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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로 먹으면 체해요-4 > (13/245)

< 날로 먹으면 체해요-4 >

“팀장님.”

센터가 가까워질 때 민지에게서 전화가 들어왔다.

“어, 배 주임.”

엄 팀장이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어디 계세요?”

“지금 들어가는 중인데? 왜? 무슨 일 있어?”

“용강리 이장님요, 또 와서 민원실 뒤집어놓고 있어요. 팀장님 데려오라고 난리인데 지금 흥분하셨으니까 좀 이따가 들어오시는 게 좋겠어요.”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데?”

“긴급 복지 말이에요. 지난번에 수혜자 선정하면서 왜 자기 의견 묻지 않았냐고요. 그중 일부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펄펄 뛰시네요.”

“그 양반, 또 낮술했어?”

“조금 마신 것 같아요.”

“허얼.”

엄 팀장은 난감했다. 용강리 이장 역시 진상 민원 톱 10 안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우석 씨가 자기 보고 인사도 안 하고 비웃었다고 생트집까지 잡으면서...”

“알았어. 조금 있다 갈 테니까 그 양반 가면...?”

대답하던 엄 팀장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경도의 눈총 때문이었다.

“됐어. 내가 해결해야지. 곧 도착이야.”

엄 팀장이 전화를 끊었다. 굳었던 경도 얼굴이 그제야 조금 펴졌다. 행정오류나 개인의 실수는 공무원 개인이 해결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민원인들의 생떼는 간부들이 나서는 게 바람직하다. 민원인들은 말단 공무원들보다 간부들의 응대에 더 만족하는 경향이 있었다.

“험험.”

주차장에 내린 엄 팀장이 호흡을 골랐다. 지금껏 아랫 사람들에게 떠맡기던 민원 트러블. 직접 해결하려니 긴장이 되는 것이다.

“도움말 하나 드려요?”

뒷전의 경도가 슬쩍 여운을 흘렸다.

“있어?”

“전혁근 이장님 미간이 좁고 코가 짧았죠?”

“그랬지.”

“거기에 콧대도 죽고 비공이 작으니 성질은 급하지만 사실은 심약한 사람입니다. 팀장님이 저 잡듯이 무대뽀로 밀어버리면 기가 죽어서 다시는 진상 노릇하지 않을 겁니다. 아직 임자 못 만나서 저러는 거거든요.”

“엥? 그랬다가 시장님 찾아가면 어쩌게? 그 양반이 시장님 초등학교 동창에 이장단 총무야.”

“팀장님 면 한 번 세워드리려는 건데 저 못 믿으세요?”

그 말이 엄 팀장의 등을 밀었다. 엄 팀장은 반박할 구석이 없었다.

후우.

문 앞에서 심호흡을 내쉰 엄 팀장이 센터 문을 열었다. 잠시 경도를 돌아본다. 경도가 끄덕 신호를 보냈다. 엄 팀장이 문 안으로 사라졌다.

“팀장님...”

민지가 다가오자 그 등 너머에서 천둥이 울렸다.

“엄 팀자앙!”

칠순을 지났지만 전택근 이장의 목소리는 화통이다. 이장단의 총무까지 역임 중이니 과장이고 읍장이고 가리지 않았다. 

“아이고, 우리 이장님 오셨네?”

엄 팀장은 노련미로 응수했다.

“인희 씨, 카라멜 마끼야또 한 잔, 특별히 달달하게.”

커피점으로 간 경도는 카라멜 마끼야또를 주문했다.

“누구 주려고요?”

인희가 물었다. 경도의 취향을 알기 때문이었다. 

“우리 공익 우석 씨.”

공익은 사회복무요원들의 전 명칭이다. 사실 아직도 사회복무요원이라는 말보다는 공익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고 경도도 더러 그 말이 먼저 나오는 경우가 있었다.

“또 깨졌어요?”

“그런 거 같아서.”

“아오, 여기 민원인들은 왜 그런데요? 우리 가게도 개진상 손님 많아서 죽겠어요.”

“그래도 파이팅.”

“네, 옵빠도요.”

인희의 응원을 받으며 돌아왔다. 카라멜 마끼야또는 우석의 앞에 슬며시 놓아주었다. 이 친구들 신세도 관상 이전의 경도와 다르지 않았다. 뺀질거리면 뺀질거린다고 비난하고 좀 착실하면 온갖 것을 부려먹는다. 우석은 후자였기에 마음이 짠했다.

