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재감 리뉴얼 중이에요-3 >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사장님 얼굴에 흉살이 들어왔습니다. 최근에 맺힌 것이니 그 거래에 신중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으하핫!”
최현배가 폭소를 터트렸다.
“오 주임 관상실력이 수준급인 건 인정하겠는데 이게 10년 지기와 한 계약입니다. 게다가 얼마나 드라마틱한 건지 아십니까?”
“......”
“판매상이라면 누구나 목을 매는 마스크예요. 한국에서는 코로나 19가 고개를 숙였지만 중국은 아직 여러 성에 기세가 남아있어요. 그런데 내 지인 공장에서 마스크를 계약한 중국상인이 변칙적인 방법으로 마스크를 보내다가 세관에 걸려 구속이 되었지 뭡니까? 그 물량이 나한테 넘어온 거라고요.”
“......”
“지인이 양심적이라 단가도 죽입니다. 개당 310원에 300만개를 받기로 했거든요. 중국에서는 여전히 부르는 게 값이라 2억을 그 자리에서 지불했고 잔금 7억여 원도 친척과 친구 놈들에게 급전으로 융통했어요. 지금 읍에서 중국 쪽 큰 손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됩니다. 이건 문제가 될 게 없어요.”
최현배의 설명은 일사천리였다.
“관상 얘기 나오니까 말인데 사실 우리 어머니도 동네 관상쟁이였어요. 나한테 58세가 되면 어려움이 닥칠 거라고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매출 확 줄었고 얼마 전에는 물건창고에 불이 나더군요. 다행히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오싹한 예언이었죠. 오 주임이 말하는 흉살이라는 게 그걸 겁니다. 이미 액땜했어요.”“그게 언제입니까?”
“한 달 좀 넘었죠, 아마?”
“한 달... 잠깐만요.”
경도의 눈이 다시 관상 포스로 돌아갔다. 최현배의 뺨을 정밀 리딩한다. 그렇기를 바랐다. 신도 실수로 불량 인간을 탄생 시키지 않는가?
‘윽.’
하지만 아니었다. 유년운기부위도에 나타난 흉살은 그 사이에도 기세를 더했다. 개봉이 코앞이었다.
“죄송하지만 흉살은 이번에 닥치는 것으로 나옵니다.”
“오 주임.”
“불황이나 작은 화재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예고편 같습니다. 큰 해일이 서려면 작은 파도가 먼저 출렁거려야 하니까요.”
“하핫, 이것 참...”
“사장님.”
“아무튼 걱정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최현배 표정이 굳었다.
“정 계약을 하시려거든 하루만 미루시는 게 어떨까요? 이 흉살은 곧...”
“거 진짜... 듣자듣자 하니 남의 사업에 초치는 것도 아니고...”
“저는 사장님을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됐어요. 10년 지인이라고 안 했습니까? 사람 기분 나쁘게시리...”
최현배가 말을 잘랐다.
“제가 주제 넘었습니다. 그럼 혹시라도 중국 쪽 계약자 얼굴이 둥글거나 이마가 반듯하지 않으면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둥근 얼굴은 최 사장과 상극이다. 이마가 험한 사람은 변절할 가능성이 높으니 최소한의 방비책을 알려준 것이다.
“얼굴 둥근 사람은 마스크 공장 사장인 내 지인이라오. 보시오. 당신 말대로 이마는 좀 울퉁불퉁하지만 이만한 호인 없어요. 그런데 어디서...”
최현배가 마스크 공장 사장과 찍은 사진을 들이밀었다.
경도는...
‘윽!’
뼈를 치는 경련에 휘청거린다. 경도의 경고와 복사판이었다. 마스크 사장의 인상은 좋았다. 둥근 얼굴이니 동네 아저씨처럼 푸근해 보인다. 이렇게 둥근 얼굴은 수형상(水形相)이다. 문제는 최현배가 화형상(火形相)이라는 것. 게다가 마스크 공장 사장 이마에 드러난 거친 굴곡...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으니 마음에 담지 마십시오.”
일단 수습을 했다. 횡액의 시기는 가깝지만 당장 눈앞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인간은 눈으로 봐야 깨닫는 동물이었다.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계약건이 있어서 말이죠.”
최현배가 여기저기 악수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는 출발하지 못했다.
“뭐, 뭐야? 이거?”
타이어가 펑크나버린 것이다.
“아, 미치겠네. 지금 가도 늦을 판인데...”
그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보험회사에 긴급 서비스 요청을 하니 30분 정도 기다리라는 답이 왔다.
“택시 불러드릴까요?”
민지가 물었다.
“됐어요. 계약 후도 볼일이 있기 때문에 차가 필요합니다.”
최현배의 표정에 짜증이 서렸다.
“우리도 마무리 하죠.”
