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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216화 (216/221)

216화 욕심

라보 공작령과 인접해있는 영지를 지배하고 있는 귀족들에게도 라보 공작가문의 몰락이 전해졌다.

라보 공작령이 메디치 백작의 군대가 완전히 장악했다.

이것은 소식을 먼저 듣게 된 수많은 귀족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그 어떤 영지도 군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았거늘!

어찌 그녀의 군대가 라보 공작령에 올 수 있었을까?

“제발 영지로 지원군을 보내주십시오!”

“라보 공작가문은 폐하를 위해서 충성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국왕이 라보 공작가문에서 달려온 전령의 말을 듣고 주먹을 쥐었다.

누구보다 라보 공작가문을 돕고 싶은 사람은 알펜 국왕이었다.

또한, 그는 전령의 애절함과 다급함을 잘 알았다.

“맞다. 죽은 공작을 봐서라도 군을 보내줘야겠지.”

“그렇다면!”

전령이 희망에 찬 눈빛으로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국왕은 고개를 절래 흔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너는 너무나 늦게 왔다.”

그가 말하는데 시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폐하, 라보 공작성이 점령되었다고 합니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전령은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다리 힘이 풀리고 말았다.

아니, 적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왔을 때부터 패배를 직감했을지도 모른다.

단지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적들이 예상외의 방법으로 성안에 들어오기는 했으나 라보 기사단은 그런 기습에 흔들릴 사람들이 아닙니다.”

전령은 거짓이라며 애써 부정했다.

“소드마스터가 있었다고 합니다.”

“로빈?”

페루제 공작부인의 측근으로 있는 소드마스터로 유명한 이는 로빈이었다.

국왕이 로빈을 떠올리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어느 날부터인가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았다.

확인한 바에 따르면 라스타 왕국으로 그녀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갔다.

“새로운 소드마스터로 이름은 노엘이라고 합니다.”

알펜 국왕이 눈을 질끔 감았다가 떴다.

노엘이라는 소드마스터가 메디치 백작의 기사로 전장에 나타났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 소드마스터는 알펜 왕국의 귀족인 메디치 백작의 기사다.

알펜 왕국에서 공식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소드마스터는 왕국의 군력을 가늠하게 해주는 상징이다.

소드마스터가 2명이나 알펜 왕국에서 그녀의 기사로 있는다면 귀족들은 그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전령은 피곤할 것이니 쉬도록 하거라. 시종은 그가 쉴 방으로 안내해라.”

“네. 어서 일어나시지요.”

시종은 전령을 부축하며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국왕은 왕실기사단장을 불렀다.

“그대는 당장 카플란 왕국의 대사를 데려와라!”

“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왕실기사단장이 카플란 왕국의 대사를 데려왔다.

그는 뚱뚱한 살집에서 나오는 땀을 수건으로 닦으며 들어왔다.

“폐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그래 오는데 불편한 것은 없었고?”

대사는 국왕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난감했다.

원래도 땀이 많은데 평소보다 더 땀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폐하의 배려에 편히 왔습니다. 헌데 부르시면 바로 왔을 것인데 어찌하여 왕실기사단장에게 직접 저를 데려오라고 하셨습니까?”

그는 국왕이 무엇 때문에 불렀는지 알았으나 굳이 아는 척하지 않았다.

아는 척해봐야 좋은 것이 없는 내용이었으니까.

“메디치 백작의 군대가 라보 공작성을 점령했다. 그대도 알고 있겠지?”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대사가 얼굴을 닦으면서 당혹스러워했다.

연극을 했다면 연기력을 인정받았을 실력이었다.

“알펜 왕국의 그 어떤 영지에서도 그녀의 군대가 지나가도록 해주지 않았어. 설령 한 영지에서 지나가게 해줬을지라도 여러 영지를 지나가야 하니 알펜 왕국을 통해서 라보 공작령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지.”

“그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다니 메디치 백작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국왕의 말을 경청하던 그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러면서 땀을 계속 닦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저 돼지 같은 대사 놈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서로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이라니 얄밉고 죽여 버리고 싶게 미웠다.

“알펜 왕국에서 불가능하다면 갈 수 있는 방도는 하나지. 카플란 왕국에서 그녀의 군대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 말이야.”

“어느 왕국에서 타국의 군대가 자국을 넘어갈 수 있도록 가만히 둔다고 합니까? 차라리 폐하 몰래 비밀리에 알펜 귀족들이 문을 열어줬다고 보는 것이 맞지요.”

카플란 왕국의 대사가 정말 말도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줬다.

억울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말투와 표정으로 말이다.

“카플란 왕국이 재정적으로 라스타 왕국에 의존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자국의 영토에 타국의 군대를 지나가게 해줄 것이라고 상상 못했어.”

알펜 국왕이 비아냥거리자 카플란 대사의 얼굴이 굳었다.

그렇지만 곧 굳었던 얼굴은 풀렸다.

“저희 카플란 왕국에서는 공식적으로 그런 적이 없습니다.”

“공식적으로?”

“각 영지의 영주들이 알아서 성문을 열고 지나가게 해줬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대사의 말에 알펜 국왕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카플란 국왕을 대신하여 카플란 왕국의 대표로 있는 대사가 할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핫! 카플란 왕실은 몰랐고 카플란 귀족들이 독단적으로 그리 했다고 말하는가?”

귀족들의 주군은 국왕이다.

그런 국왕의 승인도 없이 타국의 군대를 들인다는 것은 자국의 국왕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그것을 대사라는 작자가 이리도 떳떳하게 말하다니 충격이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그들이 카플란 왕실에 보고를 했겠지요.”

“…….”

