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재감 리뉴얼 중이에요-7 >
“죄송합니다.”
사과였다.
“죄송합니다.”
거듭 허리까지 깊이 숙였다.
‘뭐야?’
일대 반전의 결과 앞에 직원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읍장님...”
읍장에게 다가선 경도가 몇 마디를 속삭였다. 그런 다음 자술서를 건네주었다. 여자에게 받은 것이니 달리 공무원일까? 공무원은 서류로 말하는 것이다.
“......!”
자술서를 본 읍장 얼굴이 석고상처럼 굳어버렸다. 그러나 관록이 있으니 이내 상황파악을 마치고 여자를 돌아보았다.
“처음이니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한 번 더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때는 바로 경찰에 넘길 테니 그리 아십시오.”
“예.”
“가보세요.”
읍장이 문을 가리켰다. 여자는 꽁지가 빠져라 출입구로 향했다.
“여사님.”
경도가 묵직하게 여자를 불렀다.
“예, 예?”
여자가 울상으로 돌아본다.
“가방 가져가셔야죠.”
경도가 말하자 여자가 되돌아와 가방을 집었다. 쪽팔리는 건 아는지 고개는 들지 않았다.
“오 주임.”
자술서를 넘겨본 엄 팀장 목에 힘이 들어갔다. 자기 직속 부하였다. 모두가 꼼짝 못하던 건을 보란 듯이 정리하고 나오니 힘이 들어가는 건 당연했다.
“어떻게 된 건가?”
민원실장이 물었다.
“따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경도의 답은 짧았다.
“읍장님 방으로 올라들 가시죠. 오 주임도 가자고.”
엄 팀장이 상황 정리에 나섰다.
“우석 씨, 금방 돌아올 테니까 그 친구들 데리고 이장단 사무실에 가있어.”
엄 팀장 뒤를 따르며 우석에게 지시를 내렸다.
“네, 주임님!”
사회복무요원들의 반응이 압권이었다. 아까는 개무시를 때리더니 한 몸처럼 일어나 복창을 한 것이다.
“자세히 설명해보게나.”
읍장의 질문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나왔다. 함께 올라온 생활과장 장승환과 이창교 과장, 민원실장과 몇몇 팀장들도 숨을 죽였다.
“자술서대로 그 분 자작극이었습니다.”
“뭐야?”
민원실장이 먼저 튀었다.
“자작극?”
생활관리과장도 침을 튀긴다.
“예.”
“그러니까 자기가 몰카를 설치하고는 소란을 피웠다?”
“그렇습니다. 지난주에 장애인 주차스티커 일로 불만이 생겨서 우리 센터에 엿 좀 먹이고 싶었답니다.”
“으하.”
민원실장이 안도의 숨을 내쉰다. 최근의 사회상 때문이었다. 폭행이나 살인보다도 성 관련 사건이 더 문제가 되는 분위기였다. 본인의 자백이 나왔으니 망정이지 여자가 잡아뗐으면 사건이 커질 뻔했다. 경찰이 오고 방송보도가 된다면...
<피해자 수백 명에 이를 듯>
<몰카 파악조차 못한 안일한 일선 행정복지센터>
시장에게 불려가고 감사실로 불려간다. 경찰이 오고 개별 수사가 진행된다.
‘어어업.’
생각만 해도 뒷목이 땡겨왔다.
“사태가 그러니 읍장님께 말씀드리고 정리를 맡긴 겁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거든요. 나중에 딴 소리할까봐 자술서를 받았습니다.”
“좋아, 좋아. 잘 했네. 정말 잘 했어. 그런데 내 말은...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거야. CCTV에 찍힌 것도 아닌데?”
자술서를 집어든 민원실장이 경도를 바라본다. 착석한 간부들의 눈빛은 민원실장과 붕어빵처럼 닮아있었다.
“관상이었나?”
질러나간 건 엄 팀장이 아니라 읍장이었다.
“예.”
“관상?”
아직 경도의 관상 파워를 모르는 팀장들이 경기를 했으니 이 과장도 그 중의 하나였다.
“민원인들 상대하면서 어려움이 많다보니 흥미로 관상공부 좀 했거든요. 마침 관상법에 나오는 상이라 나선 것인데 운 좋게 적중한 것 같습니다.”