경도 표정은 조금 전과 달리 밝았다. 아직 설거지가 남았다. 사람은 마무리가 좋아야한다. 김 이장의 눈도장을 박으러온 바였으니 더욱 그랬다.
“최 사장 기분 상했나 보네? 욱해서 쌀 기증 끊는 거 아니야?”
경도 옆의 엄 팀장이 중얼거렸다.
“그럴까요?”
“얼굴 보니까 제대로 열 받은 거 같아서.”
“혹시 잘못되면 팀장님이 좀 막아주십시오.”
“해보긴 해야지. 안 그러면 오 주임이 쌍심지 켜고 따지고 들 테니 말이야. 팀장과 과장은 이런 거 하라고 있는 겁니다.”
“팀장님도...”
뒷정리가 끝날 때였다. 긴급출동 서비스 차량이 도착했다. 예정보다 10분 이상 늦은 시간이었다.
“아, 왜 이렇게 늦어요?”
여기저기 전화를 해대던 최현배가 조바심을 냈다.
“죄송합니다. 앞 쪽 고객님 차 타이어가 좀 구식이라서 시간이 지체 되었습니다.”
“교체하려면 얼마나 걸려요?”
“금방 됩니다.”
서비스 기사가 타이어를 내려놓았다. 그 사이에도 최현배는 계약자들과 통화하느라 바빴다.
“예, 죄송합니다. 이제 왔네요. 금방 가겠습니다. 예, 예...”
“사인 부탁드립니다.”
교체를 끝낸 서비스 기사가 출장용 PDA를 내밀었다. 대충 사인한 최현배, 서둘러 운전석 문을 열었다. 그의 핸드폰이 울린 건 그때였다.
“아, 김 사장님.”
최현배가 반가이 전화를 받는다.
“아, 예, 잔금 마련됐습니다. 제가 볼 일 좀 본 후에 바로 가서 치르겠습니다.”
여기까지는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다음 표정에서 대반전이 일어났다.
“뭐라고요?”
내쏘는 목소리가 조금 전과 달랐으니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최현배의 이마에 땀이 흘러내린다. 아찔한 귓전으로 상대방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죄송합니다. 어떤 비난을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김 사장님.”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번 계약 파기하겠습니다. 아는 사이에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날 최 사장님과 계약한 후에 중국 바이어가 장당 900원 딜을 해왔어요. 500만장을 달라고 현금을 들고 왔더군요. 그럼 45억원인데 최 사장님께 계약금 받은 거 위약금 100% 얻어드려도 30억 가까이 남습니다. 1-2억이라면 제가 상도의를 따라야하지만 30억입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이전 거래처와 선계약을 하는 바람에 마스크 공장들 다 한몫 잡을 때 몫돈 한 번 못 만졌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이 일에 대해 소송을 거셔도 할 말이 없겠습니다.”
“이, 이봐요. 김 사장님.”
“저도 마지막 기회입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이니 이만... 계약금과 위약금은 통장으로 반환해 드렸습니다.”
딸각!
“......”
전화가 끊겼다. 최현배는 핵탄두라도 얻어맞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9억...
300만개...
정신이 롤러코스트를 타고 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중국 큰손과의 시간약속에 조바심을 내던 상황... 이걸 발판으로 중국 쪽 물품거래를 본격 확충해보려던 야망...
탈탈탈탈.
“아저씨, 좀 비켜요.”
경운기가 다가오며 소리를 쳤다. 최현배의 정신은 그제야 머리 속으로 컴백했다.
황당이 아찔함으로 바뀌었다.
-만약, 타이어가 펑크 나지 않았더라면?
그 자신 읍내의 약속장소에서 중국 큰손 둘을 만났을 것이다. 그 두 곳에 150만장씩 공급 계약을 했을 것이다.
-그 계약서에 사인을 했더라면?
-그런 다음, 물품 공급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위약금이 10배였으니 수십억 원이 날아갈 판.
-그들과의 다른 물품거래도 끝장날 판.
-그동안 개척한 중국거래 라인을 통째로 잃어버렸을 일.
“......!”
최현배, 상상하는 사이에 피가 얼어붙고 말았다.
“오 주임.”
다리 풀린 그가 경도에게 다가왔다. 경도는 보았다. 그의 인당과 양 관골에 서리던 푸른 기색이 흐려지고 있는 걸. 금갑에 맺힌 붉은 반점도 싸목싸목 걷히고 있는 걸.
가만히 웃었다. 소리도 없고 표도 나지 않지만 압도적인 미소였다. 최현배는 홀린 사람처럼 경도 손을 잡았다. 그러나 차마 말도 하지 못한 채 오열할 뿐이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의 눈 안에 와글거리는 인사였다.
경도와 최현배가 이심전심의 공감을 나누는 사이, 또 한 사람의 표정이 불안에서 해방되고 있었다.
“후아우.”
사회복무요원 정우석이었다.
< 존재감 리뉴얼 중이에요-3 > 끝
ⓒ 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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