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가짜 죄인
‘나뿐만 아니라 내 아들들 그리고 가문까지 죽게 될 일이야. 어떻게 해야 이 악몽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지?’
국왕을 죽인 여인의 아들을 다음 대 왕으로 세울 리 없었다.
왕을 시해한 여인의 가문을 그대로 둘리 없었다.
단두대에 목을 댄듯한 섬뜩함에 목을 만졌다.
그리고는 일어나려고 하다가 다리 힘이 빠져서 넘어지고 말았다.
퍽!
쨍그랑!
그러면서 주변에 있던 도자기가 깨져버렸다.
똑. 똑. 똑.
노크 소리와 함께.
“폐하, 왕비마마! 괜찮으십니까?”
왕실기사단의 부단장이 수상한 소리에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들어오지 말라고 소리칠 틈도 없었다.
부단장은 자신 앞에 보인 광경에 멈칫했다.
살해당한 국왕과 살해한 도구로 추정되는 칼을 쥐고 있는 왕비를 본다면 누구라도 충격에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 그게 말이네. 내가, 내가 그런 것이 아니라…….”
왕비가 자신이 쥐고 있던 칼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그러면서 주저앉아 있는 자신의 다리에 힘을 주지 못했다.
그가 빠르게 다가왔다.
왕비가 눈을 질끔 감았다.
다 끝났다.
자신의 삶도, 아이들의 삶도, 가문의 삶도 말이다.
그런데 어깨에 무언가가 올려졌다.
그녀가 당혹스러워하며 눈을 떴다.
“어?”
“왕비마마, 일단 진정하시고 저기 소파에 앉으시지요. 계속 앉아 있기에는 바닥이 찹니다.”
그는 왕비를 일으켜 세우며 소파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담담하게 왕비를 안정시켜주려고 했다.
‘왜?’
누가 보아도 국왕을 죽인 시해범은 왕비였다.
당장 끌고 가도 이해가 될 상황인데 왜 그는 이 일을 알리지 않는 것인가?
“지금 이대로 있다가는 왕비님의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지 빨리 생각해야 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자신을 감싸주려고 하지?
그녀를 끌고 가면 큰 공적을 세운 것이니 그만한 포상을 받을 것인데…….
그가 왕비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웃었다.
“연모하는 분을 지켜드리지도 못했는데 죽도록 둘 수는 없습니다.”
“아…….”
왕비의 얼굴이 붉어졌다.
상대가 자신에게 진실된 상대인지는 자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 알게 된다.
평소에 달콤한 과일처럼 굴던 사람들도 그 사람이 낭떠러지 끝에 있으면 외면했으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부단장은 자신의 목숨을 걸 정도로 왕비를 사모하고 있었다.
진실된 연정을 확인했으니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설령 목숨이 위태롭다고 할지라도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일단 벨로나 공작각하와 메디치 백작각하에게 파발을 보내시지요.”
“벨로나 공작에게? 그는 폐하의 사람이야.”
붉어졌던 왕비의 뺨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이해가 되었으나 벨로나 공작은 아니었다.
벨로나 공작은 죽은 왕의 사람.
평소에 사이가 나빴던 것을 감안하면 왕궁을 장악하고 진위파악을 하려고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사형을 당하겠지.
벨로나 공작과 메디치 백작이 손을 잡았다는 것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폐하께서 시해 당했음을 솔직하게 쓰시지요.”
“그러면 조사에 들어가게 될 것인데?”
“몇 년 전에 폐하께서 쫓아내신 정부가 있지 않습니까? 가문도 몰락하게 되었고요.”
“폐하에게 버려진 원한으로 일을 저질렀다?”
“동기는 충분하고 폐하께서 총기를 잃으셔서 왕국 내에 있는 비밀통로를 알려줬다고 하면 됩니다.”
왕궁 내에 왕족만 쓸 수 있는 비밀통로가 있다는 이야기는 어느 왕국에나 있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진실이라며 주장한다고 하여 확인이 필요하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설령 있다고 할지라도 괜찮았다.
