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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211화 (211/221)

211화 대비의 불안

헬리오 대공이 독에서 살아남는다면 그녀와 그녀의 가문은 죽은 목숨이었다.

헬리오 대공이 그들을 몰살할 명분으로 충분했으니까.

물론 독이 아니었기에 증좌를 찾지 못하겠지만 대비 측에서는 그것을 몰랐다.

그래도 왕궁에 암살자들을 들인 죄를 물어서 죽게 되겠지만 말이다.

“그를 죽이지 못한다면 그대의 주인과 한 협정을 지킬 이유가 없어!”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주군은 약속은 지키는 분이시니까요.”

그가 안심하라는 듯이 자신있게 말했다.

그 당당한 모습에도 대비는 불안함을 진정하지 못했다.

그녀가 짜증스러워하며 비아냥거렸다.

“그대의 주군은 알펜 왕국에서 우아함을 떨며 안전하게 있어서 그런가?”

“주군께서는 우아하신 분이시죠.”

사내는 상냥하게 대답했다.

비아냥에도 전혀 기분이 나빠보이지 않았다.

페루제 루비로즈의 사람들은 그러했다.

마치 그녀의 분노를 하찮은 들개가 짖어대는 것처럼 굴었다.

모시는 주인을 닮아서인지 그들은 언제나 오만함의 끝을 보여줬다.

한 왕국의 대비를 마주하면서도 전혀 굽신거림이 없었다.

윗사람 대우를 해주지만 그것으로 끝인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눈에 들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과 비교가 되었다.

설령 그것이 대비에게 무언가를 얻고 싶어서 그런 것일지라도 말이다.

그들의 태도는 페루제 루비로즈가 줄 수 있는 것을 대비는 줄 수 없다고 확신한다는 생각을 심어줬다.

“또한, 그분께서는 실패할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사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대비가 그 말에 잠시 머뭇거렸다.

그 기백에 순간적으로 압도당한 것이다.

그래도 연륜은 무시하지 못하는 요소라서 그녀는 곧 정신을 차렸다.

“아까 내가 말했지 않는가! 대공이 멀쩡해보였다니까!”

“대비마마…….”

사내는 대비가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아주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대비마마, 며칠 동안 방 안에서 나오지 않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두발을 멀쩡하게 바닥에 대고 서고 있다고요?”

“일부러 아픈 척을 한 것일 수 있고 아니면 치료를 마친 것일 수 있지.”

그는 대비의 머리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해졌다.

겨우 이런 수준의 여인이 어떻게 스스로를 자신의 주군과 동급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대비는 주군에게 라이벌 의식을 세우기에는 너무 부족했다.

“솔직히 헬리오 대공은 절대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의사는 그 원인을 모를 것이고 알아도 해결할 방도가 없으니까요.”

“그 독이 도대체 무엇인데 이리 확신해?!”

“그것에 관한 정보 공유는 협정에 없었죠.”

사내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것이 그리 궁금했으면 협정을 맺을 당시에 독에 관한 정보공유도 포함하던가.’

물론 그것을 요구했어도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애가 타는 것은 대비 쪽임을 잘 알았으니까.

무엇보다 자신의 주군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남과 나누지 않는다.

가치가 있는 자에게 아량을 베풀지언정 가치도 없는 것과 공유라니?!

말도 안될 일이다.

대비가 사내의 눈빛에 어렴풋이 스쳐간 비웃음을 눈치챘다.

이가 절로 갈렸다.

“으득.”

이를 갈뿐 대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러다가 페루제 루비로즈가 이 일에서 손을 뗀다면 큰일이 나는 것은 대비와 그녀의 가문이었다.

헬리오 대공이 죽어서 왕국이 난리가 난다고 해도 그를 따르던 세력은 재상으로 인해 어느 정도는 건재할 것이다.

그 세력이 가진 것은 부와 권력도 있지만 병력도 있었다.

재상이 이어받은 대공의 군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페루제 루비로즈의 군대가 필요했다.

대비와 페루제 루비로즈 중 약자가 누군지 명확한 것이다.

그러니까 왕국을 팔아먹을 불공정 협정을 맺은 것이겠지 싶었다.

“헬리오 대공이 정말로 아팠다가 나았다면 침대에서 앉아서 대비마마를 맞이했을 것입니다. 아픈 척하려고 해도 같습니다.”

“…….”

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의 말이 맞는 듯했다.

정말로 곧 나을 병이라면 굳이 아픈 것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침대에서 앉아서 병문안 와줘서 고맙다고 하면 될 일이다.

어차피 곧 나아서 정상적으로 활동할 것이니까.

“침대 쪽으로는 가보셨습니까?”

“침대 쪽? 창가에서 이야기를 나눴네.”

“침대에 있는 이불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정갈하게 정리가 되어 있더군.”

침대에서 쉬고 있던 사람이 이불을 정갈하게 정리하고 한다?

시종 하나가 있기는 했으나 평소 털털하기로 소문난 대공이다.

이불을 침대에 각맞춰서 정돈하라고 하지 않을 사람이다.

권력자가 무언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는 이유는 2가지다.

하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감추기 위함이다.

“헬리오 대공이 죽기 전에 경험할 증상은 여러가지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피를 토하는 것입니다.”

“피를 토한다?”

“네,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요.”

대비가 박수치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아! 그러면 침대 근처에 갔어도…….”

“피냄새가 진동했겠죠.”

그녀는 정말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었다.

헬리오 대공이 강건하다는 믿음이 준 불안감은 그가 자신의 상태를 감추고 있다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사내는 이런 쉬운 일을 하나하나 알려줘야 한다는 사실에 머리가 아팠다.

한동안 동맹관계로 그녀 곁에 있어야 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는 대비의 기분을 한껏 풀어주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는 밖에서 기다리던 부하에게 귓속말했다.

