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결말
“꺄아아아악!”
“누가 좀 살려 주십시오!”
왕궁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왕실기사들은 그 비명이 들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사람들이 죽인 왕궁의 시녀, 시종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소리에 마침 야근 중이던 왕실 기사 단장이 기사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시체가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침입자를 떠올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당장 불손한 무리를 처리하고 살아남은 것들에게서는 그 배후를 알아내라!”
“알겠습니다!”
어떤 무리와 마주치게 되었다.
복면을 한 이들이었다.
싸움은 치열하다면 치열하고 아니라면 아니었다.
“빨리! 빨리! 빨리! 죽여!”
“죽어! 죽어! 죽으라고!”
그들은 광기에 매몰되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왕궁기사단은 왕국을 대표할 만한 실력자들이 있는 집단이었다.
정신줄을 놓은 놈들에게 당할 사람은 없었다.
기사단장이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자 부하에게 물었다.
“살아남은 놈들은?”
“일단 잡아놓기는 했으나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
“왕궁을 습격할 만한 자들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기사단장은 살아남은 놈들에게 다가갔다.
“죽이면 그것을 준다고 했어!”
“죽여야 해! 어서 그것을 받아야 한다고!”
그들은 자신들이 죽을 목숨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것’을 찾아댔다.
그 모습만 봐도 그들은 왕궁을 습격할 만한 명분이 없는 이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것?”
“아무래도 마약인 것 같습니다.”
“마약? 약쟁이들이 어떻게 왕궁에 들어와!”
저런 작자들이 왕궁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은 왕궁이 안전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동시에 그것을 획책한 배후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글쎄요.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온화하고 기품이 있는 목소리였다.
기사단장은 그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페루제 공작부인과 그녀를 따르는 귀족들이 기사들을 데리고 왕궁에 들어왔다.
“미리 하나씩 하나씩 창고 같은 곳에 모아두고 있다가 풀어놓으면 되니까요.”
이 어마어마한 일의 배후로 추정되는 인물의 등장이었다.
“자신이 했다고 자백하는 것입니까?”
“하지도 않은 일을 자백할 수는 없지요. 억울하잖아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렸는데 참으로 능청스러웠다.
기사단장은 긴장했다.
많은 귀족과 병사가 왕궁에 왔다.
국왕께서 허락하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국왕께서 없을 시에는 그 다음 위치에 있는 왕족이…….’
기사단장의 눈이 크게 떠졌다.
“폐하를 시해한 죄인인 그대에게 그런 말을 듣는 것도 웃기고.”
이 여인이 자신의 주군이자 이 왕국의 왕을 죽였다.
왕비와 한편이니 왕비가 그들이 궁 안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 것이 분명했다.
“당장 역도들을 쳐라!”
“치우렴.”
죽은 국왕을 따르는 왕실기사단과 그녀를 따르는 이들 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우당탕!
잠을 자고 있던 태자는 무언가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태자 전하!”
왕실기사가 허락도 없이 태자의 방에 들어왔으나 뭐라고 할 수 없었다.
그 기사의 갑옷은 피로 더럽혀져 있었으니까.
“당장 피신하셔야 합니다!”
“피, 피신이라니?!”
몸이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어떤 일이 벌어졌고 그것은 아주 큰 비극이리라.
태자는 그것만 알아차렸다.
그는 대충 걸칠 만한 옷을 입고 밖으로 나섰다.
태자는 기사를 따라가면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왕실기사가 침울하면서도 참담함을 감추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반역입니다. 궁이 역도들의 손에 들어갈 듯합니다.”
“아바마마가 계시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바마마가 정정하시거늘 어찌 반역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시해당하셨습니다…….”
“시, 시해라니!”
태자는 바보가 아니었다.
어마마마와 메디치 백작이 정치적 동반자와 같음을 알았다.
‘아바마마를 죽일 만큼 권력을 원하신 것입니까! 어마마마!’
“먼저 대비마마의 궁으로 가자.”
“도망가야 합니다!”
“대비마마가 돌아가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돌아가신 분의 물품이 있는 곳이니 함부로 건들지 못할 것이야.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따르던 친왕파 귀족들에게 전령을 보내야 한다.”
태자는 말하면서 태자의 전서임을 증명할 직인도장을 품에서 꺼내 보였다.
기사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직 전령들까지 통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빨리 보내시고 피신하시지요.”
“고맙네.”
