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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이제 찌질 말단이 아니거든요-1 > (22/245)

< 제가 이제 찌질 말단이 아니거든요-1 >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몰카 소동은 반전이었다. 

이장단 사무실을 정비했다. 이장단 회의는 보통 한 달에 한 번 열린다. 이번에는 임원진 선출을 하게 되니 신경을 좀 썼다. 사회복무요원들도 열심히 먼지를 닦아대니 필이 좋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 엄 팀장의 콜이 들어왔다.

“문화관광과에서 차 과장님하고 주무 주임이 왔는데?”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보니 독촉하러 오는 길이다. 달리 생각하면 반가운 손님이었다. 그렇잖아도 한 번 들리려 했던 경도였다. 시간절약을 하게 되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민원실로 향했다.

두 사람의 방문 목적은 짐작한 대로 문화누리카드실적을 깎아먹는 용포읍에 대한 압박이었다.

“이 사업은 주사보 정도가 맡는 게 좋은데...”

경도를 본 차 과장이 쓴 입맛을 다셨다. 그도 경도의 이력을 아는 눈치였다.

“우리 팀에 이만한 적격자 없습니다.”

엄 팀장이 선을 그었다. 과별 업무배정은 과장의 고유권한이다. 과장이 팀원을 배정하면 팀장이 최종 마무리를 짓는다. 다른 과에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었다.

“아무튼 팀 차원에서 신경 좀 써주세요. 용포읍이 우리 시 뿐만이 아니라 도 실적까지도 좌우하니까요.”

차 과장의 당부는 협박과 다르지 않았다.

“과장님.”

듣고 있던 경도가 운을 떼고 나왔다.

“제가 좋은 실적 올리면 포상 주시는 겁니까?”

“포상? 주지. 제대로만 하라고.”

“그런데 실태를 파악하다 보니 선수는 있는데 올라갈 링이 없더군요.”

“링?”

“문화누리카드 가맹점 말입니다. 속된 말로 님을 봐야 뽕을 딸 거 아닙니까?”

“그게 바로 담당자 재량 아닌가? 열악한 환경에서도 실적을 쳐내는 거.”

“문제는 제가 가맹점 담당이 아니라는 거죠.”

경도가 팩트를 들이댔다.

“가맹점 몇 개만 더 늘려주십시오. 그럼 제가 상위권으로 실적을 맞춰보겠습니다.”

“상위권이라고 했나?”

“그 정도는 되어야 포상 깜냥이 될 거 아닙니까?”

“김 주임, 여기 오 주임이 열심히 하려는 것 같으니 신규 가맹점 좀 독려해봐.”

차 과장이 수행한 주임에게 지시를 내렸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또 뭐?”

“괜찮은 국내전문 여행사 하나 소개해 주십시오. 과장님 영향력이 미치는 곳으로 말입니다.”

“여행 가려고?”

“문화누리카드 실적에 필요한 일입니다.”

“그럼 여기로 전화해봐.”

차 과장이 시청 앞에 자리한 여행사 명함을 꺼내놓았다.

“죄송하지만 전화 한 통만 해주시겠습니까? 오후에 용포읍 직원이 찾아갈 거라고...”

“허어.”

“과장님 전화가 있어야 말빨이 먹힐 것 같습니다.”

경도가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차 과장은 꼼짝없이 전화를 걸고 말았다.

“왠지 기대되는데?”

차 과장이 돌아가자 엄 팀장이 추파를 던졌다.

“팀장님께도 부탁이 하나 습니다.”

“말해봐.”

“비밀 지켜주셔야합니다.”

“아, 사람... 자네하고 나 사이에... 걱정말고 말해.”

“그게 말입니다...”

팀장 귀 가까이에 용건을 속삭였다.

“......!”

엄 팀장이 움찔거린다. 그에게도 뜻밖의 주문이었던 것.

“사진?”

“안 될까요?”

“뭐 문서보관실 같은데 뒤지면 나오긴 하겠지. 그런데 그 사람 사진은 왜?”

“관상 공부하는데 필요해서 그럽니다.”

“알았어. 이따가 시청 들어갈 때 구해볼게.”

엄 팀장의 수락이 떨어졌다. 경도가 부탁한 건 투신자살한 공무원의 사진이었다. 가급적이면 여러 장을 구해달라고 했다. 포샵도 문제도 있지만 사진이 많을수록 다양한 각도의 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임님, 이장님들 오십니다.”

무한돌봄 지원내용을 입력할 때 우석이 소식을 알려왔다. 세올 프로그램에서 로그아웃 하고 주차장으로 나갔다. 첫 도착자는 총무 전혁근이었다. 엄 팀장에게 된통 당했지만 설레발은 여전했으니 헛기침부터 허풍이 쩔었다.

“커험, 내가 1등?”

“예, 올라가시죠.”

경도가 사무실을 가리켰다.

“아, 다들 일찍일찍 다니지 말이야. 누군 할 일 없어서 일찍 오나?”

