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신벌
페루제 공작부인은 왕비궁에서 용의자로 머물게 되었다.
용의자라고 해도 그녀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없었기에 왕비의 손님으로 대우받았다.
그녀는 왕비궁에 기부한 자신의 미술품들이 전시된 방을 둘러봤다.
예술에 관해 모르는 이들도 입을 벌릴 명작들이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곳이 얼마나 철저하게 관리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는 그림 하나하나를 집중하며 봤다.
어느 한 부분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뚫어져라 봤다.
“흥~ 흥~”
“기분이 아주 좋은가봐?”
에레보스가 다정하게 물었다.
평소답지 않게 흥얼거리는 그녀가 신기했다.
자신이 해준 일이 그렇게까지 기분이 좋은 일이었나?
“네가 나의 부탁을 잘 들어줘서 일이 쉬워졌잖아. 당연히 기분이 좋지.”
그가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아래로 내리고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좀 더 어려운 일을 해달라고 해도 되는데… 매번 쉬운 일만 하라고 해…….”
겨우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을 부탁하다니 자신의 계약자는 너무 착했다.
에레보스가 이번에 한 ‘쉬운 일’은 라보 공작을 죽이는 것이었다.
라보 공작을 죽이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면 쉽다.
독에 능통하고 수많은 인재가 있는 그녀에게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려운 것은 라보 공작의 심장에 신성력으로 신벌이라는 문구를 새기고 죽이는 것이었다.
에레보스가 투정을 부렸다.
“너무 쉬워서 하품이 나왔다니까.”
“너라서 그게 쉬운 것이지.”
그녀는 에레보스의 투정을 받아줬다.
다정한 말투에는 에레보스를 향한 믿음이 있었다.
하여튼 라보 공작의 심장에 신벌이라는 글자를 새기는 것은 어려웠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가진 신물의 힘으로 글자를 새기는 것은 가능하나 죽인 후에 새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녀는 생각을 다르게 해봤다.
신벌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심장이 굳이 라보 공작의 심장일 필요가 있을까?
죽은 시체가 아니라면 남의 심장을 볼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라보 공작의 심장이 아닌 다른 이의 심장을 넣어도 알 길이 없다.
라보 공작의 심장을 본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것은 아무리 아내라고 해도 절친한 벗이라고 해도 불가능하다.
“라보 공작이 그동안 너무 나댔지. 네가 그동안 참아준 것을 고마워하지 않고 말이야.”
“각자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할 뿐이야.”
그녀는 라보 공작의 마음이 얼핏 이해가 되었다.
누군가의 아래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다.
누군가에게 명령할 권리가 줄어들 것이고.
누군가의 명령을 따라야 할 의무는 늘어날 것이며.
자신의 결정에 눈치를 보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공작으로 만인 위에 있던 그는 국왕도 아닌 타국의 여인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침몰하는 배와 같은 알펜 국왕을 지금도 따르는 것일지 모른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라보 공작이었다면 가문을 살리기 위해서 강자에게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한낱 자신의 감정이 가문보다 우선시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세상에서 오직 너만 그렇게 말해.”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이 왕국의 전부를 죽일 수 있음에도 언제나 자비롭게 그들에게 기회를 준다.
그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에 책임을 질 기회를 말이다.
에레보스는 라보 공작이 그녀의 자애로움에 이제까지 살았다가 죽게 되었다고 여겼다.
그는 달라졌다.
과거에는 무의미한 피를 흘리는 것이 싫었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예전에는 자신의 계약자들이 요구하는 것이 죽이는 것뿐이라서 싫었는데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가 누군가를 죽여 달라고 하면 그는 얼마든지 상대를 죽여줄 수 있었다.
그 수가 얼마가 되었든,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이 없이 모두 죽일 수 있다.
그녀가 자신이 원하는 것만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그녀를 방해하는 것들은 모조리 죽였으면 좋겠다.
그녀의 유일한 정령이자 친구는 오직 자신뿐이었으면 좋겠다.
“수틀리게 하는 놈들은 다 내가 죽여줄게.”
“훗!”
그녀가 웃었다.
세상을 구경하고 싶다던 친구는 지금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모습이 흥미로웠다.
세월은 사람을 변하게 하는데 정령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보다.
에레보스는 어느 날 갑자기 변한 것이 아니다.
서서히 변했다.
정령은 계약자의 갈망에 응답한다.
그런데 계약자가 정령에게 원하는 것이 없다면 그 정령의 가치는 어떻게 되겠는가?
계약의 의미는 무의미해지고 계약의 가치는 무가치하다.
게다가 에레보스와 페루제 공작부인은 아주 친한 벗이기도 했다.
매일 놀러 다니라며 돈을 주는 페루제 공작부인은 에레보스에게 주는 것에 비해서 원하는 것이 없었다.
라스타 왕국의 혁명에서 살아남은 귀족가문의 아이들을 모든 신전 아카데미에서 학대 정황이 있는지 감시하는 것이 제일 큰 부탁이었을 정도다.
그 외에 소소한 것들은 에레보스에게 기억할 가치도 없을 하찮은 것들이었다.
하도 소소한 것들만 부탁하다보니까 에레보스는 안달이 났다.
“진짜야.”
솔직히 그녀가 부탁하는 것들은 시간과 인력이 들어서 그렇지 그녀가 아랫사람들을 시켜서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에레보스가 없어도 되었다.
가끔 에레보스는 자신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에 불안했다.
게다가 에레보스는 란델리노와 같이 빅토르를 죽이지 않았는가.
