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대비의 죽음
“그 사건의 조사관을 불러라.”
국왕의 부름에 라보 공작 급사를 조사 중인 조사관이 왔다.
그도 국왕이 어찌하여 자신을 불렀는지 알았으나 난감할 따름이었다.
“라보 공작을 그녀가 죽게 했다는 증거는 없느냐?”
“네, 아무리 뒤져보고 알아봐도 증거가 없습니다.”
조사관이 대답하고는 차마 국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여 고개를 떨구었다.
그가 조사관의 대답에 한숨을 크게 쉬었다.
국왕으로 굳건함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 맞았으나 도저히 그럴 정신이 들지 않았다.
국왕 자체의 정치적 입지가 타격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라보 공작령은 메디치 백작의 손에 떨어졌다.
그 영지에서 나오는 모든 곡물은 그녀의 것이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길러내는 병사와 기사는 모두 그녀의 것이다.
“정녕 하나도 없단 말이냐? 단 하나의 의혹이 생길 여지가?”
“정말 없습니다. 있었다면 바로 폐하께 보고를 올렸을 것입니다.”
송구해하는 조사관의 눈빛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어보였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녀의 영향력을 꺾어야만 한다.
국왕은 그 생각만이 머리에 아른거렸다.
솔직히 반왕파는 이제 과거의 반왕파가 아니었다.
중립파의 숙청과 함께 반왕파의 상당한 귀족들도 쓸려나가 버렸다.
그만큼 큰 사건이었고 피를 많이 흘린 일이었다.
‘진짜로 거짓 증거라도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거짓으로 누군가를 몰아세운다면 메디치 백작이 딱 좋기는 했다.
그런데 국왕은 과연 그녀가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일까 하는 마음과 그녀가 거짓 누명을 밝히고 더 비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뒤엉켰다.
국왕은 부정하겠지만, 단 한번도 그녀를 제대로 이겨본 적이 없었던 열등감이 만든 마음이었다.
그 불안감에도 증거조작을 할까하고 마음이 기울고 있는데 시종이 급하게 문을 열었다.
“폐하! 큰일입니다.”
“또 무슨 일이냐!”
“대비마마께서 위독하십니다!”
“뭐?!”
그는 소식을 듣자마자 대비궁으로 달려갔다.
* * *
그는 대비궁에 도착하자마자 대비의 침실로 들어갔다.
의원이 그녀를 진찰 중이었고 왕비와 페루제 공작부인이 대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시녀들이 대비의 몸에 난 땀을 닦아주고 있었고 대비는 정신이 혼미하여 누가 왔는지도 알아보지 못했다.
의원이 국왕을 보고 몸을 돌렸다.
그가 인사도 하기 전에 국왕은 본론부터 꺼냈다.
“도대체 이게 무슨 황망한 일이야?! 어마마마께서는 어디가 편찮으신가?”
“고열에 시달리고 계시기는 하지만 원인을 알 수가 없사옵니다.”
“병의 원인을 알고 치료하는 것이 의원을 일인데 그딴 소리를 해?! 당장 어마마마를 살려내라!”
“노, 노력하겠습니다.”
의원이 말을 떨었다.
그에게는 확신이 없었다.
대비를 살릴 수 있는 확신이 말이다.
그것은 대비가 얼마나 좋지 않은 상태인지 알게 해줬다.
국왕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노력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만약 네가 어마마마를 살려내지 못한다면 네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폐, 폐하?! 살려주십시오!”
의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곧 무릎을 꿇었다.
그 태도와 안색이 대비에게 일어날 미래를 가늠하게 해줬다.
대비는 살 수 없으리라.
그 안에 있는 모두가 알아차렸다.
국왕은 미칠 것만 같았다.
여기서 대비가 죽는다?
겉으로는 대비와 왕비는 누구보다 사이가 좋은 고부관계였다.
그들은 자주 만나고 대화하며 웃었다.
얼마나 자주 만나는지 국왕과 사이가 나쁜 대신에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사이가 좋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릴 정도였다.
반면에 왕은 어떠한가?
