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217화 (217/221)

217화 통제되지 않는 패

란델리노가 탄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새로운 마차가 그녀 앞에 섰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 마차에 탔고 왕궁으로 들어갔다.

마차가 선 곳에는 어떤 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마차에 내리자마자 그녀에게 인사했다.

“저의 편의를 이렇게 봐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비마마.”

“아들이 아카데미 입학시험 때문에 멀리 떠나는데 배웅은 하게 해줘야지.”

“대비마마께서 곤혹스러운 일을 겪으실까 걱정입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왕궁 안에서 손님 대접을 받고 있어도 엄연히 ‘용의자’로 왕궁에 머물고 있었다.

이렇게 사사로이 왕궁을 벗어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그것도 국왕의 승인이.

“국왕이 나의 아들이네. 아들이 어미를 쳐내려고 한다면 그건 왕의 자질이 없음이야.”

“저희 폐하께서는 그럴 분이 아니시지요.”

“그리고 사람들이 자꾸 왕실과 자네의 사이가 나쁘다느니 하는데 그런 유언비어에 상처받지 말게나.”

왕실과 페루제 공작부인의 사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국왕과 페루제 공작부인의 사이가 나쁜 것이었다.

국왕과 대비는 사이가 나빴고 국왕은 왕비와도 사이가 나빴다.

알펜 왕국 역사상 이렇게 왕실이 단합되지 않은 적이 있었는가?

있기야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지지하는 왕자를 다음 대 왕으로 만들기 위한 정치적 싸움은 어느 왕국에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후계자 문제도 아니고 부부간에, 모자간에 이렇게 대립하는 경우가 있었을까?

확언하건대 이렇게 아내가 남편을 끌어내리려고 한 적도, 설령 친아들이 아니라고 해도 국왕인 아들을 어머니가 끌어내리려고 한 적은 없었다.

“대비마마와 왕비마마 덕분에 그런 거짓소문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준다니 내 마음이 안심이 되는군.”

대비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쓰다듬어줬다.

다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대비의 원수인 국왕을 쓰러뜨려줄 강력한 검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국왕에게 굴욕을 줄 때마다 대비의 가슴 속 응어리가 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폐하께서 저에 관해 오해를 하신 것이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오해는 차근차근 풀면 될 일이지요.”

“어쩜, 이리도 선한 사람이 있을까 싶다니까.”

그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비궁으로 들어갔다.

* * *

페루제 공작부인은 대비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대와 이야기를 나누면 시간이 지나가는지도 모르겠어.”

“원래 좋은 사람들끼리 모이면 그런 법이지요.”

“그렇지! 맞는 말이야! 이참에 왕비궁이 아니라 대비궁으로 짐을 옮기는 것은 어떤가?”

대비의 말에 그녀가 스테이크를 썰던 나이프를 멈췄다.

암암리에 대비와 왕비 사이가 나쁘다는 말이 작게 돌고 있었다.

그들의 권력은 그들 자체에서 나오기보다는 페루제 공작부인으로 인한 것이 컸다.

그녀가 그들을 지원해주지 않았다면 어찌 국왕과 한판 붙으면서도 당당하게 그 자리를 지킬 수 있겠는가?

그들은 그녀가 자신보다 상대와 더 친밀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국왕’이라는 공동의 적이 있으니 사이가 나쁠 수 없는 것이 이치이지만.

다르게 보자면 왕비는 자신의 자식이자 국왕의 핏줄인 왕자를 왕위에 앉혀야 하는 입장이었고 대비는 원수의 아들도 처리하길 원하는 쪽이었다.

절대로 한편이 될 수 없는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분열이 되지 않은 것은 그녀가 중재자가 되어서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이미 깨져버린 틈새는 메울 수 없다.

“흉흉한 소문이 돌더군요.”

“어떤 소문이 말인가?”

“2왕자님이 독살당할 뻔했다는…….”

대비의 능청스러움에 페루제 공작부인이 슬쩍 말을 흐렸다.

“그럴 리가! 그런 일이 있었다면 왕궁이 난리가 났겠지.”

“역시 그렇죠? 제가 헛소문을 들었나봅니다.”

대비의 이마에 미약하게 땀이 맺혔다.

메디치 백작의 지원 없이 대비의 외가만으로는 국왕을 이기기 어려웠다.

물론 지금의 국왕이라면 해 볼 만하기는 했다.

친왕파의 세력이 왕국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했으나 그 친왕파에게 가장 큰 힘을 가진 귀족이 벨로나 공작이다.

그 벨로나 공작과 맞설 만한 사람은 페루제 공작부인뿐이었다.

만약 눈앞의 여인이 국왕의 편이 되기로 마음을 바꾼다면 대비의 패배는 확정된 것과 같았다.

“그럼! 어떤 못된 것들이 그런 헛소문을 퍼뜨렸는지! 요즘 사교계의 질이 떨어졌어.”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따끔하게 혼을 내겠습니다.”

“반드시 그리하게나.”

그녀가 대수롭게 않게 넘기자 대비가 안도하며 옅은 숨을 내뱉었다.

* * *

어두운 시각.

그녀가 왕비궁의 큰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아 와인을 마셨다.

왕비궁을 자신의 집인 것처럼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었다.

“2왕자는 어떤 상태지?”

“많이 나아지셨습니다.”

“태자를 독살하려던 것을 2왕자로 바꾸고 독도 위력이 약한 것으로 슬쩍 바꿨으니 망정이지!”

그녀가 와인 잔을 힘차게 내렸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대비가 국왕을 증오하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이제껏 그 증오를 이용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번에 벌인 일은 그 여파가 커도 너무 컸다.

일개 귀족의 자제를 죽이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상대는 태자였다.

미래의 국왕이 될 인물을 죽이려고 든 것이다.

