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존재감 리뉴얼 중이에요-4 > (18/245)

< 존재감 리뉴얼 중이에요-4 >

“면목이 없습니다.”

격한 감정이 안정되자 최현배의 입이 열렸다.

“아닙니다. 제 잘못입니다.”

경도는 그가 나갈 구멍을 열어주었다.

“오 주임님 잘못이라뇨? 좋은 뜻으로 해준 말을 무시한 제가 쫄보입니다. 만약 저 차가 펑크나지 않았다면... 어휴.”

최현배가 고개를 저었다.

“제 주거래처가 중국 아닙니까? 오늘 계약하기로 한 두 사람, 중국 판매상들 중에서도 큰손들입니다. 제가 거래를 좀 늘여보려고 이 사람들을 택했는데 아이템이 마스크라니까 잘 믿지를 않아요. 그래서 만약 물품공급에 차질을 빚으면 위약금으로 10배 조항을 넣어도 되냐고 하길래 콜을 했지요. 그 계약서에 사인한 후에 이 전화를 받았다면 저는 아마 병원으로 실려가는 중일 겁니다. 계약 불이행으로 인한 위약금에 더불어 그들과의 거래가 영영 끝나게 될 테니까요.”

“다행이네요.”

“다행이고 말고요. 당장 달려가서 사과해야할 것 같습니다. 욕은 좀 먹겠지만 아직 계약 전이니 거래관계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겁니다.”

“이거 마시고 가세요.”

경도가 생수 한 병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최현배는 생수를 단숨에 비워냈다.

“그나저나 저 이제 흉살은 가신 겁니까?”

“가셨네요. 축하드립니다.”

“주임님 관상 능력, 진심으로 인정합니다.”

숨을 돌린 최현배가 고개를 숙였다.

“거래처들 기다리십니다.”

경도가 차를 가리켰다. 최현배가 탄 차는 이내 시야에서 멀어졌다.

“뭔지 잘 모르지만 잘 된 거 같은데?”

엄 팀장이 다가왔다.

“그렇습니다.”

경도가 웃었다. 또 한 명의 팬을 확장한 날이었다.

“우와.”

오후가 되자 우석의 입이 쩍 벌어졌다. 피자 때문이었다. 최현배가 보낸 피자는 무려 20판이었다. 콜라도 세트로 딸려왔다.

“이건 무조건 우석 씨 몫.”

따끈한 한 판을 우석에게 안겨주었다.

“주임님...”

“받을 자격 있잖아?”

경도가 찡긋 윙크를 했다. 최현배 사장 차의 펑크는 사실 경도의 지시였다. 달리 방법이 없던 경도가 우석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평소 경도와 케미가 괜찮던 우석이었기에 순순히 따라주었다. 그러나 간이 조마조마했다. 

그렇기에 최현배가 경도에게 고마움을 전할 때 가장 환호한 사람이 우석이었다. 마음 약한 우석이었으니 혹 블랙박스라도 확인하면 문제가 될까봐 바짝 쫄았던 것.

“그리고 이건 친구들 몫.”

그 위에 한 판을 더 올려주었다. 용포읍의 사회복무요원은 우석을 포함해 셋이었다. 그들에게도 미리 약(?)을 치는 것이다.

“다른 거 필요하거나 애로사항 있으면 말해봐. 아무래 생각해도 이걸로는 안 될 거 같거든.”

“충분해요.”

“그러지 말고...”

“애로라면 현 주임님...”

우석이 말끝을 흐렸다.

“대출?”

“......”

대출은 대리출석이다. 공무원들은 여러 행사에도 동원이 된다. 재미난 건 신분확인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 출석부에 소속기관과 직급, 이름만 쓰면 되니 은근슬쩍 사회복무요원을 대타로 보내는 경우가 있었다. 현 주임이 특히 그랬는데 주말이나 휴일이 포함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적당한 기회에 말해줄게.”

“됐어요. 괜히 오 주임님까지...”

“걱정말고. 가서 피자나 먹고 와.”

경도가 우석의 등을 밀었다.

“이거 누가 보냈대?”

럭셔리녀 은빛도 입이 벌어진다. 벽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오후 3시 반. 공주님 배도 비어갈 타임이었다.

“남은 거 같이 좀 돌릴래요?”

경도가 은빛에게 업무협조(?)를 구하자,

“오 주임이 돌려. 난 다리가 아파서...”

은빛은 피자를 문 채 외면했다. 공주병 아가씨가 갈 리 없다. 뭐만 하면 미인계 쓰라는 거냐며 반발하던 그녀였으니 특별할 것도 없었다.

“팀장님이 맡아주셔야겠네요.”

차선책으로 엄 팀장에게 떠넘겼다.

“나?”

피자를 먹던 엄 팀장이 고개를 들었다.

“이럴 때 생색 좀 내셔야죠. 우리 맞복팀도 이 정도는 나간다.”

“......”

“공덕도...”

“알았어.”

공덕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두 말없이 일어선다.