그들은 왕실기사단과 메디치 백작 측이 싸우고 있는 틈에 얼른 보내고 도망가야 했다.
* * *
태자의 전서를 가지고 전령은 달리고 또 달렸다.
쉴 틈도 없이 달렸다.
무조건 왕비마마의 전령보다 먼저 도착해야 했다.
다행히도 벨로나 공작의 군대는 몬스터 토벌 중이었다.
수도로 갈 준비를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왕비의 전령보다 먼저 도착한 것이 분명하다.
이 지역 토박이라서 지름길을 아는 것이 한몫했다.
전령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진지로 다가가는데 병사들이 경계했다.
비가 강하게 와서 누가 다가오는지 알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누구냐!”
“왕궁의 전령입니다! 벨로나 공작을 만나 뵙게 해주십시오!”
다행히 막사에서 벨로나 공작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책상에서 일어나서 전령이 다가갔다.
전령이 가진 전서를 받아들고는 확인했다.
천천히 그 전서를 읽었다.
벨로나 공작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 내용이 사실인가?”
“모반입니다. 폐하께서는 시해되셨고 갑자기 메디치 백작과 그 무리가 왕궁을 점거했습니다.”
“그렇군.”
전령은 마음이 급하여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것만은 알았다.
모반 소식에서 무덤덤한 벨로나 공작의 태도는 명백히 이상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뭔가 불안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각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서 수도로 군을 이끌고 가야 합니다.”
“군을 이끌고 가야지.”
벨로나 공작이 말하면서 전서를 태워 버렸다.
그 행동에 전령은 놀라고 말았다.
생각도 못한 모습이었으니까.
“각하,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전령의 외침에도 그는 느긋해 보였다.
“가기는 할 것인데 내가 기다리는 것은 따로 있거든.”
‘기다리는 것?’
전령은 도대체 그가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벨로나 공작은 몬스터들로부터 백성을 지켜주는 영웅이자 알펜 왕실의 충신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국왕폐하를 위해 헌신했던 인물이었다.
혼란스러움에 몸이 굳어 버렸다.
“전령이 왔습니다!”
그가 아닌 다른 전령이 들어왔다.
“페하! 모반입니다. 국왕 폐하께서 시해당하시고 사특한 무리가 왕궁을 점거하였습니다. 왕궁 내에 이에 동조한 무리가 상당합니다.”
“알았다.”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하기 어려웠다.
벨로나 공작이 기다리던 것은 바로 왕비가 보낸 전서였다.
이는 그가 메디치 백작과 손을 잡았다는 뜻이었다.
“어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각하가 이러실 수 있습니까?”
“먼저 나를 버린 것은 선왕 폐하셨다. 누구 덕분에 그 자리에 있는지 잊은 배은망덕한 사람을 계속 따를 이유는 없지.”
충격적인 사실에 전령은 막사에 기사들이 들어온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벨로나 공작이 눈짓했다.
“커헉!”
전령은 그 기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숲에다가 버려라. 몬스터들이 알아서 먹어주겠지.”
“네.”
“태자 전하께서 왕궁을 빠져나와서 호구니라 후작가문으로 향하셨다. 태자 전하를 찾는 즉시 편하게 해드리거라.”
“네.”
친우였고 주군이었던 국왕의 아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서슴없이 내렸다.
태자는 이제 그에게 가치가 있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죽어 버린 전령을 뒤로 하고는 벨로나 공작은 막사를 나왔다.
그리고는 말을 타고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왕실을 위협하는 불손한 무리가 왕궁에 있다! 당장 돌아간다!”
“네!”
병사들은 이미 수도로 갈 것을 아는 것처럼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 * *
왕실기사단은 의외로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녀와 그녀를 따르는 이들만 아니라 벨로나 공작을 따르는 귀족들까지 합세했기 때문이다.
벨로나 공작과 그녀가 손을 잡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연회장에 있었다.
수많은 귀족과 기사들이 서서 그녀에게 길을 내줬다.
그 중앙에는 죽은 왕이 누워 있는 관이 있었다.
그녀는 슬쩍 그 관을 보고는 앞으로 걸었다.
왕이 앉는 의자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국왕이 허락하면 발을 밟아서는 아니 될 길이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그녀를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오만하게도 국왕이 아닌 그녀는 왕좌에 앉고야 말았다.
다리를 꼬고 기사들과 귀족들을 내려다봤다.
