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새로운 소드마스터
수도에 있는 라보 공작가문의 가신들이 한곳에 모였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 같이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한참을 침묵했다.
상황이 라보 공작가문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라보 공작가문이 불리하다고 함은 그 가신들도 불리한 입장에 처했다는 뜻이었다.
한 가신이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여기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선택이요?”
“메디치 백작과 싸울지 아니면 일부를 내어주고 물러설지 결정해야 해요.”
누구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느냐고 소리치지 않았다.
분노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민심은 흉흉했고 페루제 공작부인 측은 당당했다.
영지의 소식이 주기적으로 그들에게 들어왔다.
영지의 백성들이 동요하며 불순한 움직임을 보이려고 한다는 보고가 바로 얼마 전에 들어왔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군대를 맞이하기 전에 영지 내부에서 영지 백성들이 들고 일어날지 몰랐다.
한사람이 말을 꺼내니 다음은 쉬웠다.
무엇이든 처음이 힘든 것이니까.
“그런 결정을 내리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바로 얼마 전에 수도에서 있었던 일이 벌써 영지에 왔습니다.”
“메디치 백작이 바람잡이들을 시켜서 백성들을 선동하는 듯싶어요.”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서는 메디치 백작은 영지전을 멈출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없었던 불만도 있게 만드는 일이 아닙니까? 선동당할 만해요.”
“일단 민심을 수습해야 합니다.”
민심을 수습하지 못한다면 메디치 백작이 공격하기 전에 백성들의 봉기에 영지가 난리가 나게 생겼다.
“신벌은 선대 라보 공작각하께서 받으신 것이지요. 지금의 라보 공작과는 무관하지 않습니까?”
“신전에서 성모로 추앙하며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죄인의 핏줄이라면서 악을 쓰고 있어요.”
“카엘족도 죄인의 후손이라면서 오랫동안 고난을 당하며 살았지 않습니까? 라보 공작만 연좌제에서 제외하는 것도 웃기지요.”
죽은 라보 공작은 선대 공작이 되었고 그의 아들인 스튜어트는 새롭게 공작이 되었다.
원래라면 작위 계승식을 해야 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생략했다.
그들은 라보 공작가문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 자리에 정작 라보 공작가문의 주인인 라보 공작이 없었다.
가신 하나가 한숨을 쉬었다.
“라보 공작각하께서 란델리노 백작의 반이라도 닮았다면 좋았을 것을요.”
“선대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앓아눕다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아파도 견뎌내고 가문을 위기에서 구할 생각을 해야 하거늘. 한숨이 절로 나와요.”
새로운 라보 공작은 유약했다.
감탄이 나올 만한 능력과 자질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그는 평범했다.
지금이 평범한 시대였다면 무난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넓은 그늘에서 살다가 적당한 때에 공작위를 물려받는 삶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평온한 시대가 아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등장은 알펜 왕국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녀가 몰고 오는 파란으로 인해 선대 라보 공작은 매번 두통을 소호했다.
가문과 가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고심하고 또 고심했던 것이다.
가신이 아닌 이들 앞에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말이다.
“란델리노 영식의 반이라도 닮았으면…….”
“…….”
란델리노 영식은 라보 공작보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자신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평소에 완벽에 가까운 예법과 언행 그리고 주변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평범한 축에 속하는 라보 공작이 덜떨어지게 느껴지는 것은 압도적인 능력자인 란델리와 비교되었기 때문이다.
한 가신의 푸념에 모두가 뚫어지게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그가 당황해했다.
“흠흠흠! 농담입니다. 분위기를 좀 풀어보려고요.”
“그, 그렇지요.”
모두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 진심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웃음은 짧았고 다시 분위기는 진중해졌다.
“일단 영지에 있는 신관들을 추방해야 합니다.”
“명분은요? 신관을 무작정 쫓아내면 괜히 민심한 자극하는 꼴입니다.”
“그들이 그녀의 사람이니 세작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렇죠. 신관들은 자기네들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고 반발하겠지만 지나가던 개도 비웃을 거짓말이지요.”
성모인 메디치 백작은 엄연히 신관들의 상사였다.
영지에 있는 그들이 그녀에게 정보를 가져다 바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연좌제를 적용해야 한다느니 헛소리를 못하게 해야 합니다.”
“메디치 백작의 군대가 경유할 만한 영지의 가문들에는 서신을 보냈습니까?”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확답을 받았습니다.”
“이제 내부만 잘 단속하면 특별히 큰일은 없을 거예요.”
“그녀가 신도 아닌데 어떻게 땅을 딛지 않고 군대가 동쪽 영지까지 오겠습니까,”
“억지로 영지를 지나가려고 하면 그 영지와 싸우게 되니 저절로 힘이 빠지게 되겠지요.”
그들은 페루제 공작부인을 어려운 상대라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쉽게 생각했다.
영지 내부의 흉흉한 민심에 그들은 그녀가 영지전은 그들의 시선을 빼앗기 위한 전략이라고 판단이었다.
내부에 심어놓은 그녀의 사람이 영지를 차지하게 하고 실질적으로 자기 손아귀에 쥐려고 했다고 말이다.
사실 직접 영지까지 군대를 끌고 갈 방도가 없으니 그리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그녀와 직접 자주 부딪혔던 선대 라보 공작이었다면 ‘영지전’을 염두에 뒀을 것인데 안타까운 일이었다.
* * *
어영부영 그녀가 선포한 영지전의 날이 도래했다.
라보 공작가문 측의 예상처럼 메디치 백작의 군대는 그 어떤 영지도 통과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발목이 잡혀서 그 앞에서 대기하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뭔가 새로운 수가 있나 하던 사람들의 긴장은 곧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그녀를 싫어하는 귀족일수록 더했다.