전 이장이 거드름을 피우는 사이에 차량 두 대가 더 들어왔다.

“이여, 우리 회장님.”

전 이장이 차로 다가선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현 이장 운진 스님이었다. 스님도 이장이 될 수 있다. 이 스님은 결혼해서 아내와 자식도 있었다.

경도가 낙점한 김재웅 이장은 다섯 번째로 도착했다. 용포읍의 관할 리는 모두 12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장 수는 12명이 아니다.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이장이 추가 되었으니 이장단의 정원은 16명에 달했다.

“아이고, 빨리들 오셨네?”

김 이장이 내리자,

“거, 신문에 나더니 얼굴 훤해지셨네?”

“오늘 한 턱 거하게 쏴야하는 거 아닙니까?”

이장들이 다가와 축하를 건넸다. 경도는 김 이장과 운진 스님, 총무 등의 관상을 하나하나 대조했다. 운진 스님의 미릉골은 좀 어두웠다. 이장단 회장도 감투가 분명하니 경도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총무는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김 이장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다행이군.’

관상은 아직 유효했다.

“좋아, 좋아. 이제야 우리가 대우 좀 받는 거 같구만.”

깔끔하게 정리된 이장단 사무실을 본 전혁근은 매우 흡족했다. 읍장과 행정과장이 들어와 인사를 나누고 나자 새 집행부 구성에 대한 안건이 화두에 올랐다.

“그냥 하던 사람이 계속하지요?”

테이블 끝의 홍상표 이장이 말했다. 총회를 보조하던 경도는 아차 싶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나온 것이다.

“그럽시다. 우리 운진 스님이 잘 하고도 계시고...”

맞은 편의 박경국 이장이 동의를 한다.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경도 표정이 굳을 때 운진 스님이 반대 견해를 밝혔다.

“말씀들은 고맙지만 이제 다른 분이 좀 맡아주십시오. 저희 절이 곧 대대적인 단청공사를 하지 않습니까? 올 한 해는 정화된 불심으로 절에 집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히유.’

경도의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그 숨이 그치기도 전에 또 다른 돌발이 나왔다.

“그럼 총무가 승계하셔.”

이번에도 홍상표 이장이었다.

생긴대로 논다.

관상은 과학이다. 홍 이장의 얼굴이 그랬다. 작은 입술이 뾰족하게 뒤집어진 느낌에 입술 주름이 유별나게 쪼글거린다. 이런 상은 입이 가벼우니 잠시도 그냥 있지 않았다.

“아, 거... 내가 그런 짐을 질 깜냥이 됩니까?”

총무 입이 벙긋 벌어진다. 회장할 생각이 있다는 얘기였다.

“그럼 우리 전 총무를 새 회장으로 추대합시다. 동의하시면 박수.”

홍 이장이 일어나 설레발을 칠 때였다. 앞쪽의 나동주 이장이 제동을 걸었다.

“홍 이장님, 지금 혼자 총회하십니까? 왜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하시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 의견도 들어봐야죠.”

“나 이장님이 하시게?”

“누가 그렇답니까? 다른 사람들 얘기할 틈도 없이 일방통행이시잖아요?”

“아따, 그 양반 까칠하시네. 그럼 어디 나 이장이 말해보구려.”

쓴 물을 넘긴 홍 이장이 착석을 했다.

“우선 운진 스님 수고하신 건 고맙고요, 지금까지는 이렇게 추대 방식으로 했으니 이번에는 추천식으로 가봅시다.”

“추천식?”

홍 이장이 고개를 들었다.

“회장할 만 한 분을 추천한 다음에 결선 투표하는 방식 말입니다.”

“그것도 좋겠군요.”

입구 쪽의 한 이장이 동의하면서 추천식이 급물살을 탔다.

“그럼 나는 말 꺼낸 나 이장님 추천합니다.”

“어허, 바로 그렇게 나오시면... 저는 이번에 신문에 특종으로 나오신 우리 김재웅 이장님 추천합니다.”

김재웅.

이름이 호명되자 경도의 안색이 밝아진다. 일단은 한숨 돌리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무료급식소 운영하신 분입니다. 제 생각이지만 이런 분이 회장 맡아야하지 않겠습니까?”

나 이장은 김 이장을 밀었다. 우여곡절 끝에 세 사람이 결선투표를 겨루게 되었다.

<나동주> <김재웅> <전혁근>

총원 16명 중에 13명이 참석, 나머지 셋은 위임장 제출. 7표를 얻으면 당선이 되는 셈법이 나왔다.

그런데...

이 분들 투표는 선거의 4대원칙에 따르지 않았다. 그냥 대놓고 거수를 하는 것이다.

“1번 나동주 이장님 지지하시는 분.”

전임 회장 운진 스님의 사회로 거수 투표가 시작되었다.

두 명이 손을 들었다.

“다음 김재웅 이장님.”