“오 주임은 천사표라니까.”

책상 앞에 앉자 민지가 웃었다.

“이 주임님은요?”

“긴급 대피 중?”

민지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약아빠진 이은빛이었으니 어디론가 피신한 모양이었다.

“오 주임.”

“예?”

“관상 잘 보잖아? 저 이장님 관상은 어때? 무슨 방법 없어?”

“팀장님이 고쳐주실 겁니다.”

“우리 팀장님?”

“네.”

“팀장님이 다른 시청으로 가는 걸 바라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한 번 지켜보세요.”

경도는 느긋했다.

“당신 말이야, 대체 직원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고 있는 거야?”

전 이장이 엄 팀장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이장을 핫바지로 알아? 여기 우리 리 사정을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어? 지들 아쉬울 때는 이장님, 이장님 하면서 업무협조 외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지들 마음대로 해?”

“이장님.”

“시끄러워. 내가 김경동이 찾아가? 읍사무소 한 번 제대로 뒤집어줘.”

“......”

“공무를 이 따위로 보니까 군대도 못 간 공익들조차 민원인을 우습게 보잖아? 그래, 안 그래?”

“제 불찰입니다. 그래도 민원인들이 많이 계시니 조용한 데로 가시죠.”

“조용한 데로 가면 이 따위 작태가 해결이 되냐고?”

“아무튼...”

엄 팀장이 이장을 일으켜 세웠다. 

회의실로 들어간 엄 팀장은 눈 딱 감고 핸드폰 음악부터 틀었다. 최대 볼륨이었다. 그런 다음 이장을 향해 돌아섰다.

“뭐하시는 거지?”

회의실을 바라보는 민지의 목이 한껏 늘어났다.

“잘 해결 하실 거라니까요.”

“오 주임...”

“커피 내기할래요?”

“콜. 저 이장님 기세는 우리 읍장님도 못 꺾으니까.”

민지가 딜을 받았다.

엄 팀장과 이장이 나온 건 10여 분 후였다.

“......?”

그걸 보던 민지가 얼음장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오 주임...”

목소리까지 떨린다. 두 사람의 풍경 때문이었다. 분위기가 완전 반전이었다. 앞서 나온 엄 팀장은 호랑이의 기세였고 이장은 꼬리 잘린 여우의 모습이었다. 경도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돌연한 풍경에 민원실 직원들도 할 말을 잃었다. 무대뽀 전 이장의 기가 죽은 것도 놀라웠지만 그 대첩을 이룩한 게 엄 팀장이라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험험.”

헛기침으로 어깨에 힘을 주는 엄 팀장에게 경도가 눈짓으로 우석을 가리켰다. 엄 팀장은 그 눈빛을 알았다.

“우리 공익도 쥐잡듯 볶았다면서 사과하고 가세요, 이장님.”

엄 팀장이 주의를 환기 시켰다. 다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시장 동창이라며 안하무인이던 전혁근 이장. 과연 새파란 사회복무요원에게 사과를 할 것인가?

그런데...

“미안하네.”

퉁명스럽지만 진짜 사과가 나왔다.

“어억.”

몇몇 직원들이 뒷목을 잡는다.

“그럼 가보세요. 다음부터는 사소한 주민복지도 이장님 의견부터 듣도록 지시하겠습니다.”

“그러시오, 큼큼.”

이장은 멋쩍은 기침을 끝으로 민원실을 나갔다.

“뭘 봐요? 다들 업무하지 않고.”

경도에게 윙크를 날린 엄 팀장이 위세를 뿜었다. 다른 날 같으면 비웃음으로 외면했을 민원실 직원들, 오늘만은 엄 팀장을 다시 보게 되었다.

“커피는 오후 3시 쯤 쏘세요. 배 주임님.”

경도가 민지에게 쐐기를 박았다.

“그 커피 내가 쏘지.”

엄 팀장이 가로채기에 나섰다.

“정말요?”

민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왜? 싫어?”

“아, 아뇨. 열렬하게 환영이에요.”

“저는 녹차플래치노요.”

어느새 자리로 돌아온 은빛이 먼저 손을 들었다. 저러니 저 세련된 용모로도 밉상이 되는 것이다.

“좋아. 오 주임하고 배 주임은?”

엄 팀장이 친히 오더까지 받았다.

“우리 팀장님 맞아요?”