그 통로의 존재유무를 확인해달라고 해도 왕족의 안위를 위해서 존재하기에 알려줄 수 없다면 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지만 왕비궁 안에 있던 기사, 병사, 시종, 시녀들까지 수상한 행적이 없음을 알고 있어.”
“그러니까 메디치 백작각하께는 ‘모든 진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해야겠지요.”
왕비의 머리에는 그녀가 진실을 알고 그것을 명분으로 왕비를 쳐낼 수 있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을 위해 준 고마운 사람이었으니까.
“알겠네. 당장 쓰도록 하겠네.”
“벨로나 공작각하께는 전령을 보내서 서신을 전달하면 될 것이고 메디치 백작각하께는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누구도 여기에 들어오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물론이네.”
왕비는 비밀리에 전령을 벨로나 공작에게 보냈다.
그와 동시에 왕실기사단 부단장은 말을 타고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달려갔다.
벨로나 가문의 저택에는 금방 도착했다.
왕궁과 가까운 곳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가 달려오자 아무런 제재도 없이 문지기들이 그를 들여보냈다는 사실이다.
그는 시녀의 안내를 받아서 페루제 공작부인에 앞에 섰다.
“네가 온 것을 보니 잘 처리된 모양이구나.”
“네. 이제 움직이시면 될 듯합니다.”
그녀는 왕비의 편지를 읽지 않았다.
왕비가 국왕을 죽이고 벼랑 끝에 몰리게 만든 당사자였으니까.
지금 왕비는 그녀의 손아귀에 있었다.
“나는 어느 정도 준비가 되면 바로 왕궁으로 가겠다. 너는 왕비궁의 아이들에게 움직이라고 했겠지?”
“왕궁 밖으로 나오기 전에 말해놨습니다.”
“그 유약한 왕비께서 기절하기 전에 얼른 돌아가거라.”
“알겠습니다.”
왕비궁 안에서는 소수의 시녀, 시종이 은밀히 움직였다.
그들은 다른 동료들이 머무는 침실로 들어갔다.
한 시녀가 곤히 잠들고 있는 동료를 보고 혼잣말했다.
“오늘 저녁식사에 특별한 약이 들어 있거든.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는 약이야. 이 약을 먹고 잠이 들면 일어나고 싶어도 몸을 일으키지 못해.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잠만 자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지. 독이 아닌 것이 고대에는 이 약을 먹이고 수술을 했다고 하니까.”
그녀가 품안에 있던 단검을 꺼내들었다.
“그러니까 아프지 않을 거란 말이야. 그래도 최대한 빨리 끝내줄게.”
퍽!
몇 시간 전까지 웃고 떠들던 동료의 심장에 거리낌 없이 단검을 찔렀다.
그 어떤 비명도, 일그러짐도 없이 시녀는 죽었다.
죽은 시녀의 몸을 긴 장검으로 난도질했다.
그녀가 방에서 나오자 다른 시녀들이 각자 다른 방에서 나왔다.
시종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약효는?”
“그분이 하신 일이잖아. 완벽해.”
“다행이군. 어서 처리하고 시신을 왕비궁 안에 놓아야 한다.”
최대한 빨리 죽이고 왕비궁이 의문의 적들에게 당한 것처럼 해야 했다.
“사인은 각각 다르게 하고 있지?”
“적당히 섞고 있으니까 걱정하지마.”
그래야 원한을 품은 정부와 그녀를 도운 의문의 세력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 죽이는 것은 금방이지만, 문제는 옮기는 것이지. 도와줄까?”
“아니.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이 가장 좋아. 정 어려우면 왕비궁의 기사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될 일이고.”
왕비궁을 담당하는 기사들은 부단장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왕실기사단 부단장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사람이었다.
그들이 이 일을 묵인하고 외면하고 있기에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다.
“그건 그렇지. 알았어. 그리고 이따가 시간이 되면 왕궁 내 숙소는 내가 불태울게.”
“알았다.”
그들은 각자의 할 일을 위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왕실기사단 부단장은 왕비에게 돌아왔다.
