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비극의 배후
헬리오 대공이 피를 토하며 고통스러워하던 시각.
페루제 공작부인은 저택 밖으로 나왔다.
은밀하게 나올 법도 하건만 그녀는 정문으로 당당하게 마차를 타고 나갔다.
마차는 어떤 상단의 건물 앞에 섰고 그녀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용병으로 보이는 이들과 한 사내가 있었다.
겉은 용병으로 보였으나 규칙적으로 나있는 굳은살은 그들이 같은 검법을 익혔다는 뜻으로 그들이 병사임을 알게 해줬다.
사내가 굽신굽신거리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각하, 오셨습니까?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상단주, 오랜만이네. 나야 평소처럼 지냈지. 일은 잘 되었는가?”
“네. 그쪽에서 거리낌 없이 손을 잡았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사무실에서 해드리겠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그가 앞장서서 계단을 오르자 그녀도 우아하게 따라갔다.
상단주는 자신의 집무실에 있는 서재에서 어떤 책을 눌렀다.
그러자 벽 한쪽이 돌아가면서 열렸다.
그들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화려한 방이었다.
명장들이 한 땀 한 땀 신중하게 만든 가구들이 있었고 온갖 예술품과 귀한 아티팩트가 과하게 않게 잘 배치되었다.
그 방 자체가 하나의 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각하의 취향에 맞췄습니다. 어떠십니까?”
“그대만큼 나의 안목을 맞춰주는 사람은 많지 않지.”
상단주는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이 방을 꾸미기 위해 몇 달을 고심한 보람이 있었다.
그녀는 눈이 아주 높았고 그것을 만족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던 것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자리에 앉고 고개를 까닥거렸다.
앞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차가 대령되어 있었다.
상단주가 그녀 맞은편에 앉아서 말했다.
“각하의 예상처럼 대비가 안달이 났습니다.”
“그렇겠지. 헬리오 국왕은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그가 나이가 들수록 불안하겠지.”
국왕이 어리면 대비가 그것을 명분삼아서 정치를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다.
선왕이 급사하였을 당시에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왕국 내의 대귀족의 반역(물론 왕실을 위해서 일어섰다는 명분을 가졌다.)과 헬리오 대공이 빠르게 싹 죽여 버린 영향이 컸다.
“국왕이 성년이 될 때가 몇 년 남지 않았죠. 게다가 대비와 그녀의 가문으로는 헬리오 대공을 이기기는 역부족이고요.”
“헬리오 대공만 없었으면 국정운영을 하겠다고 대놓고 나섰을 여자지.”
“헬리오 대공이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서 숨죽이고 있던 여자이기도 합니다.”
헬리오 왕국의 대비는 한 왕국을 책임질 그릇이 되지 못했다.
정말로 헬리오 왕국을 가지고 싶었으면 헬리오 대공과 싸워야 했다.
설령 그것이 가문과 자신을 파멸과 죽음으로 몰아세울지라도 말이다.
한 왕국을 가지는 일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녀는 그리하지 못했다.
그녀의 가문도 그리하지 못했다.
차라리 헬리오 대공이 완전히 권력을 장악하기 전에 대비와 그녀의 가문이 목숨을 걸고 싸우려고 들었다면 그도 한걸음 물러섰을 것이다.
왕국이 대귀족들의 반역으로 흔들린 상황에서 더는 분열이 일어나면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신들의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그들은 싸움 자체를 포기했다.
신이 내린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스스로 한번 포기한 주제에 아직도 욕심을 놓지 않았다니 황당할 정도로 어리석어.”
대비는 권력욕에 빠져서는 무엇이 옳은지도 모를 바보였다.
‘하긴 그러니까 외세와 힘을 합치기로 했겠지. 헬리오 대공을 죽이기 위해서 왕궁에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해주기까지 하고 말이야.’
그녀가 차를 한입 마셨다.
만족스러웠다.
자신이 딱 좋아하는 온도였다.
“협정서는?”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많은 부분이 자신들에게 불리할 것인데 용케 허락하더군요.”
상단주가 협정서를 그녀에게 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대비였다면 절대로 서명하지 않았을 조약들이 있었다.
거의 왕국을 타국에 팔아먹는 수준이다.
이 협정서가 알려진다면 대비는 헬리오 왕국의 역사에 매국노로 이름을 남길 것이다.