처음부터 왕좌가 그녀의 자리였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이제부터 앞으로의 일을 논의해 보지.”
“네.”
왕국의 권력이 완전히 귀족들의 손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벨로나 공작과 메디치 백작의 손에 말이다.
짧으면 짧고 길면 긴 시간이 지났다.
“얼추 앞으로의 행보는 정해졌군.”
“맞습니다. 그런데 이대로 둘째 왕자님을 왕으로 옹립해도 되는지요?”
한 귀족이 우려되는 일에 관해 질문하지만 않았다면 깔끔하게 끝났을 것이다.
그녀가 심기가 불편한 듯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가 내렸다.
왕궁에 있는 귀족들은 모두가 한통속이었다.
그리고 곧 왕국의 모든 귀족이 한통속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반대하는 이들은 모조리 숙청당할 것이니까.
반역이라는 명분으로 말이다.
“태자라고 한들 아무도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을 알지 않나.”
“죄, 죄송합니다.”
“되었네. 사람이 실수도 할 있으니까.”
그녀가 왕이 있는 관을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태자의 편에 서려는 것들은 그이가 나타나면 수그러들 것이야. 그러니 신경 쓰지 말게. 그리고 잠시 나가 있었으면 하네.”
“물론입니다!”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지요.”
국왕이 죽었는데 이렇게 홀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아무도 그것에 관해서 뭐라고 하지 않았다.
적어도 왕실은 권력이 없음을 알게 해줬다.
“폐하, 그것을 아십니까? 폐하는 처음부터 제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이에게 의지하고 라보 공작에게 의지하여 친왕파를 이끄셨던 분이 저를 이길 리가요. 제 남편을 이길 리가요.”
부부는 하루 만에 알펜 왕국을 구한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의 반열에 올랐다.
왕비는 자신이 선왕을 죽였기에 그들의 눈치를 볼 것이고, 새로운 국왕은 자신도 선왕처럼 될까봐 그들에게 기꺼이 고개를 숙일 것이다.
하룻밤의 선택으로 그들은 국왕보다 위에 있는 존재로 올라섰다.
“부부가 힘을 합치니 한 왕국을 가지게 되었지 않습니까? 당신이 얼마나 무능하면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그녀가 관 주위를 걸었다.
그러면서 미소를 지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는 폐하가 빅토르를 죽이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미안해하는 듯한 말투였다.
“물론 처음에는 몰랐지요. 이성을 잃었으니까. 그러다가 점점 이성이 돌아오고 깨달았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녀는 마치 국왕이 살아 있는 것처럼 굴었다.
“폐하가 빅토르를 죽여 봤자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를 죽이려고 드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저를 죽일 확률보다 실패할 확률이 높은데 폐하께서 그 위험을 감수할 리가 없죠. 페하는 그 정도 위험조차 감수할 과감성이 없으니까요.”
그녀가 몸을 돌려서 반대 방향으로 관 주변을 돌았다.
그러면서 시선은 죽은 국왕에게 향해 있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폐하가 아니면 누굴까? 답이 나오더군요.”
아름답게 웃던 눈이 점점 일그러졌다.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났고 분통이 터졌다.
“제 아들이었습니다. 제가 라스타 왕국으로 떠나면 가장 손해를 볼 사람. 지금 가진 것들을 내놓아야 할지 모를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저를 붙잡기 위해서 빅토르를 죽였겠죠.”
방치와 학대에서 구해 준 은혜도 모르고 나댔다.
그녀의 순수성을 유일하게 알던 벗을 죽였다.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야 속이 풀릴 것이다.
“나중이라도 진실을 알았으나 저는 폐하를 적대했습니다. 빅토르의 복수보다 왕국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컸거든요.”
그녀가 다시 아름답게 웃었다.
방금 전의 일그러짐이 거짓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란델리노에게 빅토르를 죽인 대가를 받아낼 것입니다. 가장 안심하고 있고 희망에 가득 차 있을 때에 가장 큰 비참함과 굴욕을 선사해 줄 것이에요.”
그녀는 알펜 왕국을 손아귀에 쥐었다.
이를 위해서 빅토르의 죽음을 이용했다.
죽어서도 자신을 위해서 이용당한 빅토르를 위해서라도 란델리노에게 복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짐을 마친 그녀는 당당하게 혼자서 홀을 나가 버렸다.
<굴복하거나, 죽거나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