반응은 대박이었다. 이런 일에 나서지 않던 엄 팀장이다 보니 직원들의 느낌이 달랐다.

두 판은 민원실 방문객들에게 나눠주었다. 민원실이 피자 먹방이 되었다. 분위기가 확 밝아졌다.

어두운 건 은빛의 표정 뿐이었다. 점심 약속에 다녀온 후부터 급 다운이 되었다. 경도는 이유를 알았다. 은빛의 귓불이 검붉었다. 귀가 검붉은 건 위험신호였으니 재산을 털리거나 구설수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은빛은 도도하다. 넓은 미간에 눈동자 윤곽이 또렷하다. 코뿌리에 이어 턱선까지 단단하니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상이었다.

실은 언질하기 어려운 이유가 따로 있었다. 그녀 눈꼬리 쪽의 간문에 윤기가 빠졌으니 점심시간에 섹스를 했다는 증거였다. 은빛은 만나는 남자가 있는 눈치였다.

둘이 트러블이라도 생겼나?

일진이 사나울 것은 경도가 예측한 바였다. 그러나 남녀관계는 첨예한 일이니 모른 척 넘어가는 게 상책이었다. 은빛이 도움을 청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피자가 센터 분위기를 살렸다.

“어서 오세요.”

민원인을 대하는 직원들의 목소리도 한층 밝아졌다.

**

좋은 분위기는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시작은 엄 팀장이었다. 이른 아침, 출근 지문을 날인하고 들어선 엄 팀장은 책상 위의 신문부터 체크했다. 하나로일보였다.

“......!”

사회면을 넘길 때는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았다. 어제 급식봉사 사진이 있었다. 대개 이런 사진은 단신으로 취급된다. 그런데 한 장도 아니고 무려 네 장이었다. 포토스토리 형식으로 보도되었으니 엄청난 비중으로 다뤄준 것이다.

‘심봤다.’

엄 팀장은 전율했다. 김재웅 이장과 최 사장이 메인이지만 앞치마 두른 자신의 모습도 제대로였다.

“오 주임.”

경도부터 불렀다.

“모델해도 되시겠는데요?”

경도가 닭살 멘트를 날렸다.

“읍장님 나오셨나?”

“조금 전에 올라가시던 데요?”

“나 좀 다녀올게.”

신문을 쥔 엄 팀장이 계단으로 뛰었다.

“읍장님.”

읍장실 문 여는 소리가 민원실까지 들렸다.

낭보는 또 이어졌다.

“전화 받아봐.”

은빛이 전화를 돌려주었다. 최현배였다.

“오 주임님...”

“......?”

최현배의 통 큰 기부 소식이었다. 담요 100장에 라면 100박스, 쌀 20kg 100포, 전자레인지 20개 등을 쏘겠다고 했다.

“최 사장이?”

엄 팀장 입은 귀에 걸려 내려오질 못했다.

“저번에 홍 의원님이 주신 봉투 있죠? 이번 기회에 같이 처리하죠?”

“그럴까?”

엄 팀장은 또 한 번 3층 읍장실로 향했다.

오전 내내 엄 팀장은 바빴다. 홍보실과 시장실에서 격려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선후배들도 그랬다. 경도도 축하전화를 받았다. 동기 마지웅과 조유란이었다. 뜻밖이었다. 열 동기 부럽지 않은 두 사람. 경도 마음에 또 하나의 사진으로 새겨졌다. 

<담요 100장+라면 100박스+쌀 100포+가스레인지 20개>

GDP 3만불 시대의 대한민국에서 뭐 그리 놀랄 일이냐고? 행정의 최전방에 선 읍을 중앙부서와 비교하면 큰 코 다치신다. 일개 읍의 ‘팀’에 들어온 기증품으로 한정하자면, 굉장히 큰 규모에 속했다.

“글쎄, 빨리 좀 박아오라니까.”

엄 팀장이 몸소 플래카드를 독촉했다. 읍에 온 후로 면이 제대로 서는 날이었다. 불타는 그 마음에 경도가 기름을 부어주었다.

“조 지국장이 취재를 온다고?”

엄 팀장의 반응은 과격할 정도였다.

“예.”

“정말인가?”

“어제 인연으로 부탁드렸더니 기꺼이 와주겠다고 했습니다.”

“최현배 사장은?”

“지금 물품 싣고 오고 계시답니다.”

“오 주임...”

엄 팀장 눈에 별꽃이 반짝인다. 읍 센터로 발령 받는 순간부터 시청 복귀만을 꿈꾸던 엄 팀장이었다. 그렇기에 센터의 간부들과도 관계가 소원했다. 그런 엄 팀장이기에 이미지 반전의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쌔끈!

플래카드가 걸렸다.

<한서실업 취약계층 일상품 기증식>

기증품들이 그 아래 차곡차곡 쌓였다. 공무원은 실적과시를 좋아한다. 사진으로 남기는 거 더 좋아한다. 관행(?)대로 사진이 박혔다. 최현배 사장을 중심으로 읍장과 엄 팀장이 좌우에 포진했다. 경도도 서고 민지와 은빛, 우석도 섰다.

