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이제 찌질 말단이 아니거든요-2 >
<감정노동자법이 시행됨에 따라 욕설 모욕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본 통화내용은 녹음됩니다.>
ARS에 전화를 걸면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내용이다. 나순애가 뜨면 그 멘트가 부러웠다.
<민원창구 공무원 보호법에 따라 생떼, 욕설, 모욕, 삿대질, 훈계 등은 삼가시고 따뜻한 마음으로 응대해주시기 바랍니다.>
경도가 읊조리던 문구였다.
읍면동의 민원인은 다양다종했다. 절대 다수는 매너가 좋다. 그러나 모든 분야가 그렇듯 모두 좋은 건 아니었다.
민원실 공무원도 감정노동자다. 경도 생각은 그랬다. 특히 사회복지 쪽이 그랬다. 담당자들은 대개 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을 만난다. 한 마디로 예측불허다. 어떤 사람은 작은 도움조차 은혜라 생각하니 더 도와주지 못해 마음이 아팠고, 또 어떤 사람은 수혜준 것을 도로 빼앗고 싶을 정도로 교활했다.
사회복지 공무원은 힘이 없다. 위에서 정한 규정 내에서 현장복지에 임할 뿐이다. 이 기준은 ON OFF 스위치와도 같다. 담당자의 재량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예컨대 긴급복지라 하면 그 기준이 <재산 11800만원 이하에 금융재산 500만원 이하>이다. 여기서 한 푼이라도 오버하면 안 된다. 금융재산이 505만원인 사람에게 긴급복지 예산을 내주면 감사에 걸린다.
시 감사로 끝나면 좋겠지만 도 감사, 감사원 감사 등도 두 눈이 시퍼렇다. 징계라도 먹으면 진급이 날아간다. 징계 하나는 장관급 표창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비중이 컸다.
많은 공무원들의 낙은 ‘오직’ 진급이다. 9급으로 임용되면 기고 날아야 사무관이 된다. 사실 다른 직업의 기준으로 보면 고작 사무관이다. 사무관 된다고 팔자 고치는 것도 아니다.
그거 한 번 달아보려고 목을 맨다. 게다가 재량이란, 100만원 봐주면 200만원도 봐줘야하고 500, 1000만원까지 넘어간다. 몇 번 반복되면 관행이나 비리가 될 수 있다. 규정이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공무원도 인간이다. 업무가 바뀌면 규정에 익숙하지 못해 실수할 때가 있다. 빌어먹게도 공무원은, 인사이동에 있어 개인의 역량이나 전문성을 ‘전혀’ 고려받지 못한다. 발령장 한 장 내주면 닥치고 맡아야했다. 모든 업무는 ‘행정’이라는 시각으로 ‘퉁’ 쳐버리는 까닭이었다.
이걸 해결한다고 직렬을 쪼개놓았지만 그 또한 오십보백보였다. 사회복지 안에서도 업무는 여럿으로 나뉘고 관련법은 이틀이 멀다하고 바뀐다. 행여 업무가 바뀌면 몇 달은 식은땀 흘려가며 새 업무에 적응하는 수 밖에 없었다.
요령은 여기서 빛을 발한다. 그러나 요령은 경험이라는 진국에서 우러나는 법. 짠밥 자체가 부족한 9급에게 무슨 요령을 바랄까? 그러다 보니 전임자의 업무를 답습하게 되는데, 문제는 전임자가 대충 처리한 업무들이 후임자에게 독박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인수 받을 때 제대로 받았어야지?”
감사의 시각은 그쪽이었다.
ㅆㅂ이다. 뭘 알아야 제대로 받지?
노순애가 그랬으니 이 또한 경도 불운의 하나였다.
공무원들은 민원제기라면 몸서리를 친다. 기업도 그렇지만 공조직 역시 국민과의 마찰을 원하지 않는다. 때문에 민원인과 마찰이 생기면 무조건 깨지는 게 공무원이었고 그게 윗선들의 불문 방침이었다.
<니 선에서 막아.>
이것이 정답이다.
고위직들은 고난도의 행정 스킬을 발휘해 부서를 지휘 통솔하라는 사명을 받았지만 대다수는 고급진 품위유지와 대우를 원할 뿐이었다.
경도의 경험에 따르면 진상 민원은 보통 다섯 손가락 법칙에 따른다.
첫째 읍소형
-닥치고 애걸복걸이다. 심지어 눈물에 통곡까지 해대니 초보나 마음 약한 공무원들이 어물쩡 잘 당한다.