호명과 동시에 다섯 명의 손이 올라갔다.

“......”

경도 눈이 구겨졌다. 남은 사람이 여섯이니 그들이 전혁근에게 손을 들어주면 예상이 빗나가기 때문이었다.

“남은 분은 다 전 이장님 표겠죠?”

운진 스님이 묻자,

“저요.”

다행히 격포리 이장이 손을 들었다.

“저는 기권입니다. 회장 같은 건 그냥 여러분이 알아서 하세요.”

“저도요.”

홍일점 어순희 이장도 가세한다.

“......”

총회장이 잠시 침묵에 휩싸였다. 그러나 운진 스님, 재빨리 셈법을 끝내고 당선자를 공표했다.

“그럼 나머지 이장님이 네 분이니 앞서 다섯 표를 얻으신 우리 김재웅 이장님이 새 회장입니다. 다들 박수로 환영해 주세요.”

짝짝짝!

경도, 하마터면 1빠로 박수를 칠 뻔했다. 순발력 있게 손을 멈춘 경도, 이장들의 박수가 나오자 거기다 박수를 보태주었다. 대통령선거에도 담담하던 경도였으니 읍의 이장선거에서 가슴을 졸이게 될 줄은 몰랐었다.

“새 회장님, 한 말씀 하시죠.”

운진 스님이 김 이장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부족한 사람을 뽑아주니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게 다 저기 있는 오 주임 덕분인 거 같으니 오 주임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김 이장이 경도를 가리켰다.

“오 주임이 왜요?”

운진 스님이 물었다.

“저를 신문에 나게 해준 게 오 주임 아닙니까? 코로나 이후에 개시된 급식도 적극 도와줘서 성황리에 끝났고요.”

“그럼 오 주임에게도 한 턱 쏘셔야겠네?”

홍 이장의 입이 참을 리 없다.

“까짓 거 내죠. 한 턱 같은 거...”

“진짜 한 턱 내실 겁니까?”

경도가 나섰다. 자연스러운 타이밍이었다.

“내죠, 까짓 거. 뭘로 낼까요?”

“그러시면 제 업무를 좀 지원해주시기 바랍니다.”

“업무?”

“문화누리카드 있잖습니까? 제가 그것도 담당하고 있는데 지금 용포읍내 꼴찌에 경기도내 꼴찌거든요. 이번에도 꼴찌 먹으면 저 짤리게 생겼습니다.”

경도의 자세는 읍소모드다. 순박한 표정이 9급 말단다웠으니 그 순수함이 이장단의 마음을 끌었다.

“문화누리카드 사용실적 올려 달라고?”

“머리는 제가 짜낼 테니 이장님들은 협조만 해주시면 됩니다.”

“여러 이장님들, 어떻습니까? 신임 회장 체면 한 번 세워주시겠습니까?”

김 이장이 이장단에게 물었다.

“오늘 회장턱 내는 거 봐서 결정하리다.”

이장들이 옵션을 걸었다.

“좋습니다. 그럼 마누라 몰래 꿍쳐둔 비상금이라도 꺼내서 옻닭과 유황오리 쏘죠. 괜찮습니까?”

김 이장의 공약이 나오자 이장들이 박수로 환호를 했다. 첫 단추가 될 이장단의 지원, 우여곡절 끝에 약속을 받게 되는 경도였다.

‘한 시름 덜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장단 사무실을 나왔다. 이장들의 결산작업을 위해 비키는 것이다. 복도로 나오니 우석이 울상으로 휠체어를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뭐야? 나순애 씨?”

경도가 물었다.

“예. 또 떴습니다.”

우석은 울상 일보 직전이었다.

나순애.

그녀가 누군가? 읍장 이름은 몰라도 그녀 이름은 아는 게 센터 직원들이었다. 군대처럼 소원수리를 적어내라면 이 여자의 ‘관외 전출’ 내지는 ‘무인도 격리’가 될 판이었다.

잔머리의 여왕, 무대뽀 만렙, 극혐의 줌마. 진상을 뜻하는 모든 수식어를 동원해도 모자랄 들볶기의 여왕이 납신 것이다.

‘소셜케어 서비스’ 차량이 멈추는 게 보였다. 등록을 하면 2시간 무료서비스를 받는 차량이다. 이 서비스 역시 생떼와 읍소로 가입하고 멋대로 혜택을 누리는 노순애였다. 그녀가 문을 연다. 경도 몸이 저절로 전율에 젖는다.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당한 기억 때문이었다.

‘하아.’

심호흡과 함께 복도의 거울에 얼굴을 비쳐보았다.

사람의 운명을 쪼아대는 관상.

이 철면 진상녀에게도 통할까?

닥치고 갑 행세를 하는 그녀에게 반전의 상괘를 얻을 수 있을까?

‘도전.’

결단과 함께 경도의 피가 싸목싸목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 제가 이제 찌질 말단이 아니거든요-1 > 끝

ⓒ 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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