사교계 모임에서 그들은 그 일에 관해 떠들어댔다.
“그녀가 영지전을 선포했다니까 그렇구나 했지만 웃기는 일이잖아요.”
“저는 처음부터 미쳤나보다 했다니까요.”
“그러니까요. 그 어떤 영지도 그녀의 군대를 들이지 않을 것인데 어떻게 영지전을 할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무서워서 앞에서는 오들오들 떨기만 하던 사람들이 그녀의 패배를 눈앞에 뒀다는 생각에 신나했다.
* * *
라보 공작가문은 한껏 긴장이 풀렸다.
메디치 백작가문의 군대가 발이 묶였다는 소식이 빠르게 영지에 도착했으니까.
해가 지고 늦은 밤이 되었음에도 군대는커녕 개미 한마리도 다가오지 않았다.
“하암~”
성의 경비를 서던 병사 하나가 하품을 했다.
그리고는 그 옆에 있던 동료 병사에게 말을 걸었다.
“미친 여자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짓이냐?”
“그렇지. 평소보다 병사들을 더 세워놨잖아.”
“오늘 쉬는 날인 녀석들도 나왔다고 하니까.”
그들은 윗분들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벌어질 리 없는 일에 혹시나 싶어서 걱정하며 병사들을 더 배치하다니 웃겼다.
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어서 윗분들이 헛짓거리를 명령했다는 생각에 짜증이 났다.
“누가 봐도 불가능한 일이 가능할지 모른다고 병사들을 세워두는 꼴이라니 웃기는 일이야.”
“불만이 있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나? 우리에게 거부할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평민에 불과한 그들이 할 법한 생각이었다.
그들은 페루제 공작부인을 직접 대면하거나 간접적으로라도 경험한 적이 없었으니까.
병사 수가 많아도 나태해진 사람들뿐이라 경계는 허술했다.
그렇게 영지전이 벌어지기로 예정된 날이 지나가려고 하고 있을 때였다.
자신과 자신이 잡고 있는 것의 모습을 감춘 거대한 환수새들이 성으로 날아왔다.
동물의 형체를 한 정령인 환수.
환수의 종류는 많았고 그 중에 자신과 다른 이의 모습을 감출 수 있는 환수도 존재했다.
환수새들은 성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고도를 낮췄다.
그리고 성에 도착하자 새들이 잡고 있던 것이 떨어졌다.
떨어진 것은 사람이었고 그들은 안전하게 착지했다.
그들이 할 일은 하나였다.
“뭐, 뭐야?!”
갑자기 나타난 적들에 병사들은 당황했다.
“으악!”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그들은 엄청난 속도로 병사들을 죽였다
아직 살아 있는 병사들은 죽을힘을 다해서 적이 있음을 알렸다.
땅! 땅! 땅!
적의 침입을 알리는 종이 크게 울렸다.
그 와중에 환수새들은 끊임없이 병사들을 성으로 날랐다.
라보 공작성은 혼란에 빠졌다.
적들이 원하는 것은 명확했다.
“반드시 성문을 열어야 한다.”
“어서 막아라!”
“절대로 성문을 열게 해서는 아니 된다!”
기사들이 진두지휘하며 갑자기 나타난 적들을 상대했다.
그들은 고군분투했으나 급습에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적들의 실력이 상상보다 훨씬 뛰어난 덕분이었다.
“당장 이곳을 막아야 한다! 다른 병사들은?”
“지금 오고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오라고 해!”
“네!”
성벽 쪽에 있던 병사하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기 대군이 오고 있습니다!”
절대로 오지 못할 것이라 믿었던 메디치 백작의 군대가 성 코앞까지 온 것이다.
이 와중에 하늘에서는 적군이 내려오니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헉!”
“소드마스터?!”
검에 푸른 기운을 두른 이가 나타났다.
소드마스터였다.
소드마스터가 직접 성문을 열기 위해 그쪽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그런데 그 소드마스터는 로빈이 아니었다.
금발에 순한 눈웃음이 어울릴 것만 같은 사내였다.
“너희는 소드마스터인 나! 노엘을 따르라!”
“네!”
카엘족으로 구성된 범죄조직에게 부모를 잃은 노엑은 카엘족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는 이제까지 공식적으로 소드마스터임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의 주군이 허락하지 않았기에, 그녀가 카엘족인 조카를 후계자로 밀어주고 있었기에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노엘을 공식적으로 소드마스터임을 드러냈다.
그것도 큰 공을 세워서 공적을 인정받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전장에서 말이다.
그것은 노엘에게 힘을 실어주겠다는 그녀의 뜻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조카가 아니라 다른 인물이 그녀의 후계자로 선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 기회를 발판으로 삼아서 로빈의 무리를 몰아낸다!’
카엘족을 싫어하는 노엘에게는 어떻게든 공을 세워서 카엘족이 그녀의 후계자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할 사명감이 있었다.
“우리가 어떻게 소드마스터를 이겨?!”
“왜 소드마스터가 여기에 있는 거야?!”
무의 극에 달한 소드마스터를 상대할 병사와 기사는 없었다.
라보 공작가문 측의 사기는 현저하게 떨어졌고 싸울 의욕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라보 공작가문의 병사들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시체가 되어서 산처럼 쌓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끼이이익~
성문이 열리고 말았다.
대군은 손쉽게 라보 공작성에 입성했다.
승리는 메디치 백작의 차지였다.
그녀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을 해내고야 말았다.
어떻게 해낼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