촬콱!

사진이 박혔다.

촬곽!

자부심이 살아났다.

남은 건 배포가구 선정과 조뺑이 택배였다. 배포 매뉴얼은 잘 갖춰져 있다. 공무원의 주특기가 서류 만드는 것 아닌가? 매뉴얼 순번에 의하면 이번 차례는 차상위계층이었다. 그러나 물품이 많았으니 긴급지원자와 장애인가정 일부도 포함 시켰다. 어느 가정에 가스레인지가 필요한 지 아는 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수급자들 가정의 현장확인은 놀러가는 게 아니었다. 그들 가정에 숟가락이 몇 벌 있는 지도 알고 있는 게 맞춤형복지팀이었다.

“아오, 저걸 언제 다 돌린대. 그냥 수령하러 오라고 문자 보내면 안 돼?”

공주님 은빛이 정색을 했다.

“안 됩니다.”

경도가 선을 그었다. 담요처럼 가벼운 건 그렇게 배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쌀과 가스레인지는 배달이 필요했다. 장애인이나 노령의 어르신들이 들고 가기에는 무리였다.

결론을 말하자면 물품 배포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조경철이 동행취재에 나서자 읍장이 동참을 선언한 것이다. 읍장이 나서니 주무 주임이 나섰고 팀장 서넛도 자원을 했다. 읍장은 센터의 왕. 직급 파워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읍 행정복지센터에서 나왔습니다.”

수혜자들 가구 앞에서 경도의 목소리는 밝았다. 전처럼 의례적이고 의무적인 마음이 아니었으니 이 물품은 경도의 능력으로 제공 받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고맙습니다.”

“어머나, 그렇잖아도 가스레인지가 오래 되어 불이 잘 안 켜졌는데...”

“담요, 너무 예쁘다. 꿀잠 자겠네.”

가는 곳마다 낯 부끄러운 인사가 들렸다. 할머니들은 텃밭에서 딴 오이 같은 걸 쥐어준다. 땀 흘린 후에 먹는 오이 맛이 보약보다 좋았다.

촬콱!

배포하기 전에 박았던 인증샷, 마지막 배포 가정 앞에서 마무리 인증샷으로 또 박았다.

공무원은 사진이다. 전에는 그런 관행에 염증도 생겼던 경도. 이런 일로 찍는 사진이라면 닥치고 환영이었다.

촬콱촬콱!

셔터 소리도 시원했다.

“어, 옵빠.”

월요일 아침, 커피전문점의 인희 표정이 밝아졌다. 경도가 들어선 것이다.

“유연근무 날이에요? 일찍 왔네요?”

인희가 물었다. 읍 센터 앞에서 근무하다 보니 그녀도 반 공무원이 되어 있었다. 공무원의 유연근무, 민간으로 치면 탄력근무는 일상화되어 있었다. 한 시간 일찍 나오면 한 시간 일찍 가는 것이다.

“아부 떨 일이 좀 있어서. 라떼 두 잔 부탁해.”

“옵빠 기사 인터넷에 떴던 데요? 내가 친구들 동원해서 선플 좀 도배해 놨어요. 이런 공무원 특진 시키라고.”

“진짜?”

“그럼요.”

“잘 부탁한다. 앞으로 기사 자주 나올 거다.”

“오오, 기대, 기대.”

인희의 눈이 만화 주인공의 눈처럼 반짝거린다.

“네 웹툰도 같이 나오면 좋지.”

“걱정마세요. 나 소재 잡았어요.”

“뭔데?”

“비밀이에요.”

“공모전 날짜는?”

“세 개가 있는 데요? N은 두 달 후고 KK는 세 달 후에요.”

“그럼 세 달 후를 노려라. 그때가 운빨이 좋은 것 같다.”

“에? KK가 더 치열한 곳인 데요?”

“그럼 더 치열하게 그리면 되지.”

“으음, 희망고문이 너무 센 거 아니에요? 나 그렇게까지 잘 그리는 편은 아닌데? 콘티 짜기도 어렵고...”

“세계적인 작가들도 처음에는 다 초보자였다더라. 간다.”

라떼를 받아들고 손을 흔들었다.

걸음이 멈춘 곳은 주차장이었다. 오늘은 두 사람이 돌아온다. 병가를 갔던 이창교 과장과 현동욱 주임이었다. 

이 과장 역시 경도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사람의 하나였다. 경도가 배정되었을 때 인사과장에게 직접 반발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 친구는 내 밑에 못 받아요.”

경도에게는 비수였던 그 발언이 귓전에 생생했다. 그렇기에 데면데면하게 모셨던 과장. 1차 리뉴얼 핵심과제의 하나였다.

이 과장 차가 주차구역으로 들어왔다.

< 존재감 리뉴얼 중이에요-4 > 끝

ⓒ 초빛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