, 진짜 족집게시네. 처음에 아버지 소개로 만날 때는 내숭을 떠셔서 전혀 몰랐었는데 남자 서너 몫은 하시더군요.”
“눈썹이 눈에 가까우니 다혈질에 활동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누르려고 하지 마시고 작은 가게를 차려주시든지 아니면 대표님 국내 여행지 가이드 같은 걸로 모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외부 활동을 하게 되면 스트레스가 가시면서 오히려 대표님에게 득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저런, 새어머니도 그 말을 하시더니...”
“......”
“좋습니다. 아까 뭐라고 했죠? 두당 7만원에 온천에 점심식사, 공연까지 가능한 상품 없냐고요?”
“예.”
“제가 세팅해 드리겠습니다.”
대표의 수락이 나왔다.
“정말입니까?”
“그래요. 안 그래도 일이 꼬일 때마다 세상 너무 빡빡하게 살았나 싶었는데 오 주임님 얘기 들으니 피부에 와닿는군요. 대신 간이공연은 A급 가수는 안 되고 B급이나 C급 중에서 어르신들 비위 좀 맞출만한 트로트로 두 명 정도 섭외해보죠. 그러니 주임님은 참석자를 최대한 모아주십시오. 200명 이하면 추진 불가능합니다.”
“가수들은 조정이 가능한가요?”
“미리 의견주시면 맞춰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모아볼 테니 추진 부탁드립니다.”
절반의 성공이다. 일단 기대심을 가지고 여행사를 나섰다.
“그게 OK가 떨어졌다고?”
저녁 시간, 회식자리의 현 주임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르신들 단체 온천여행 안이 성사되었다니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실 이 안은 경도가 난생 처음 생각한 게 아니었다. 이전의 다른 담당자들도 생각은 있었다. 그러나 여행사에 전화로 타진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쪽에서 No하면 네 하고 포기했던 것.
“그럼 참가자만 모으면 되는구만?”
엄 팀장도 반색을 했다.
“이장님들 부녀회장님들에게 당부 전화 드렸습니다. 200명은 문제도 없고 500명 이상도 기대해보라고 하시더군요.”
“과장님, 우리 오 주임이 진짜 사고칠 거 같은 데요?”
엄 팀장이 이 과장을 바라보았다. 이 과장은 김상국 읍장, 희망복지과장 등과 함께 안 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치고도 남지. 노순애 버릇 고친 거 보면.”
읍장이 거들고 나섰다.
“그거 진짜 어떻게 된 거야? 우리는 지금도 어안이 벙벙해. 그 개진상이 사과전화를 다 하다니... 처음에는 또 무슨 꿍꿍이인가 하고 굉장히 불안했다고.”
희망복지과장의 표정도 아주 밝았다.
”대기만성이라더니 우리 오 주임이 이제 꽃이 피는구만.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만 하라고.“
희망복지과장의 격려가 길게 이어졌다.
모두가 원하니 뻥튀기 대첩을 또 한 번 리바이벌해야만 했다. 그때마다 ‘오’ ‘역시’ ‘키햐’ 하는 감탄사가 줄을 이었다.
“오 주임.”
회식이 끝나고 돌아갈 때였다. 읍장과 희망복지과장을 배웅하고 난 직후, 이 과장이 경도를 불렀다.
“꼰대라도 괜찮으면 차나 한 잔할까?”
이 과장의 독대 콜이었다. 읍으로 전입 온 이후로 처음이었다.
“예, 과장님.”
기꺼이 콜을 받는 경도였다.
이 과장이 간 곳은 한방차 전문점이었다. 들어서기 무섭게 한약냄새가 코를 쏘며 들어왔다. 경도에게는 옛날 냄새로 치부되는 이질적인 향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나 없는 며칠 사이에 오 주임이 관상도사가 되었다니 말이야, 커피보다는 한방차가 더 어울릴 것 같아서... 괜찮나?”
“그럼요. 좋습니다.”
“나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지? 처음에 자네 안 받으려했던 것도 알 테고.”
“괜찮습니다. 과장님만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요, 뭐.”
“늙어가는 과정이야. 갱년기라 생각하고 이해해 주게.”
과장 표정은 쓸쓸하다. 좌절에 대한 상처는 오래간다. 경도 역시 비슷했으니 이해가 되었다.
“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과장님.”
“정말인가?”
“예.”
“자네가 나보다 백 배는 낫군. 쫄보 과장을 다 이해해주다니...”
이 과장이 웃었다. 그러다 차가 절반 정도 줄어들었을 때였다. 경도가 기다리던 한 마디가 이 과장의 입에서 나왔다.
“오 주임 관상실력이 우리 시에서 유명한 천 거사나 호박신녀보다 낫다니, 그래... 내 관상은 어떤가? 자네 앞길 막을 상은 아닌가?”
“과장님...”
“한 번 봐주겠나?”
이 과장이 고개를 들었다.
과장의 위엄으로 공짜 관상이나 봐달라고 윽박지르는 건 아니었다. 상괘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언제고 이런 기회가 오기를 바랐던 경도. 그러나 이제 관록까지 생겼으니 덥석 물지는 않았다.
“죄송하지만 과장님 상괘는 아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죄송합니다.”
“그럼 언제 말해주려나?”
“과장님께서 전적으로 저를 믿을 때, 그때에만 가능한 상괘가 나와 있습니다.”
“그럼 말해보게. 자네를 믿지 않으면 따로 자리를 갖지도 않았을 테니까.”
“어떤 상괘가 나오든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사람...”
“약속부터 해주십시오. 어떤 상괘가 나오든 끝까지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지.”
“......”
“괜찮대도.”
“과장님의 관상에는...”
잠시 숨을 고른 경도가 남은 말을 몰아쳤다.
“말씀드리기 거북하지만 살괘(殺卦)가 들었습니다.”
< 제가 이제 찌질 말단이 아니거든요-5 > 끝
ⓒ 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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