“그러니까 카플란 왕실은 승인한 적도 없고 카플란 귀족들도 행한 적 없는 일을 가지고 저를 추궁하지 말아주십시오. 증거도 없이 이러시면 양국 간의 사이만 나빠집니다.”

하긴 그렇게 만들어야 카플란 왕실은 책임을 교묘하게 회피할 수 있겠지.

왕실에 보고도 없이 귀족들이 영주의 권리를 행사했다고 하는데 어쩌겠는가!

그러면서 저리도 깐족대는 꼴이라니 저 돼지를 당장에 진짜 돼지우리에 넣어버리고 싶었다.

알펜 국왕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했다.

“가지가지 하는군.”

“저는 카플란 왕국의 백성이며 대사입니다. 오직 왕국만을 위해서 움직일 따름이지요.”

왕의 혼잣말에 대사가 즐겁게 대답했다.

한마디로 이거다.

알펜 왕실과 손을 잡아봤자 얻는 것이 없으니 메디치 백작의 편에 선 것이라고 말이다.

“언제든 카플란 왕국을 위한 선택을 할 것입니다.”

카플란 왕국을 움직이고 싶으면 그녀가 주는 것 이상을 줘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알펜 국왕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라스타 왕국은 메디치 백작의 치세 아래에서 역대 최고의 국력을 자랑했다.

어머어마한 자금이 왕국으로 흘러들어왔고 그 자금으로 강력한 군대를 양성해낼 수 있었으며 안정적인 치안을 기반으로 인재들의 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그렇게 투자를 하고도 돈이 남아돌아서 거지꼴이 난 타국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라스타 왕국의 대부분의 자금력과 권력과 군권을 한 여인이 손아귀에 쥐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알펜 왕실에 그만한 자금력과 영향력이 있었다면 친왕파, 반왕파, 중도파로 파벌이 나눠져서 대립하고 공조하고 견제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국왕은 한숨을 쉬었다

내부에 메디치 백작이라는 적으로도 부족하여 카플란 왕국까지 뒤통수를 치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 * *

왕이 심한 두통에 고통스러워하거나 말거나

페루제 공작부인은 자기 할 일을 했다.

그녀는 마차에 타려는 란델리노를 배웅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벨로나 공작가문의 적장자를 배웅하는 것치고는 조출했다.

호위기사 몇 명이랑 시종 소수가 전부였다.

“메디치 백작령에 가서 거기 분위기에 적응하면서 공부하는 것이 합격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머니, 이렇게 지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란 자식을 위해서 무엇이든 하는 법이지.”

란델리노는 드디어 어머니가 자신을 후계자 후보로 염두에 두고 있음에 감동했다.

그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했다.

그런 란델리노와 달리 그녀는 어머니로 당연한 일을 한다는 듯이 담담했다.

“너의 꿈을 위해서 나는 너에게 온갖 지원을 해줄 수 있다.”

“감사하고 있습니다.”

“감사할 필요는 없지. 그 지원을 받고도 얻지 못한다면 결국 네 그릇이 그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니까.”

란델리노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어머니는 허투로 말을 하는 분이 아니다.

뼈가 있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무리 지원을 받아도 사촌에게 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직 제대로 경쟁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이리도 확고할 수 있을까?!

란델리노는 입가가 떨렸다.

안다. 지금 이렇게 흔들리는 마음을 드러내서는 아니 된다.

그렇지만 잘 되지 않는 것을 어찌한단 말인가!

“그게 네가 지는 이유다.”

“?!”

페루제 공작부인은 아들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그 마음을 뒤엎어버리고 싶었다.

“무엇이요? 그게 무엇인지 말해주시지요.”

마주보면 고개를 절로 숙이게 하는 눈빛.

그는 어머니의 그 기세를 이겨내고 자신은 어머니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남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물어본 것이다.

감히 어머니에게 질문도 못하는 범인 사이에서 자신이 다름을 보여주려고 말이다.

그녀가 아들에게 한발자국 다가왔다.

란델리노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작은 말 한마디에도 흔들리는 너의 유약함이.”

다시 그녀가 한걸음 앞으로 걸었다.

란델리노도 다시 한걸음 뒤로 움직였다.

“별것도 아닌 것에 기싸움하며 남다름을 뽐내고 싶어 하는 허세가.”

그녀가 란델리노의 가슴을 한손으로 가볍게 밀쳤다.

“일을 어그러뜨리는 과욕이 패배의 이유다.”

툭.

란델리노는 뒤로 넘어졌다.

마차에 오르기 위한 계단에 걸린 것이다.

바닥에 뒹굴지는 않고 계단 위에 앉게 되었으나 뭔가 볼품없어 보였다.

“네가 가진 능력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너의 성품을 고치지 않는다면 이길 길은 요원해 보이는구나.”

그녀는 놀란 눈망울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들을 뒤로 하고 가버렸다.

란델리노는 멍해졌다.

주변의 시종, 시녀는 눈치가 있었다.

지금은 다가가서 괜찮으시냐고 물어볼 때가 아님을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서 어머니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핫!”

그러다가 갑자기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한참을 웃었다.

그제야 시종이 당황스러워하며 말을 걸었다.

“란델리노 백작님,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아.”

그는 벌떡 일어서더니 마차에 탔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그를 밀면서 강하게 그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녀의 말은 란델리노에게 기운을 줬다.

‘제가 대단한 사람이기는 하군요. 세상 모든 것을 가지고 싶어 하시는 어머니에게 과욕이라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진짜로 그가 과욕을 부리는 사람이었다면 헤레스가 정식으로 가문에 입적이 된다고 했을 때, 난리를 피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리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헤레스를 입적하여 생기는 손해를 덮고도 남을 이익을 취했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머니, 저는 과욕이 아니라 이룰 수 있는 것에 욕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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