자신을 외면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뭐라고 하던가?”
“메디치 각하께서 수도 내에 있는 기사와 병사를 모으고 계십니다. 그들과 함께 왕궁으로 오실 것입니다.”
“기사와 병사를?”
“네. 그분을 따르는 가문의 이들이 함께할 것입니다.”
“그, 그것은 반역이 아닌가?”
왕궁 안에 출입허가가 나지 않은 병사와 기사를 모아서 온다?
왕궁을 점거하겠다는 뜻이고 이는 반역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친구인 자신을 위해 반역을 하려고 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지만 그리해도 될까?
차라리 아이들과 가문만 살릴 길을 찾는 것이 낫지 않을까?
불안감과 죄책감이 엄습했다.
그러자 부단장이 다정하게 왕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왕비마마. 국왕폐하께서 시해당하셨습니다. 누군가는 그 책임을 져야 하고요. 그리고 저는 그 누군가가 마마가 아니기를 빌 뿐입니다.”
“아…….”
자신을 사랑하여 목숨을 건 사내 앞에서 할 생각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녀만 죽고 끝낼 방법 따위는 처음부터 없는 상황이었다.
왕비는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을 무시하고 정부 따위와 놀아나던 남편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기는 싫었다.
반드시 위기를 이겨내고 모든 것을 누릴 것이다.
“그리고 마마께서 쫓겨난 정부와 그녀를 따르는 무리로 인해 왕궁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음을 빨리 믿을 만한 귀족들에게 보내시지요. 어서 역도들을 처리하라고요.”
“알았네.”
왕비가 믿을 만한 귀족들은 전부 페루제 공작부인을 따르는 귀족들이었다.
이 일이 잘 해결이 되면 그녀와 그녀의 사람들은 공신이 될 것이고 이에 따른 대우와 권리를 하사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을 위해서 벨로나 공작각하를 따르는 친왕파 귀족들도 넣죠.”
“배제하는 것이 낫지 않나? 그들이 의혹을 제기하면?”
“왕비마마께서 원하는 이들만 공신이 된다면 백성들이 불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왕비가 말을 흐렸다.
친왕파 귀족들의 수장인 벨로나 공작을 이 일에 끌어들인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눈치였다.
그들은 페루제 공작부인과 적대하는 세력이었고 이는 곧 왕비와도 척을 진 것과 같았다.
그들이 공신이 된다는 것은 그들의 힘이 강해진다는 것이기도 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힘이 강해져도 상대도 강해져서 비등해지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가 왕비를 토닥였다.
“벨로나 공작각하께서는 서로 대립하면 알펜 왕국이 분열되고 위험해진다는 것을 모를 분이 아닙니다.”
알펜 왕국의 미래를 위해서 벨로나 공작은 의심을 삼키고 넘길 것이라는 뜻이었다.
“또한 넓은 아량으로 대립했던 세력을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신다면 백성들도 안심할 것이고요.”
“그녀도 그 생각에 동의할까?”
“그분의 생각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겠지.”
페루제 공작부인의 생각이라고 말하자마자 왕비의 얼굴에서 불안은 사라져버렸다.
국왕을 죽인 상황에서도 그녀라면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줬다.
“꺄아아악!”
방 밖에서 비명이 들렸다.
“뭐, 뭐지?”
“여기는 안전하니 안심하십시오. 정부와 함께 들어온 무리를 만들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왕실기사단 부단장이 듬직하게 말하니 왕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대 말이 맞아. 사특한 무리가 실존해야 사람들이 믿지.”
그녀는 착착 만들어지는 상황에 미소를 지었다.
처음의 당혹감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저도 처리를 도와야 하니 잠시 나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방을 나가지 못했다.
왕비가 그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몸을 돌려서 왕비를 마주봤다.
“다치지 말고 어서 돌아오게.”
“알겠습니다.”
그는 왕비를 잠시 안아주고는 나갔다.
왕실기사단 부단장이라는 직책을 망각한 행동이었다.
앞으로 둘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예견하게 해주는 모습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