둘째 빠꼼이형.
-이들은 관련 법규와 판례 등을 빠삭하게 꿰고 있다. 웬만한 경력자도 썰전에서 당해내기 어려우니 초짜가 걸리면 개박살이다.
셋째 과시형.
-이 그룹의 특징은, 내가 왕년에 누구였는데, 내 지인 중 누가 고위직인데 하는 식으로 자신의 신분이나 고위층을 들이댄다. 상전 대우를 해주지 않으면 으름장에 더불어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니 난감하다.
넷째 깽판형.
-다짜고짜 기물을 흔들거나 위협하고 팽개친다. 가장 단순하지만 심약한 사람이라면 병원에 실려갈 수도 있다.
다섯째 뒤통수형.
-일명 투명인간형으로 업무 당시에는 아무런 내색도 없이 돌아가지만 일을 크게 벌이는 사람들이다. 공무원 제도도 잘 알고 있어 민원을 넣어도 제대로 넣는다. 빈 틈이 없는 사람이 많아 한 번 걸리면 골머리를 앓게 된다.
공무원의 대응 매뉴얼은 어떨까?
없다.
...라고 보는 게 맞다.
민원은 오직 담당자의 역량으로 해결해야 한다.
대다수의 악성 민원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단순한 불친절이나 응대 실수는 보통 사과 수준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더러 좋은 상사를 만나면 민원인 설득을 도와주지만 민원 제기자들의 목적은 불변이다.
“알았으니까 내가 원하는 거 해줘.”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상사는 그쯤에서 손을 뗀다.
다섯 유형 중에서 그나마 소박한 민원은 읍소형이다. 잠깐은 놀라지만 깽판형도 견딜만하다.
노순애는 어디에 속할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이 다섯 가지 유형의 비빔형이다. 그래서 여섯 번째 유형까지 탄생시켰으니 바로 ‘넌덜머리 풀세트형’이었다.
비극의 시작은 전임자의 유산이었다. K시로 이사 온 그녀, 남편이 행방불명 되어 살 길이 막연하다며 긴급복지를 신청했다가 뺀찌를 먹었다. 금융재산이 500만원을 넘었다.
전임자의 실수였으니 보험금을 금융자산에 포함 시켜버린 것이다. 일단 돌아간 그녀가 다시 컴백을 했다. 발소리부터 예사치 않았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한 끝에 선정기준을 알아낸 것이다.
“공무원이 개판이네. 담당자가 그것도 몰라서 다리 아픈 사람 두 번이나 오게 해?”
그녀의 진상질에 황금카펫이 깔리는 순간이었다.
“이 분 특별히 조심해라.”
전임자가 경도에게 인계한 단 하나의 유산(?)이었다.
‘친절하게 대하면 되겠지.’
순진한 9급은 규정보다 사람이었다.
그러나 친절은 ‘민원인’에게 하는 것이지 개진상에게 먹히는 말이 아니었다.
“왜 못 줘?”
센터로 전입 온 지 얼마나 됐을까?
악마재림.
노순애의 첫인상이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악인의 음산함에 S급 싸가지가 반짝거렸다.
엉뚱한 시비 정도는 눈 감고도 붙여댔다.
“나이도 어린 게 어디서 민원에게 눈깔을 아래로 위로 흘기는 거야?”
言語道斷-언어도단.
공무원 시험에 나왔던 한문이 머리를 치고 갔다. 정말이지 할 말이 없었다.
“이거 보면 몰라? 가스비 3개월치 밀렸다는 예고장이잖아? 그런데 긴급구제가 왜 안 돼? 규정 보라고, 규정.”
노순애가 가스비청구서와 예고장을 휘둘렀다.
“노순애 님.”
“노순애가 니 친구야? 전임자는 두 말없이 주던데 너는 왜 안 되는데?”
노순애 완전히 일방통행이었다.
노순애가 긴급구조 대상인 것은 맞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 몇 달 전에 같은 사안으로 긴급구조비를 타처먹은 기록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긴급구조 수혜를 받으면 향후 2년 간 동일 사안으로의 중복 수혜가 금지되어 있었다.
“당신 임무가 뭐야? 나 같이 곤란에 빠진 사람 찾아서 도와주라고 내가 낸 비싼 세금으로 월급 주는 거 아니야? 내가 도하고 복지부에 전화해서 담당자 바꿔줘?”
놀랍게도 노순애는 그 자리에서 복지부에 전화를 걸었다. 그 담당자는 노순애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기... 웬만하면 현장에서 알아서 처리 좀 해주세요.”