은빛이 민지에게 밀착하며 속삭인다.

“자기는 바빠서 못 봤구나? 우리 팀장님 카리스마.”

민지가 슬쩍 은빛의 염장을 질렀다.

“웬 카리스마요? 꼰대쓰마라면 몰라도...”

“오늘은 다르셨어. 저 설레발 용강리 이장님이 찍 소리도 못하고 돌아갔잖아?”

“진짜예요?”

“그러게 자리 좀 지켜. 툭하면 투명인간처럼 사라졌다 등장하지 말고.”

“쳇, 물품정리한 거잖아요. 일 바쁜 건 모르시고...”

은빛이 볼멘소리를 냈다. 하지만 커피가 오니 바로 표정이 풀린다.

“아오, 내 쏴뢍 녹차플래치노.”

어떻게 보면 은빛은 엄 팀장보다 레벨이 높았다. 불리할 때는 팀장이나 팀원을 팔며 피하고 유리할 때는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외모는 사이즈 좋고 세련미를 풍긴다. 그렇기에 엄 팀장과 현 주임도 미인계에 녹아 얌체짓을 묵인해주고 있었다.

“최고였네. 고마워.”

퇴근 길, 차 안에서 엄 팀장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차는 경도의 것이었다. 술을 마시게 될 것 같으니 경도 편에 붙은 엄 팀장이었다.

“제가 고맙죠. 믿어주셔서...”

“솔직히 그 이장 성질머리 아니까 좀 켕기긴했네만 오 주임 관상이야 이제 공인 영빨이니까.”

“커피 고마웠습니다.”

“뭘... 그 기분도 괜찮던데?”

“그럼 종종 좀 부탁합니다. 팀장님은 베푸셔야 앞길이 열릴 운이기도 하고요.”

“그래? 그럼 자주 쏴야겠군.”

“인사팀장님에게는 어떤 옵션을 거셨습니까? 미리 알아야 팀장님과 보조를 맞추죠.”

“관상 얘기는 운으로 띄워놓았네.”

“그분도 승진 생각하겠죠?”

“당연하지. 아흔 아홉 석 가진 놈이 한 석 가진 거 뺏는다고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을 걸세.”

“그럼 관운 살짝 짚어주는 것으로 끝낼 테니 그리 아십시오.”

“그러시게. 오늘은 오 주임이 갑이야. 난 장단만 맞출 걸세.”

약속장소 앞에서 차가 멈췄다. 인사팀장은 아직 도착 전이었다. 그래도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저기 오는군.”

엄 팀장이 고개를 들었다.

“혹시 좀 싫은 말이 나오더라도 참으시게. 꼴에 잘 나가는 인사팀장이라고 목에 힘을 줄지도 모르니까.”

“저 어린애 아닙니다.”

“알아. 하지만 6급 쯤 되면 9급들이 다 어린애로 보이거든.”

“......”

“제가 좀 늦었습니다.”

인사팀장의 차 문이 열렸다.

“괜찮아. 우리도 금방 왔거든.”

엄 팀장이 인사팀장을 맞을 때였다. 고개를 든 인사팀장의 얼굴이 경도 시야로 들어왔다.

‘윽!’

경도가 벼락을 맞은 듯 경기를 했다.

“자, 들어가지.”

인사팀장을 영접(?)하는 엄 팀장을 뒤에서 잡았다.

“왜?”

“잠깐만요.”

그대로 엄 팀장을 당겨 조수석에 밀어넣었다.

“왜 이래?”

엄 팀장이 묻는 사이에 경도의 차량은 이미 주차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음식점 입구에 선 인사팀장 얼굴에 황혼이 한 줌 떨어졌다. 거기에 황당함과 분노가 더해지니 용암이 끓는 것 같았다.

~저나 와쪄염. ~저나 받으세염.

엄 팀장 핸드폰이 울렸다.

“강 팀장이야.”

“받으면 안 됩니다.”

경도가 엄 팀장 핸드폰 화면을 손으로 막았다.

“오 주임, 대체 왜 이래?”

엄 팀장이 발끈하지만 경도는 대꾸 하지 않았다. 그러다 먼 신호 앞에서 차가 멈춘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오늘 약속은 없었던 것으로 하십시오.”

일방적인, 그러나 뼈를 치는 묵직한 울림이었다.

< 날로 먹으면 체해요-4 > 끝

ⓒ 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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