선왕의 정부였던 그의 친모는 대비와 사이가 나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대비는 자신이 사랑했던 아들을 국왕이 낙마 사고를 유도해서 죽였다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 그 원한을 가슴에 품고 조용히 살다가 페루제 공작부인의 등장과 함께 대비는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국왕과 사사건건 대립하였고 그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대비는 사생아였던 그가 왕실의 일원으로 입적될 당시에 반대하지 않고 선왕의 뜻을 따랐으며 법적인 어머니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녀가 아무리 그와 싸워도 그녀를 옹호하게 해주는 무기가 되었다.
그녀가 국왕을 정말로 싫어했고 적대하고 싶었다면 그가 왕자가 되는 것을 막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다수였다.
국왕과 대립하면서도 명문과 그 근거는 탄탄했기 때문에 그녀의 의견은 타당해보였다.
무조건 국왕의 뜻에 반발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 명분과 근거가 부족한 일들은 그냥 넘어갔다.
그 타당해 보이는 명분과 근거는 페루제 공작부인이 대비에게 준 것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국왕을 공격할 명분과 근거를 주지 않았다면 대비는 아들에게 무조건 반대하고 보는 못난 어머니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국왕이 덜 난감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혀서 국정을 방해하는 대비가 죽는 것과 국왕에게 직언을 할 줄 대비가 죽는 것은 그 무게가 달랐기 때문이다.
국왕이 죽였다고 뒤에서 뭐라고 할지언정 그것이 명분이 되어서 국왕을 위협하지는 않으리라.
대비가 죽으면 백성들도 귀족들도 속삭거릴 것이다.
친모도 아닌 여인을 어머니로 모시기 지겨워서.
자신의 일에 방해만 하는 대비가 싫어서.
충언을 빙자한 간섭을 하는 대비가 짜증나서.
국왕이 대비를 죽였다고 말을 할 것이다.
한 왕국의 대비를 죽이기에는 너무나도 개인적이고 치졸하며 개념이 없는 동기였다.
알펜 국왕이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의원의 멱살을 잡았다.
“그렇게 애원할 시간에 어마마마를 살리란 말이다!”
“알, 알겠습니다.”
의원은 얼른 일어나서는 다시 치료에 집중했다.
그러나 대비는 점점 상태가 악화되었다.
불과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대비는 산송장 같아져버렸다.
앙상한 몸과 생기가 없는 눈빛은 곧 죽음을 앞둔 사람 그 자체였다.
처음에 없었던 원인 모를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일도 잦아졌다.
국왕조차 더는 살려내라는 말을 하지 못할 정도가 된 것이다.
“최선을 다했으나 이제는 치료가 무의미합니다.”
“대비마마께서 고통스럽지 않게 진통제를 아낌없이 쓰게.”
“알겠습니다.”
국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을 했다.
더는 뭐라고 할 방도가 없었다.
* * *
의원이 자리를 떠나고 왕실기사단장이 들어왔다.
국왕은 창가에서 뒷짐을 지고 물었다.
“조사는 어찌되었는가?
“대비궁의 시녀들과 시종들 그리고 대비궁 담당 기사들과 병사들까지 모조리 감옥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수상한 점이 있었다고 하던가?”
“페루제 공작부인이 왕궁에 있던 동안에 라스타 왕국산인 차를 같이 나눠마셨다고 합니다.”
“자신은 해독제를 먹고 대비마마와 함께 독이 든 차를 마셨겠군.”
“대비와 차를 마실 때에 측근 시녀들도 함께 차를 즐겼다고 합니다. 그 측근 시녀들에게도 해독제를 준 것이 분명해서 중점적으로 조사 중입니다.”
국왕은 왕실기사단장이 말하는 조사가 고문임을 알았다.
그러나 고문을 하면 어떠한가?
페루제 공작부인을 몰아세울 명분을 만들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대비 암살이라는 대죄는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까.
“제대로 된 증거가 없다면 자백이라도 받아내거라.”
“반드시 확보하겠습니다.”
“그대를 믿네.”
“알겠습니다!”
설령 그녀가 그 일과 관련이 없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거짓 자백을 받아서라도 그녀가 암살의 배후라고 공표하고 합당한 벌을 내릴 것이다.