“라스타 왕국 상단의 관세관리권한은 라스타 왕국이 가진다. 세금을 최소화할 생각이니까. 나쁘지 않지.”
“상단들의 부담이 확실히 줄 것입니다. 그리고 헬리오 왕국의 재정은 줄어들 것이고요.”
라스타 왕국의 상단들에게는 아주 좋은 소식이었다.
그녀는 상인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편이었고 그것은 세금에도 반영이 되었다.
최소의 세금만 받고 나머지 금액으로 상단이 자국 내에서 많은 물품을 사고 많은 사람을 고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세금이 기존보다 훨씬 줄어든다는 것은 헬리오 왕국의 재정에 구멍이 난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다른 곳의 세금을 늘릴 것이 뻔했다.
그것은 백성들의 삶을 힘들게 하리라.
헬리오 왕국이 망할 징조처럼 느껴졌다.
세상 어디에도 자국의 세금관리를 타국에 맡기는 경우는 없었다.
그것이 그 타국의 상단에 한해서라도 말이다.
“솔직히 영사재판권을 인정해줄 것이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영사재판권이란 영사가 헬리오 왕국 내에서 자국민에 관련된 소송을 라스타 왕국의 법률에 따라 재판하는 것이다.
자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죄인을 라스타 백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처벌할 수 없다니?!
헬리오 왕국의 백성들이 알면 기가 찰 노릇이다.
철저하게 헬리오 왕국을 약자로 여기지 않으면 내밀 수 없는 조약들이었다.
그 어떤 왕국도 이따위 조약을 제안하지도 않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 외에도 어처구니없는 조약들이 있었으나 넘어가겠다.
그녀가 협정서를 꼼꼼하게 읽었다.
그녀가 원했던 조항들은 그대로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재차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륙의 정세를 좌우할 중요한 협정이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읽고 또 읽었다.
훗날 추가할만한 조항이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었다.
이미 헬리오 왕국을 뜯어먹을 것들을 해냈음에도 부족했다.
상단주는 조용히 그녀가 협정서를 읽는 것을 기다렸다.
‘정말 무서운 분이다.’
이제껏 어떤 이가 이렇게 자국에 유리하고 타국에 불리한 조약을 생각해낼 수 있을까? 아니, 누가 이따위 조약이 성사되도록 할 수 있을까?
이것들이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페루제 루비로즈 메디치 백작뿐이다.
그는 그녀를 따르기로 한 선택은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여겼다.
처음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가 협정서를 손에서 놓았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들의 상태는?”
“좋습니다. 그래. 그러면 가볼까?”
“안내하겠습니다.”
* * *
그들은 건물을 나갔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수많은 약초가 말려져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말려진 약초를 신중하게 만졌다.
“너무 말랐구나. 내일 물을 좀 뿌려 놓거라.”
“아! 죄송합니다.”
그녀의 무심한 말투에 상단주가 긴장하며 사과했다.
수많은 인재들을 밟고 겨우 그녀의 곁에 섰다.
그녀의 기분을 언짢게 할 작은 빌미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완벽하게 일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다시는 이런 실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렴.”
그녀가 다른 약초를 만졌다.
동시에 빠르게 말려진 약초들을 봤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이 약초는 조금이라도 녹색 잎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거기에는 붉은 잎 사이에 있는 녹색 잎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간만에 눈도장을 제대로 찍을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대로라면 미움을 받을 것 같았다.
허리를 숙이고 떨고 있는 상단주를 내려던 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되었어. 사람이 실수도 할 수 있지.”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의 얼굴은 무관심 그 자체였다.
말의 진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진심으로 넘어가주는 것인지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표정인지 애매했다.
상단주는 당장 약초관리를 담당하던 것들을 물갈이하리라 마음먹었다.
완벽하게 했다고 하여 굳게 믿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게 했다는 것에 화가 났다.
그들은 여러 약초를 두루 살폈다.
그녀는 잠시 멈춰서 눈을 찌푸릴 때가 있었으나 따로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상단주는 약초의 상태가 완벽하지 않음을 눈치챘다.
내일 출근할 약초관리자들은 크게 혼이 날 것이고 대거 잘리게 될 것이다.
그래도 그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서일까?
상단주는 없던 용기가 생겼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약초들로 만든 약을 헬리오 왕국에 납품하도록 하셨습니까?”
