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로 먹으면 체해요-5 >
‘이 자식이 관상 좀 본다고 오냐오냐 해줬더니...’
창 앞의 엄 팀장 표정은 한껏 구겨져있었다. 어제 저녁 일은 다시 생각해도 혈압이 치솟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핸드폰까지 집어간 것이다. 집에 들어간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와이프 전화기로 걸어보았지만...
<전원이 꺼져있어...>
짜증스러운 멘트가 반복될 때 집 전화가 울렸다. 비상연락망으로 기재한 집 전화였다.
“핸드폰을 제 차에 놓고 내리셨네요. 내일 아침에 드리겠습니다.”
경도였다.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곰곰 씹어보니 구라다. 아무래도 경도가 슬쩍한 것이었다.
‘허어.’
분노의 한숨이 잇달아 밀려나왔다.
팀장 책상 위의 내선전화가 보였다. 곧 강 팀장의 전화가 올 것이다. 약속장소에서 보란 듯이 개무시를 먹이고 돌아왔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건 인간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경도 승진은커녕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 게 뻔했다.
‘대체 요즘 젊은 놈들은...’
팩트 체크에 들어간다. 상대는 인사팀장이었다. 직급 이상의 파워가 실린 직책이었다. 대부분의 인사초안이 그의 손을 거친다. 과장과 국장, 시장의 결재라인이 있다지만 명작에 밑그림 초빛이 중요하듯 인사에서는 초안이 중요했다.
그런 사람에게 빅엿을 먹였으니 홍 의원 끝발도 통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건 누가 들어도 똘아이 소리 들어 마땅할 치명적인 실수였다.
비상연락망을 뒤져 강 팀장의 번호를 찾았다. 그러나 걸 수가 없다. 책상 위의 관용 전화라면 다른 직원들이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센터 앞의 공중전화를 쓸 수도 없다. 하고 많은 전화를 두고 웬 공중전화? 누가 보면 오해하기 딱 맞을 일이었다.
‘아후.’
침이 바짝바짝 말라간다. 커피를 두 잔이나 비울 동안에도 경도는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 역시 불통이었다.
이유를 알았다.
“오 주임, 오전에 두 시간 연가 좀 올려달라던 데요?”
팀에서 2타로 출근 지문을 찍은 민지의 설명이었다.
이 자식.
‘어디 오기만 해봐라.’
엄 팀장은 벼르고 또 벼렸다. 이제는 관상의 도움 따위도 필요 없었다. 전처럼 무지막지하게 쪼아서 부셔놓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공주님 이은빛의 등장이다. 오늘도 화려하게 밀착된 원피스를 입고 왔다. 한 달에 옷 세 벌은 기본으로 사는 여자. 덕분에 보수적인 어르신들에게 복장 민원까지 사고 있지만 그녀는 남의 눈치 따위는 보지 않았다.
“저 왔습니다.”
사회복무요원 우석도 들어왔다. 가만 보면 출근도 나이순, 직급순이다. 나이가 많을수록 일찍 오고 적을수록 늦게 온다. 직급이 높을수록 일찍 오고 낮을수록 늦게 온다. 짜증이 나다보니 그런 것까지 열을 받는 엄 팀장이었다.
“별 일들 없지?”
읍장이 들어섰다.
아, 읍장은 예외다.
“예, 읍장님.”
엄 팀장은 구긴 표정을 펴고 읍장을 맞았다.
센터의 일상이 시작되었다. 자잘한 전자결재 몇 개가 떴지만 엄 팀장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책상의 전화기가 울렸다.
찌릉찌르릉.
간 떨어질 뻔 했다. 엄 팀장은 받지 않았다. 은빛이 돌아본다.
“팀장님.”
“이 주임이 받아봐. 혹시 시청 인사팀장이면 나 출장 갔다고 하고.”
“네에.”
은빛이 전화를 당겨받았다.
“감사담당관실이라는 데요?”
“감사실?”
“받아보세요.”
은빛이 다시 전화를 돌렸다.
‘감사실이 왜?’
짧은 시간 동안 엄 팀장의 뇌리에는 백만 가지 잡념이 스쳐갔다. 민원을 취하한 그 민원인이 다시 제기한 건가? 그도 아니면 기분 잡친 인사팀장이 라인을 동원해 다른 하자를 제공한 걸까?
이럴 줄 알았다.
공무원은 털면 나온다. 그 많은 업무처리 중에 법집행의 오류가 없을 리 없다. 엄 팀장 뇌리에 큰 건 하나가 스쳐갔다.
코로나 19 절정기 때였다. 시의 확진자는 둘이었다. 엄 팀장은 그 보고자료를 보았다. 하필 어머니 옆 아파트라 조심하라는 문자를 보냈었다.
담당자는 한 술 더 떴다. 친한 지인 몇 명에게 확진자 신상을 공개해버렸으니 그게 지역사회 SNS에 코로나 19보다 빨리 퍼진 것이다. 그 직원은 중징계를 먹었다. 큰 건 덕분에 엄 팀장의 정보누설은 묻혀갔다. 천만 다행이었다.
‘이제 와서 까발겨진 걸까?’
이래서 도둑은 제 발이 저리다. 소소한 것들이 새끼를 친다. 전임자의 실수에 덤터기를 썼던 건도 떠올랐고 관행에 따라 대충 처리한 업무들도 켕기기 시작했다.
“큼큼.”
헛기침으로 호흡을 고르고 전화를 받았다.
“맞춤형복지팀장 엄낙기입니다.”
“수고하십니다. 감사팀 조정만입니다.”
‘조정만?’