경도에게 넘어온 통화음이었다.
민지의 조언으로 공동모금회로 연결했다. 가스비는 공동모금회에서 해결해주었다. 그러나 그건 서막에 불과했다. 얼마 후에 또 다른 계고장을 들고 왔다. 이번에는 3개월 밀린 전기요금이었다. 그걸 거절하자 읍장을 비롯해 그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온갖 관청에 전화를 걸어댔다.
더 치가 떨리는 것은 그녀의 전력이었다. 그녀는 자칭 장애인이다. 무릎이 아파 잘 걷지도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센터에 올 때도 소셜케어 차량을 타고 온다. 요금은 물론 무료다. 차량이 센터 앞에 서는 순간, 그녀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민원인이 아니라 황녀가 된다. 휠체어가 대령되고 사회복무요원을 비서처럼 부려먹은다.
그걸 타고 센터 곳곳을 활개치면서 공무원들을 볶아먹는다. 행여 외면이라도 하면 사진을 찍고, 말실수라도 하면 녹음을 해서 시청에 신고해버리니 극혐도 이런 극혐이 없었다.
그녀의 악행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급의 생쑈였다.
문화누리카드 사용처와 이웃의 증언이 그걸 말해준다. 당시 그녀는 여수행 고속버스와 경주행 고속버스를 탄 기록이 있었다. 여행을 다닌다는 얘기였다. 이웃의 이야기도 그걸 방증한다.
“그 여자가 다리 아파요? 잘만 걸어다니던데?”
그 기록을 반론으로 내세웠던 경도, 몸서리 칠 정도의 욕설 융단폭격을 맞고 떡실신이 되었다.
“다리 아프면 여행도 못 가냐?”
“문화누리카드는 그런데 쓰라고 준 거잖아?”
“그리고 내 사생활 니가 왜 들여다 봐? 인권위에 제소할 거야.”
폭풍 욕설 드랍이었다. 멋대로 이어붙이는 사생결단 악다구니 앞에 9급 말단은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넋놓고 당할 생각은 없었다. 어찌 보면 나순애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고마웠다. 이 여자가 로봇이라면 관상을 볼 수 없을 게 아닌가?
“우석 씨.”
휠체어를 밀고 가는 우석을 불렀다.
“예, 주임님.”
“그거 내가 가져다줄게. 우석 씨는 자리로 가 있어.”
“그래도 되요?”
우석이 물었다. 우석 역시 나순애라면 극혐이다. 당연히 그녀를 수행(?)하는 게 싫었다.
“오 주임.”
민원실로 내려오니 민지는 벌써 불안에 감염되어 있었다.
“오 주임...”
엄 팀장도 살짝 긴장 모드다.
“걱정마세요. 제가 잘 모실게요.”
팀원들을 안심 시키고 휠체어를 현관으로 밀었다.
“저 친구...”
현 주임이 고개를 빼들었다.
“걱정 돼?”
창가의 엄 팀장이 넌지시 끼어들었다.
“아니면요? 저 여자가 한 번이라도 조용히 간 적이 있나요? 오늘은 무슨 트입을 잡아 센터를 뒤집어놓으려나?”
“혹시 아나? 오 주임이 저 여자를 뒤집어놓을지.”
“팀장님, 무려 노순애입니다.”
“알아.”
“또 그 관상 믿으시는 겁니까?”
“현 주임만 안 믿지 많은 사람이 믿거든.”
“허얼.”
“일단 포스부터 다르잖아? 다른 때 같으면 잔뜩 쫄아 있을 텐데... 휠체어를 직접 맡은 이유도 그렇고.”
“미리 비위 맞춰서 입 막아보려는 것일 수도 있죠.”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주차장 쪽에서 나순애의 목소리가 찢어졌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나순애의 고함은 100 데시벨을 상회했다. 천둥소리와 맞짱을 뜨고도 남았으니 민원실 직원들은 하나 둘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휠체어 준비했지 않습니까?”
고함에 맞선 경도의 대답이었다. 휠체어는 소셜케어 차량 문 앞에 ‘반듯’하게 대령되어 있었다.
쏘아보는 나순애의 얼굴에 경도의 안광이 수평으로 꽂혔다.
[스캔 개시]
그녀의 삶이 켜켜이 쌓인 블랙박스 관상. 국대급 진상 민원인에 대한 초정밀 리딩의 시작이었다.
< 제가 이제 찌질 말단이 아니거든요-2 > 끝
ⓒ 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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