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라보 공작가문의 운명
가신들이 불안해하던 순간에 영웅이 나타났다.
“라보 공작령은 어떴습니까?”
“왜?”
공작 부인이 물어보자 반대하려던 가신들이 입을 다물었다.
“거기는 알펜 왕국의 동쪽에 있다. 카플란 왕국과 경계를 하고 있으며 아슬란 제국이 공격한다면 얻게 될 지역은 라보 공작가문과 붙어 있지.”
아슬란 제국이 카플란 왕국이 초입을 점령하게 된다면 라보 공작령은 바로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 지역과 인접하여 공격하기 용이했던 것이다.
리스크가 컸다.
아슬란 제국은 잊을만하면 카플란 왕국을 공격했으니까.
“라보 공작령은 카플란 왕국과 아슬란 제국과 인접하여 상업적 활동이 활발한 곳입니다. 또한 알펜 왕국의 곡창지로 식량수급에 좋은 곳이고요. 이곳을 얻게 된다면 무역으로 인한 이익과 저장할 수 있는 곡물도 늘어날 것입니다. 리스크에 비해 이익이 더 크다고 봅니다.”
가신이 그 물음에 답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눈을 감았다.
툭. 툭. 툭.
책상을 손으로 작게 두들겼다.
꿀꺽~
의견을 낸 가신이 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마음에 드는 말이었어.”
그 말에 가신이 웃었다. 입꼬리가 하도 올라가서 찍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군을 라보 공작령까지 움직이지?”
“그것이…….”
가신들은 그녀가 라보 공작령을 원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관심이 없었다면 이런 물음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라보 공작령을 원하는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라보 공작령을 얻으면 좋았다.
단점보다 장점이 많았다.
한가지 문제만 아니었다면 제일 먼저 나왔을 지역이었다.
그 문제는 바로 ‘어떻게 군을 이끌고 거기로 갈까?’였다.
라보 공작령까지 가기 위해서는 알펜 왕국의 많은 영지를 지나가야 한다.
자신의 영지로 대군을 끌고 지나가겠다고 하는데 알겠다고 성문을 열어줄 세상에 영주는 없었다.
군을 이끌고 지나만 갈지 자신의 영지를 공격할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설령 처음에는 지나만 갈 요량이었다가 변심이라도 한다면 성안에서 바로 적들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 위험을 감당하느니 문을 열지 않는 것이 맞았다.
문을 열지 않아도 될 명분은 충분했다.
그들의 방문을 공격으로 해석하면 그뿐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대답을 머뭇거리는 가신에게 선심을 쓰듯이 말했다.
“어려워하지 말고 말하라.”
“알겠습니다.”
주군의 허락을 받자마자 그는 입을 열었다.
다른 가신들은 생각도 못한 방식이었고 페루제 공작부인은 가신 중 누구라도 말하길 원했던 답이었다.
그녀가 씨익 웃었다.
“그러면 큰틀은 정해졌으니 이제 세세한 것을 조정하도록 하지.”
회의의 방향이 정해졌다.
아까의 침묵이 장난이었다는듯이 회의장은 열띤 의견조율로 바빠졌다.
“그러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가신들이 밝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나서면서 그들은 이야기를 나눴다.
“앞으로 얻을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이렇게 판을 다 깔아주는데 지면 죽어야지요.”
“그렇기는 하지요.”
그들은 승리를 확신하며 전리품을 머리에서 떠올리고 있었다.
* * *
얼마 뒤에 라보 공작령과 수도에 있는 라보 공작에게서 서신이 갔다.
그 서신을 받은 라보 공작은 부르르 손을 떨었다.
눈은 붉게 충혈되었다.
“감히 이따위 짓거리를 하다니!”
그가 서신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겉옷을 입고 저택을 나가버렸다.
마침 귀부인들과 사교모임을 갔다가 돌아온 라보 공작부인과 문 앞에서 마주쳤다.
“여보, 오늘은 저택에 계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지금 그런 것을 물어볼 때가 아니오! 당신은 당장 수도에 있는 가신들을 당장 이곳으로 부르시오.”
라보 공작은 자기 할 말만 하고 직접 말을 타고 나갔다.
그녀는 다급해하는 남편의 모습에 당황하며 집사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그것이 메디치 백작에게 서신이 왔습니다.”
“그녀에게? 무슨 내용인지는 아는가?”
집사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서신을 읽으시자마자 분노하며 나가셔서 그 내용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어요.”
라보 공작부인은 남편이 서신을 읽었을 장소인 서재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구겨진 상태로 바닥에 있는 서신을 펼쳐봤다.
“이, 이게 무슨 말이야?”
그녀의 손도 라보 공작처럼 떨렸다.
그 내용은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집사에게 그 서신을 보여줬다.
집사의 반응도 공작부인과 다르지 않았다.
“도대체 어찌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습니까?”
한번도 생각하지 못한 일에 집사는 머리가 멍해졌다.
그렇지만 라보 공작부인의 일갈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집사! 당장 수도에 있는 가신들을 불러 모으게.”
“알겠습니다.”
집사에게 명령을 내리고는 급하게 서신을 하나 써내려갔다.
“이 서신을 라보 공작성에 보내. 그리고 죽을힘을 다해서 달리라고 하게.”
“네!”
라보 공작가문의 저택에서 수많은 시종이 밖을 나섰다.
이 긴급한 상황을 전하기 위함이다.
* * *
라보 공작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왕궁도 난리가 났다.
특히 대낮부터 홀로 술을 마시던 국왕에게는 날벼락이었다.
시종의 안내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는 라보 공작의 무례는 잊어버릴 소식이기도 했다.
“라보 공작, 그대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페루제 공작부인이 선전포고를 해왔습니다.”