그 죄가 드러나지 않겠지만 혹시라도 그녀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히 에레보스를 외면할 것이다.
다시는 자신을 부르지 않을 것이 뻔했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은 에레보스에게 두려움을 줬다.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하면서 그녀가 에레보스에 관해 알게 되었듯이 그도 그녀에 관해 알게 된 것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 정말 아니다 싶으면 네가 다 죽여줘.”
“알았어! 언제든 말만 해.”
페루제 공작부인은 환하게 웃었다.
솔직히 알펜 국왕과의 싸움은 질래야 질 수 없는 싸움이었으나 사람일은 모르는 법이다.
만약을 대비해도 나쁠 것은 없었다.
* * *
라보 공작의 심장에 신성력으로 새겨진 ‘신벌’에 관해 입막음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수도 전역으로 그 이야기는 빠르게 퍼졌다.
당연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심장을 바꿔치기하면서까지 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라보 공작이 신벌을 받았다고 믿게 만들기 위함이다.
사람들은 모이면 라보 공작의 심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 소문이 사실일까?”
“무슨 소문? 수도에는 워낙 소문이 많잖아.”
“무슨 소문이긴! 요즘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뭐겠어?! 라보 공작이 신벌을 받았다는 소문이지!”
“에이, 거짓이겠지. 어떻게 심장에 신벌이라는 글자가 새겨질 수 있어?”
“그 불가능한 일이 벌어졌으니까 라보 공작이 신벌을 받았다고 사람들이 수근거리지.”
백성들이 신벌을 진짜로 믿게 한 것에는 그 소문에 신빙성을 더해준 전직 신관들 덕분이었다.
기자들은 라보 공작의 시신을 조사한 전직 신관들을 찾아갔다.
“정말로 라보 공작각하의 심장에 신벌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었습니까?”
“…….”
“그 글자가 신성력에 반응한 것은 사실입니까?”
“…….”
“백성들은 알 권리가 있습니다. 제발 진실을 알려주십시오!”
전직 신관들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본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인 동시에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신벌을 직접 확인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충격을 줬다.
쫓겨나면서 신을 향한 믿음이 깨졌던 이들도 다시 믿음이 생겼을 만큼.
“라보 공작은 마땅히 죽었어야 할 인물이었군.”
“우리가 모르는 큰 죄들을 저지른 것이 분명해.”
“맞아. 그러니까 신벌이 내려진 것이지.”
부정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전직 신관들로 인해 백성들은 그 소문을 믿기 시작했던 것이다.
민심이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알펜 국왕이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직접 불렀고 만났다.
“무슨 수를 쓴지는 모르나 그 여인의 간악한 수였네. 그 수작질에 백성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 여인이 누군지는 모르나 글자는 신성력에 반응했습니다.”
전직 신관들은 그가 말하는 ‘그 여인’이 누군지 잘 알았다.
그렇지만 굳이 그 여인을 안다고 말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없었다.
신성력이 라보 공작이 신벌을 받았다고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그들은 확신했다.
“신성력을 간악한 수라고 말하다니요. 이는 신성모독입니다.”
“그 성스러운 기운은 일개 인간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낼 수 있는 기운이 아니다.
맞는 말이다.
심장에 새겨진 기운은 신물에서 나온 신성력이었으니까.
“그는 죽기 전까지 특별한 일이 없었습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영지전을 하겠다는 서신을 받았지.”
라보 공작은 공교롭게도 영지전에 대비하기 위해서 가신들과 회의를 하려고 하던 때에 죽었다.
국왕은 페루제 공작부인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영지전을 하려고 라보 공작을 죽였다고 여겼다.
“그 서신으로 인해 죽었다는 말씀입니까? 독살이 아님을 직접 확인했고 신성력을 확인했습니다.”
국왕의 말에 반박하면서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미칠 것 같았다.
라보 공작가문은 친왕파의 한축을 맡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힘이 약화된다는 것은 친왕파의 힘이 약해진다는 뜻이었다.
“폐하께서 어떤 상황에 처해 계신지 잘 압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을 고려해도 신의 뜻을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들은 알펜 국왕이 입막음을 위해 자신들을 죽이려고 할지라도 굴복하지 않겠다는 눈빛을 보여줬다.
알펜 국왕이 그들을 죽일 리가 없었다.
아니, 죽일 수 없었다.
그들을 죽인다는 것은 국왕이 라보 공작이 신벌을 받았다는 것을 감추려고 한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괜히 민심이 요동치며 죄인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백성들이 왕실에 등을 돌릴 것이다.
“백성들의 동요를 생각해서라도 침묵해주게.”
“노력해보겠습니다.”
신관들에게 부탁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들은 노력하겠다는 대답으로 국왕의 부탁을 지킬 수 없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들이 국왕의 부름을 받았다는 소식은 기자들에게 닿았다.
그 사실을 알게 해 준 배후가 있었기에 빠르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전보다 더 집요하게 그들을 찾아다니며 질문을 던졌다.
“라보 공작각하의 시신을 확인하던 날, 보았던 것을 말해주십시오!”
“소문처럼 신벌이 맞는 것입니까?”
“진실인지 거짓인지만 말하면 되는데 왜 침묵하시는 것입니까?”
그들이 산책을 할 때도, 잠시 창문을 열었을 때도 그 외의 상황들에서도 기사들은 그들에게 들이댔다.
지긋지긋하게 쫓아다니는 기사들에게 질린 전직 신관 하나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신벌을 목도했고 나는 사라졌던 믿음을 되찾았습니다.”
그 말은 큰 파장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