“주군에게 우리 측 사람을 더 보내달라고 하거라.”

“알겠습니다.”

대비는 도저히 같이 큰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태도로 보는데 그녀의 가문도 통제할만한 능력이 부족했다.

그 가문에서 능력이 있었다면 이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 설령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 * *

페루제 공작부인은 의자에 앉아서 턱을 괴고는 혼잣말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으려나?”

그녀가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그대들은 어찌 생각하느냐? 내가 무엇을 해야 하지?”

그녀 앞에는 많은 가신들이 늘어져서 앉아 있었다.

그들은 주군의 물음에 답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고통에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는 것이 맞지요.”

“어차피 헬리오 대공의 죽음은 확정이 아닙니까?”

“앞으로 할 일의 준비를 좀더 탄탄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무슨 소리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것이오!”

“그 때도 완벽하게 준비가 되어 있어야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가신들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헬리오 대공이 어차피 거동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세워놓았던 계획을 빨리 실행하자는 측과 예상외의 변수가 생길 가능성을 고려해서 조금 더 지켜보자는 측이었다.

“하암”

페루제 공작부인이 그 모습을 보고 하품을 크게 했다.

가신들이 크게 움찔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하품을 했다는 것은 지루하다는 것이고 지루하다는 것은 그들이 가치가 없는 헛소리를 짓거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직도 제대로 된 합의를 이끌지 못하다니 놀랍군. 그따위로 할 것이면 지금 당장 이곳에서 나가.”

“죄송합니다!”

“그리고 내가 대공이 언제까지 살아 있을지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었지 않느냐? 서로 다른 의견으로 싸우라고 자리를 마련한 것이 아니다.”

“죄송합니다!”

그녀의 서늘한 말에 가신들이 손을 떨었다.

“너희의 주군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도 파악하지 못하다니. 쯧.”

그녀가 혀를 차자 그들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회의장은 조용해졌다.

모두가 어떤 말을 꺼내야 하는지 가늠조차 하지 못했다.

침묵을 유지하던 소수가 입을 열었다.

“어디를 쳐야 할지 정해야 할 것 같은데 카플란 왕국은 어떠신지요?”

한 가신의 의격에 빠르게 반대의견이 나왔다.

“카플란 왕국은 라스타 왕국에서 주는 지원금에 재정 부족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굳이 군사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라스타 왕국 국경지역의 영지들이 은근슬쩍 라스타 왕국에 편입하려는 막아야 하는 상황이 아닙니까.”

카플란은 이단을 믿는 동쪽의 아슬란 제국의 공격에 병사들도, 재정적으로도 많은 손해를 봤다.

에클레시아를 믿는 카플란 왕국, 라스타 왕국, 헬리오 왕국, 알펜 왕국.

에클레시아의 신실한 신자이자 성모인 그녀는 이 4개국을 아슬란 제국으로부터 지켜야 했다. 그리고 카플란이 밀리면 다른 왕국들도 아슬란 제국에게 위협을 당하게 될 것이었다.

그런 위기감은 탐탁지 않아도 카플란 왕국이 아슬란 제국의 침략을 버틸 수 있도록 최소한의 지원을 하게 만들었다.

그 지원으로 카플란 왕국이 라스타 왕국에 의지하는 기간이 길어진 것이 문제였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이 있다.

라스타 왕국에 가까운 영지의 귀족들은 카플란 왕실보다 라스타 왕국을 더 위로 쳤다.

일부는 말도 안되는 명분과 과거에 라스타 왕국이었던 이력을 근거로 라스타 왕국에 자신들이 라스타 왕국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주장이었다.

그런 식이면 과거에 점령당한 적이 있는 영지들은 모두 원래의 왕국에 편입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라스타 왕국에 비해 카플란 왕국의 영지들은 발전이 덜 되었고 재정적으로 라스타 왕국의 영지들보다 훨씬 부족했다.

왕국의 지역간 균형을 맞추기 위해 많은 자금이 들고 많은 정책을 고심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카플란 왕국을 공격해서 얻을 이득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가신이 다른 주장을 내뱉었다.

“헬리오 왕국이 좋지 않습니까?”

그 물음에 페루제 공작부인만 아니라 다른 가신들도 경멸을 눈빛으로 드러냈다.

헬리오 왕국의 대비 측과 페루제 공작부인만의 비밀 협정이었기에 대부분은 헬리오 왕국을 공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몰랐다.

그러나 주군이 평소에 헬리오 왕국 공격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보면 그것은 오답임을 유추해볼 수 있다.

그 유추조차 못하는 놈이 여기에 앉아 있다니 짜증이 날 따름이다.

“헬리오 왕국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전에 말하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얼굴이 하앟게 질린 가신이 빠르게 사죄했다.

곧 다른 가신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알펜 왕국은 어떠십니까?”

그 말에 페루제 공작부인의 한쪽 눈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가신들은 그녀의 반응에 그들이 가야 할 방향을 알아차렸다.

알펜 왕국에서 그들이 공격할 영지를 정해야 함이다.

“어떤 영지를?”

“…….”

물음에 가신들은 침묵했다.

가장 좋은 곳은 메디치 백작령의 주변 영지들이었다.

식량보급도 편이하고 병사들의 이동도 편했으니까.

그러나 이미 주변 영지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굳이 공격하여 직접 관리할 이유가 없었다.

일만 늘어나는 꼴이었다.

점령한다고 해도 지금보다 큰 이익을 얻을 근거가 없었다.

그들이 넓은 곡창지를 가진 것도 특별한 자원을 가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신들이 슬쩍 서로를 바라봤다.

누구라도 좋으니 의견을 냈으면 했다.

점점 날카로워지는 주군의 눈빛이 느껴졌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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