“아, 사람, 뭘 그렇게 겸손해? 이게 운으로 될 일이야? 디테일하게 좀 설명해 봐.”
엄 팀장이 멍석을 깔아준다.
“그래. 나도 궁금하군. 지난번에 준 상괘도 그렇고.”
“읍장님도 오 주임에게 관상 보셨습니까?”
질문의 주인공은 장 과장이었다.
“그냥 우연히... 아무튼 족집게더군.”
“히야. 오 주임 다시 봐야겠네?”
장 과장의 주목까지 받으며 상담실 안에서 일어난 일을 돌이켰다.
**
“말해봐요. 나 바쁜 사람이거든요.”
여자는 독기부터 뿜었다. 읍장부터 서기보까지 단체로 절절 매는 걸 보고는 기가 제대로 살았다.
“범인은 당신이 잘 알죠.”
“나?”
“예.”
“당신 지금 나랑 장난해?”
“장난 아닙니다. 범인은 당신입니다.”
문을 막아선 경도, 돌직구를 날려버렸다.
“뭐야?”
여자가 눈알을 부라렸다.
“당신, 장애인 남편이 남편 맞아?”
경도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아니, 이 인간이 뭘 잘못 처먹었나?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여자의 삿대질이 경도 코앞을 휘저었다. 그 손을 잡아 여자의 콧날이 시작되는 산근을 눌러버렸다.
“여기가 관상에서 산근이라는 곳인데 가로줄이 세 개시네? 게다가 어두운 간문에 눈알이 구슬처럼 돌출되었으니 돌안이라. 이런 관상이라면 불륜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최소한이면 남편과 별거요 최대한이면 사별인데 남편 이름으로 웬 장애인주차 스티커? 우리가 당장 현장확인 조사 나가드릴까?”
“......?”
경도의 정공에 여자의 기세가 흔들렸다. 관상은 그대로 적중했으니 여자는 다른 남자가 있었다. 다만 남편의 장애를 앞세워 각종 혜택과 세금감면 등을 누리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거야.”
그래도 발악으로 버텨보는 여자. 그 표독함 또한 눈에 나타나 있었다. 눈꼬리가 가늘고 기니 언 듯 보기에는 청수해 보이지만 곡선의 굴곡이 잘린 듯 끊어졌다. 이런 관상은 신경질적이거나 교활한 성품이니 천성이 가출할 리 없었다.
“해보셔. 당신 인생에 관재구설수가 주렁주렁하지만 이겨본 적 있어? 여기 주름이 많은 거 보니 평생 관재송사에 휘달릴 것 같은데.”
경도의 손이 여자의 천이궁을 겨누었다. 천이궁은 이마 꼭대기의 양 모서리다. 전근이나 이사 운을 보는 곳이기도 했다.
“서른 하나에 첫 송사, 서른 넷에는 두 번, 서른 아홉과 마흔 넷에 한 번씩... 이번에 소송하면 여섯 번 째인데 6전 6패는 따놓은 당상이야.”
경도의 손가락은 그녀의 유년운기부위에 가 있었으니 눈썹을 기준으로 콧대의 연상(年上)까지 차례로 내려갔다.
“......!”
“그리고 여기 당신의 왼쪽 볼에 찍힌 점. 이게 또 다른 증거야. 소송이나 관재수, 시비 등이 일어나면 당신은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는 팔자야. 그러니 구설수 만들지 말고 조용히 살아.”
경도의 상괘는 거침이 없었다.
“......?”
여자는 아찔했다. 다섯 번의 송사년도가 하나도 빗나가지 않았다. 무수한 시비와 구설수를 야기하는 쪽도 여자였다. 촌철살인의 팩트였으니 기세가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 뭐야... 공무원 맞아?”
여자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읍장님 허락은 내가 받을 테니까 자술서 쓰고, 직원들에게 사과하고 조용히 사라지셔. 다시 말하지만 당신 인생에 이기는 송사는 없어.”
경도의 통고는 결심판결과도 같았다.
땅땅땅.