엄 팀장은 뜨끔했다. 그는 일반행정분야 감사를 맡고 있다. 말하자면 감사담당관실의 야전사령관이자 비리공직자의 저승사자라고 할 수 있었다.
“아이고, 웬일이십니까?”
최대한 침착한 척 응대를 했다.
“죄송합니다만 좀 들어와 주셔야겠습니다.”
“예? 무슨 일로?”
“들어와 보시면 압니다.”
딸깍!
전화가 끊겼다.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
엄 팀장의 사색은 진땀으로 변했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민지가 물었다.
“어? 어...”
“수화기는요?”
“어?”
그러고 보니 아직도 수화기를 들고 있다. 한 마디로 정신줄 나간 것이다.
<감사실 호출>
뭔가 제대로 걸렸다. 재빨리 시청 홈페이지를 열었다. 밤 사이에 올라온 10여 건의 민원제기 중에 엄 팀장과 관련된 것은 없었다. 그러나 민원의 통로는 인터넷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요로를 아는 사람은 청와대에 올리거나 국민신문고에 고발한다. 그도 아니면 시장이나 부시장을 찾아가 까발리는 사람도 있었다.
‘아, 이 씨...’
까맣게 타들어가는 속을 다스리며 전화를 걸었다. 감사실에서 회계분야를 맡고 있는 안지영 주임이었다. 사전 탐색을 할 생각이었지만 그녀의 핸드폰도 꺼져 있다. 내선으로 돌렸다.
“지금 회의 들어가셨습니다.”
말단서기보의 대답이었다.
지랄!
수화기를 놓는 눈에 경도의 빈자리가 보였다. 원망은 금세 아쉬움으로 바뀌었다. 경도가 있다면 신들린 관상으로 대비라도 하려만.
별 수 없이 상의를 챙겨 입었다.
바로 그때 시청에서 돌아온 행정팀장 곽판수가 빅 뉴스를 펼쳐놓았다.
“시청에 지금 난리 났습니다.”
“응?”
민원실의 직원들이 일제히 곽판수를 주목했다.
“인사팀장 있죠?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지난 인사 때 뒷구멍으로 단단히 챙겼다네요?”
“......?”
“지금 감사실 직원들 총동원되어서 관련자들 색출하느라 난리입니다. 최근에 개인적으로 만난 사람들 전부 조사하고 있대요.”
‘어억.’
엄 팀장의 머리 속에 천둥이 울렸다. 이제야 감사실에서 전화를 건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한 명은 1000을 줬다는 말도 있고 2000을 줬다는 말도 있는데 아무튼 제대로 걸린 것 같습니다.”
“개자식들, 다들 그짓이니 우리처럼 빽 없는 사람들이 여기로 밀려나지.”
민원 팀장 노원승의 피해의식이 폭발했다.
“제가 요로에 알아봤더니 엊그제 자치행정국 회식에서 말다툼이 났었나봅니다. 그 중 한 사람이 감사실에다 청탁자 파일을 보냈는데 감사실에서 극비에 확인해보니 인사팀장 비리가 사실로 드러났다네요. 보아하니 아래 위로 여럿 엮인 모양인데 인사팀장에게 선 댄 사람들 피바람 불게 생겼어요.”
“......!”
듣다보니 엄 팀장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어젯밤 일을 다시 감아보았다. 인사팀장을 만나기로 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주차장에서 잠깐보고 말았다. 만약 안으로 들어가 밥을 먹었다면, 그걸 다른 시청 직원들이 보기라도 했다면...
‘어어억!’
엄 팀장의 정신줄이 풀리며 벽을 짚고 말았다.
“왜 그러세요?”
곽판수가 물었다.
“아, 아닙니다.”
손을 저으며 책상으로 돌아오는 엄 팀장.
‘이것...’
다시 상황을 짚어본다. 인사팀장과 식사를 하지 않은 것,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 건만의 문제라면 감사실에 불려가도 할 말이 있었다.
“당신 어제 인사팀장 왜 만났어? 업무상 관련도 없는데?”
“음식점 앞에서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그것도 죕니까?”
모범답안이 나오자 불안이 가라앉았다. 그 여유 속으로 경도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어어억!’
이번에는 정신줄에 금이 갔다.
‘관상 귀신...’
등골이 녹아날 듯 오싹해졌다. 경도는 이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인사팀장의 얼굴을 보자마자 엄 팀장을 돌려세운 것이다. 그게 아니고는 그런 장면이 성립될 수 없었다.
거기까지 간 마당에 인사팀장을 적으로 만들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그러니까 경도는 인사팀장에게 닥친 횡액을 간파해낸 것이다.
‘이럴 수가...’
사지가 떨렸다. 그것까지 짚어내는 귀신 같은 상괘라니...
어어억.
**
엄 팀장의 상상은 모두 사실이었다.
감사실의 목적은 그것이었다. 인사팀장에게서 확보한 수첩에 저녁 약속장소가 적혔던 것. 확인 결과 저녁 약속은 성립되지 않은 것으로 나왔다.
“음식점 주차장에서 얼굴은 잠깐 봤습니다. 그것도 죄가 됩니까?”
엄 팀장은 노련했다. 음식점 주인도 알고 CCTV를 까도 증명될 일이니 보란 듯이 당당했다.
덕분에 바로 용의선상에서 해방되었다.
‘우어어.’
밖으로 나오니 천국이었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기분이 180도 바뀐 것이다.
‘오 주임 이 자식...’
치를 떨던 감정 또한 신뢰로 반전되었으니 한 마디로 예뻐서 미칠 것만 같았다.
< 날로 먹으면 체해요-5 > 끝
ⓒ 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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