“그게 중요하니?”
“헬리오 대공을 죽일 독이 아니지 않습니까?”
“소드마스터를 죽일 수 있는 독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구나.”
그녀는 모른 척했다.
“그리고 소드마스터가 죽을 독이라면 다른 사람들은 이미 죽고도 남았지.”
“그렇지요.”
상단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너무 과한 생각을 했나? 하긴 소드마스터를 죽일 독이 있다면 그것을 마신 다른 사람들도 모조리 죽었겠지.’
그가 홀로 그녀의 말을 수긍했다.
소드마스터를 죽일 독이 있다면 헬리오 대공만 죽이고 나면 그뿐이지 그것을 구매한 왕궁의 여러 사람들까지 죽일 이유는 없었다.
그리되면 배후로 그들이 지목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약에 관해서 뭐라고 하지?”
“기력을 주는 약이라며 입소문을 타면서 점점 구매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야지. 철저한 검증을 통해서 만든 약이니까.”
철저한 검증이라는 말에 상단주는 손에 땀이 났다.
마탑에서 수많은 죄인으로 생체실험을 한다는 말이 거상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조심스럽게 나고 있었다.
그 약을 만들기 위해 많은 죄수가 죽었을 것이다.
아니면 부작용으로 고통을 받거나 말이다.
얼추 약초들을 보고 그녀가 명령을 내렸다.
“약초 냄새가 좋구나. 잠시 혼자 있겠다.”
“알겠습니다.”
상단주가 나가고 그 공간에 그녀만 남게 되었다.
“상단주, 소드마스터를 죽일 독은 없어.”
그녀가 혼잣말을 시작했다.
“오러가 혈관에 끊임없이 흐르며 몸의 불순물을 없애주니까.”
소드마스터는 무의 극에 도달했으며 완벽한 신체를 가진 존재였다.
그들이 완벽한 신체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오러를 자유자제로 다루면서 그 오러가 혈액과 함께 흐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약도 잘못 쓰면 독과 같아지듯이 약으로 소드마스터를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지.”
헬리오 왕실에 납품한 기력을 주는 약의 효과는 끝내줬다.
많은 실험을 통해 탄생한 약답게 말이다.
좋은 효과에 평민들도 구매할 수 있는 합리적인 가격이다.
라스타 왕국의 백성 중 사먹지 않는 이가 없는 백성들의 약이라고 불렸다.
그것은 상단들을 통해서 헬리오 왕국에도 전해졌고 헬리오 왕실에도 납품하게 되었다.
“헬리오 왕실에 들인 약에는 특별히 하나를 더 추가했어. 일반 백성들이 먹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좋지.”
그녀가 붉은 잎만 있는 약초를 들어올렸다.
“기존의 약에 이 약초를 넣으면 효과가 더 좋아지는 대신에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거든.”
그 부작용은 기사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이 약초를 넣은 약을 먹고 전장에서 기사들이 발작하는 일이 벌어졌어. 원인조사 중에 일반 기사들이 일정 이상의 오러를 사용하면 한동안 혈관에 오러가 흐른다는 것을 알아냈지. 마치 소드마스터처럼.”
일정 이상의 오러를 쓰면 몸 안에 내재되어 있던 오러가 자극을 받아서 몸을 자극한다.
소드마스터의 오러도 마찬가지다.
혈액을 타고 있으나 잠자고 있는 듯이 혈관에 흐를 뿐이다.
“내가 보낸 이들 덕분에 대공은 오러를 많이 썼겠지.”
그러다가 일정 이상의 오러를 사용하면 혈관에 있던 오러들도 자극을 받아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오러는 독이 아닌 약을 독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몰아내려고 몸을 자극한다.
독이 아닌 약이니 사라질리 없었고 고통은 계속되는 것이다.
일반 기사들은 혈관에 흐르는 오러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그렇지만 항상 혈관에 오러가 흐르는 소드마스터다.
그러니 그 약을 몰아내기 위해 계속 오러는 몸을 자극할 것이다.
“이 약은 오러와 상극이야. 피를 토하고 온몸이 바늘에 찔리고 장기가 찢어지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더군. 지금은 어떤가? 헬리오 대공.”
존재하지 않는 독을 몰아내기 위해서 오러가 몸을 혹사하고 괴롭히는 상황에서 헬리오 대공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건물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