여자의 기세를 삽시간에 무너뜨린 것. 여자는 별 수 없이 자술서를 적었다. 여기까지가 회의실 안에서 일어난 일의 전모였다.
그걸 적당히 간추렸다.
“여자 분이 흥분해서 악을 쓸 때 보니 혀에 점이 있더군요. 눈알도 좌우로 구르는 데다 초점이 잘 맞지 않고요.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상입니다. 거기에 눈썹이 희미하고 코가 커서 남을 속이는 일을 잘 하는 상이라 모험을 걸었는데 그게 성공한 것 같습니다.”
“그랬다가 아니었으면 어쩌려고?”
민원실장이 ‘만약’을 들이댔다.
“일단 사회복무요원들에게는 관재수가 없었거든요. 그렇다면 우리 직원들 중의 하나거나 외부 사람들의 소행인데 거기까지 가려면 경찰의 정식수사가 필요하겠죠. 그렇게 되면 센터가 벌집 쑤신 꼴이 될 테니 승부수를 날린 겁니다.”
“......”
경도의 설명에 민원실장이 뻘쭘해졌다. 그는 내심 사회복무요원들을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단하네. 자네가 우리 센터를 살렸어.”
읍장의 격려가 나왔다.
“이건 완전 드라마구만, 드라마.”
팀장들 대다수도 혀를 내두른다.
“그럼 저는 회의준비를 해야 해서...”
인사를 마친 경도가 돌아섰다. 기분? 한 마디로 끝내줬다. 존재감 없던 9급 말단 주제에 센터의 간부들 앞에서 부각되는 이 뿌듯함이라니. 무명의 선수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와 결승골이라도 우겨넣은 것 같았다.
“주임님.”
아몰랑으로 나오던 작은 빌런 사회복무요원들의 자세도 완전히 바뀌었다. 이장단 사무실에 얌전히 대기 중인 것은 물론이오, 경도가 들어서자 일제히 기립까지 했다.
“앉아.”
경도가 사인을 보냈다.
“괜찮냐?”
“네.”
요원들이 입을 모은다.
“고맙습니다.”
최고참 윤학길이 대표로 말했다.
“진짜?”
“다들 우리 의심하는데 주임님만 믿어주셨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너희들이 그런 자원이 아니잖아?”
한 번 더 띄워주니 요원들은 한층 더 나긋해졌다.
읍면동 행정복지센터의 사회복무요원들. 그 입지는 따분하고 무료하다. 자신의 업무가 있다지만 소모적인 것들. 고개를 돌리면 죄다 공무원이오, 민원인들이다.
어느 쪽도 요원들 편은 아니다. 대개는 그렇게 겉돌다 복무를 마친다. 사소하게는 공무원을 도와 민원업무를 보지만 은근슬쩍 요원에게 업무를 떠미는 직원도 있다. 특히 담당자의 연가나 병가 등이 그랬다. 그때면 요원이 임시 담당자가 되는 것이니 그 심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그나마 경도는 그들 입장을 이해하는 쪽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데다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한 동창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까는 깜놀했지?”
“예...”
“이번 기회에 남들이 보기 곤란한 자료들 있으면 좀 지워라.”
요원들의 자존심을 위해 우회했다. 타겟은 윤학길이었다. 그의 핸드폰에는 야동이 많았다. 결정적으로 그는 사건 직전에 자위를 때린 후였다. 그건 코에서 알 수 있었다. 그의 콧망울에 노을이 떴으니 성적 욕망을 풀었다는 뜻이었다. 처음에는 콕 집어 얘기하면서 가오 좀 잡을까 했지만 이 정도로 넘어가기로 했다. 경도도 유경험자지만 질책이 너무 디테일해지면 오히려 반감이 생겼다.
마무리에 들어갔다.
“다음 주부터 문화누리카드 관련 민원인들이 많아질 거야. 이 안내문 내용 숙지해두고 안내와 지원 좀 부탁해.”
“예.”
“학길 씨하고 우석 씨는 오늘 이장단 총회 준비 좀 도와주고.”
“알겠습니다.”
요원들의 복창에서 사이다 캔 따는 소리가 났다.
뽁뽁뽁.
< 존재감 리뉴얼 중이에요-7 > 끝
ⓒ 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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