왕실의 큰 어른을 죽인 것은 왕실에 역심을 품었다고 봐도 될 일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알펜 왕국의 귀족이라는 것을 보면 반역죄로 다스려야 마땅했다.
그렇게 계획을 짜고 있는데 왕실기사가 왔다.
“폐하! 대비마마께서!”
그 다급한 외침만으로 충분했다.
국왕은 달렸고 대비의 임종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원하고 또 원했을 상황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왕이 도착했을 때, 대비는 옅은 신음만 내뱉고 있었다.
말할 기운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 그녀가 기적처럼 손을 들더니 왕을 향해서 손짓했다.
마치 국왕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길 것처럼 굴었다.
그 모습에 찜찜했으나 거부하기 어려웠다.
어머니가 유언을 하겠다고 하는데 싫다고 할 자식은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그가 원하는 것과 미묘했다.
친왕파가 다른 정치세력들보다 우위에 있기를 원했으나 중립파 숙청으로 그 기회를 잡기를 원하지 않았다.
대비가 죽기를 원했으나 이런 상황에서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
인간이란 보이는 것을 더 믿으니 사람들은 국왕이 대비를 죽였다고 여길 것이다.
아들을 지지한 어미를 자신을 반대한다고 죽인 아들.
대비가 죽으면 평생을 따라다닐 오명이었다.
복잡한 마음을 안고 그가 대비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댔다.
두근. 두근. 두근.
괜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결국 네, 네놈이 나를 죽이는구나.”
국왕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대비가 그를 원망스럽게 봤다.
그 눈빛에는 아들의 원수를 갚지 못했다는 한탄이 담겨있었다.
쎄엑. 쎄엑. 쎄엑.
힘들게 숨을 쉬더니 점점 소리는 작아졌고 멈췄다.
숨소리가 멈추자 대비는 눈을 감았다.
* * *
대비의 장례식은 신전에서 이뤄졌다.
그곳에는 많은 고위 귀족이 왔다.
왕국의 가장 큰 어른이 돌아가셨으니 그에 맞는 예의를 차려야 했음이다.
그들은 저마다 국왕에 관해 이야기를 슬쩍 나눴다.
“중립파도 그렇게 처리하더니 결국 대비마마도 이렇게 처리하는군.”
“중립파의 씨를 말라 버린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러신 답니까?”
“힘의 추가 자신에게 쏠린 틈에 못마땅했던 대비를 처리하고 싶었겠지.”
“하긴 지금 누가 감히 폐하의 명령에 토를 달겠습니까? 메디치 백작이라면 몰라도요.”
많은 이들이 누명으로 중립파를 숙청하고 독살로 대비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그런 국왕을 견제할 세력은 메디치 백작의 세력이 유일하다고 봤다.
국왕의 숙청에서 가장 타격을 덜 받았고 무엇보다 친왕파 귀족을 이끄는 벨로나 공작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부부 간의 죄는 연좌제로 다스리는 왕국법에 따라 벨로나 가문의 안주인인 메디치 백작을 건드리는 것은 벨로나 공작을 건드리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신전이 술렁거렸다.
“아, 드디어 메디치 백작이 오셨군요.”
“어서 가보세.”
대비와 사이가 좋았던 메디치 백작이 신전에 도착했다.
그녀는 정갈한 검은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걸어왔다.
모두가 그녀에게 길을 내어줬다. 대비가 누워있는 관 앞까지 쉽게 올 수 있었다.
“폐하, 왕비마마.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정정하시던 마마께서 이렇게 갑자기 떠나실 줄은 꿈에도 몰랐네.”
왕비가 훌쩍이며 말하며 그녀에게 안겨왔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이 상황이 희극이라고 생각했다.
‘대비가 죽어서 기쁠 것인데… 연기가 많이 늘었군.’
눈물까지 흘리면서 슬퍼하는 모습과 행복해하는 진심과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거기에 맞춰주는 것이 도리겠지.
“맞아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립니다.”
의원에게 살 가망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몰랐다는 듯이 굴어야 했다.
“어머니처럼 따랐는데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러게 말이야. 내 어머니와 같은 분이었는데!”
그래야 더 슬퍼 보이고 안타까움을 자아낼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