“미친 여인이 아닌가! 공작 가문끼리의 영지전이라니!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다!”
당연하게도 페루제 공작부인을 불렀다.
국왕의 부름을 전하기 위해 벨로나 공작가문의 저택에 갔던 시종은 국왕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시종이 잘못한 것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뭐? 다시 말해라.”
“그것이…….”
“어서 말하라니까!”
차마 말을 하지 못하는 시종을 그는 다그쳤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잠시 일이 생겨서 메디치 백작령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언제?”
“어제 저녁입니다.”
“지금부터 쉬지 말고 말을 타서 그녀를 만나라! 그리고 데려와! 왕실기사들도 동행하도록 허하마.”
“네.”
왕에 분노에 시종이 얼른 달려 나가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 움직임을 멈춰야 했다.
“벨로나 공작은?”
“몬스터들이 기승을 부리는 지역이 있어서 토벌하러 갔습니다.”
“맞아. 그랬지. 며칠 전에 말하고 떠났는데 잊어버렸군.”
알펜 국왕은 며칠 전에 벨로나 공작이 급작스러운 몬스터들의 집단발광을 보고하고 수도를 떠났다.
자신의 사생아를 입적한다는 목적을 이루고 떠나서인지 발걸음이 가볍기 그지없었다.
불리해진 자기 상황에 빠진 알페 국왕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귀족들부터 평민들까지 중립파 귀족들의 사형과 멸문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몬스터 토벌로 영웅이 된 벨로나 공작이다.
평소라면 다른 기사들과 귀족으로 토발단을 구성하고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리하고 벨로나 공작을 수도에 있도록 한다면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왕실의 안위를 위해서 벨로나 공작을 수도에 두고 몬스터들의 위협을 방관하는 것은 왕실을 향한 불만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라보 공작,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 있게. 그녀가 오면 부르지.”
“알겠습니다.”
라보 공작은 왕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가신들과 향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논의해야 했기 때문이다.
라보 공작성에도 대비를 단단히 하도록 명령을 내려야 하고 말이다.
* * *
다음 날 아침, 수도는 페루제 공작부인으로 인해 다시 흔들렸다.
[메디치 백작과 라보 공작 간의 영지전 발발 예정?!]
[메디치 백작이 영지전을 선언하다!]
[라보 공작가문을 위협하는 이는 누구인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기사들이 쏟아졌다.
그녀의 행보를 경계하는 기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조롱이었다.
[인접하지 않은 영지에 영지전을 선포하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정신상태 심층분석]
[무슨 정신머리로 라보 공작가문과 싸우려고 하는가?]
[메디치 백작의 군대를 지나가게 해 줄 가문들은 있는가?]
군대를 이끌고 라보 공작령까지 갈 방도가 없는데 영지전을 선언하다니 조롱거리가 될 만했다.
“중립파 귀족들이 몰살 된지 얼마나 지났다고 영지전이야?”
“라보 공작은 친왕파지? 또 폐하께서 건수를 만들려고 한 거 아냐?”
“설마…….”
“중립파처럼 당하지 않으려고 먼저 영지전을 선언한 거지.”
“그런가?”
그 기사들이 수도의 민심을 흔들고 나서야 페루제 공작부인이 수도로 돌아왔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왕궁에 왔다.
그녀는 알펜 국왕을 알현하였고 그곳에는 살아남은 귀족들이 함께였다.
“폐하, 무슨 일로 영지로 돌아가던 저를 급히 부르셨습니까?”
“라보 공작가문에 영지전을 선언했더군.”
“맞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문제가 됩니까?”
국왕이 살기를 감추지 않음에도 페루제 공작부인은 전혀 기죽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굴었다.
표정만 보면 무지함 그 자체였다.
그것이 사람을 미치고 팔짝뛰게 만드는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임을 느끼게 해줬으니까.
“라보 공작령과 메디치 백작령의 거리는 멀지.”
“그런데요?”
페루제 공작부인이 비스듬하게 서고는 팔짱까지 꼈다.
어디 한번 나불거려보라는 태도였다.
일국의 국왕을 상대로 엄청난 무례를 저질렀다.
국왕은 그 무례를 힐난한 입장이 아니었다.
친왕파를 제외한 귀족들의 숙청에 살아남은 귀족들의 분위기가 흉흉했다.
괜히 그녀를 자극해서 일을 더 키울 순 없었다.
그녀는 명분 하나를 잡고 늘어져서 상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데 능통했기 때문이다.
“여러 영지를 지나야 갈 수 있는 곳이고 군이 자기 영지를 지날 수 있도록 허락할 영주는 없지. 그러니까 그대의 영지전 선포는 개소리와 같아.”
“…….”
“그런데 왜 자네라면 그 개소리를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을까?”
국왕은 딱딱하게 말했고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다른 귀족들이라면 위축이 되었겠지만 그녀는 그 모습을 비웃었다.
“그냥 직설적으로 원하는 바를 말하시지요.”
“영지전 선언 철회하게.”
“영지전은 영주의 고유권한입니다.”
국왕이 원하는 것을 말하자마자 바로 거부했다.
고민하는 척조차 하지 않는 빠름이었다.
알펜 국왕의 명령에 포기할 영지전이었다면 처음부터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수많은 기사들이 자네를 조롱하는 내용이야. 우아함을 강조하는 사람이 조롱거리가 되고 싶나?”
“제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잠시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그리고 폐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개소리도 저라면 이룰 것 같다고요.”
잠시의 조롱만 참으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그 ‘잠시’를 참지 못해서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를까?
그녀가 그런 어리석은 여인이었다면 루비로즈 가문은 그녀의 손아귀에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차근차근 밟고 올라갔기에 얻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인내해야 할 때를 잘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