만약 진짜로 죽기라도 했다면 사람들은 범인으로 누구를 의심했을까?

국왕으로 인해서 몰살당한 것과 마찬가지인 중립파의 생존자들?

친왕파의 세력이 커진 것에 위기감을 느낀 반왕파의 귀족들?

다들 살려고 숨죽이고 있는데 그런 짓을 해서 제 수명을 스스로 갉아먹을 리가 없었다.

사람들은 배후 용의자를 추려내면서 국왕을 증오하는 대비를 염두에 두게 될 것이다.

그 대비를 지지하는 페루제 공작부인까지 말이다.

그녀는 자기 세력을 잃기는 했으나 알짜배기들은 모두 남겼다.

게다가 본디 그녀의 기반은 라스타 왕국이었다.

알펜 왕국에서 손해가 났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타격은 전혀 없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고 사정을 아는 이들은 모두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로 인해서 대중은 자연스럽게 태자를 죽인 배후로 그녀를 지목할 것이다.

평소에 국왕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태자도 공공연히 그녀를 비판하고 다녔으니까.

충분히 그럴듯해 보였다.

솔직히 지금의 힘이라면 사람들이 뭐라고 수근거려도 무시하고 눌러버릴 수 있었다.

귀족 사이에서 인망을 잃은 국왕.

그녀와 동맹을 맺은 벨로나 공작.

세력이 미약해진 반왕파.

그녀를 견제할 만한 자는 그녀를 견제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와 적대적 혹은 중립적이었던 이들은 그녀를 상대할 여력이 없었다.

억지로 누르고 짓밟으면 해결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앞으로 자신이 할 일에 그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비마마가 마음이 조마조마했나보지?”

“불안해보이시기는 했습니다.”

“핫!”

페루제 공작부인은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났다.

누구 덕분에 국왕 앞에서도 고개를 올리고 당당할 수 있었는가?

누구 덕분에 국왕 부럽지 않은 위세를 떨치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녀가 지금의 대비를 만든 것이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대비도 없다.

그런데 은혜도 모르고 일을 복잡하게 만들려고 해?!

물론 태자 독살시도는 대비가 고심하고 또 고심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고 대비를 이대로 둔다면 앞으로 점점 더 생각 없이 행동하게 될 것이다.

그녀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말이다.

자신과 논의도 없이 태자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주는 의미는 무거웠다.

“통제가 되지 않은 패는 더는 ‘패’라고 할 수 없겠지.”

그녀는 굳이 ‘그러니까 버리는 것이 맞겠지’라는 말을 잇지 않았다.

다리를 잠시 까닥거리다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정을 내렸으니 잠이나 자야겠구나.”

“편한 밤 보내십시오.”

곁에 있던 시녀가 방을 나가는 그녀에게 인사하고 안을 정리했다.

* * *

대비를 버리기로 결정한 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국왕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자신의 머리를 헝클이고 있었다.

친왕파의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급부상했으나 실상은 달랐다.

장기적으로 보면 알펜 국왕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젠장!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서 믿어주지 않아!”

중립파를 숙청했던 일로 친왕파 내부에서도 국왕을 아니꼽게 보는 귀족들이 많았다.

그들이 보기에는 중립파의 숙청은 과하고 치졸했으며 국왕을 향한 신뢰를 깨뜨렸다.

상대가 적대 세력도 아니고 중립적인 귀족이었는데 공개적으로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세울 필요는 없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중립파를 누명까지 씌어가며 몰살한단 말이야!”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지지 세력을 바꾸기는 했으나 충분히 이해할 만한 선을 지켰기 때문이다.

게다가 페루제 공작부인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중립파의 방심을 유도하고 그들의 반역 증거가 드러나도록 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해있는 동안에 국왕이 거짓 증거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국왕의 결백함을 아는 귀족들조차 다수의 동조에 ‘혹시?’하는 의혹을 품었다.

그로 인해 일부 중립파 가문은 진짜로 반역을 일으켰으니 중립파의 반역은 완전히 거짓은 아니게 되었다.

“벨로나 공작이 좀 진중하게 기다렸으면!”

벨로나 공작이 빠르게 반역에 대처하지 않고 조금 시간을 뒀다면 국왕은 전령을 보내서 그들을 진정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재조사를 하고 무혐의로 결론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중립파 가문에서 군사를 일으킨 시점에서 이미 반역이고 그 결말은 죽음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만든 함정에 빠진 자신의 잘못이 컸다.

“한번 잃어버린 신뢰를 다시 쌓은 일은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는군.”

친왕파의 귀족들과 자주 만나고 대화를 나누며 신뢰를 쌓으려고 했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자신들마저도 어떤 명분으로 버려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함께였다.

지금 친왕파가 가장 큰 정치세력이니까 이탈하지 않는 것뿐이다.

이는 언제라도 명분만 있고 친왕파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발을 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친왕파 내부에서도 그러한데 반왕파라고 다를까?

친왕파의 귀족들보다 더 불신하면 불신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을 따르는 귀족들은 거론 대상도 아니다.

친왕파 귀족들이 국왕을 향한 불신이 쌓여도 라보 공작이 있었다면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그가 그들을 다독이며 국왕의 억울함을 호소해줬을 것이니까.

그러나 지금 친왕파에는 그런 일을 할 만한 존재가 없었다.

벨로나 공작이 있었다면 그가 그 역할을 해줬겠지만 그는 반역 토벌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몬스터 토벌을 위해 수도를 떠나버리지 않았던가.

‘여기서 더 불신을 심어주는 사건이 일어나선 아니 된다.’

중립파 숙청도 알펜 국왕이 주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졸지에 주도한 꼴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인망을 잃을 만한 억울한 사건이 이 벌어지면 곤란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