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헬리오 왕국의 비극
헬리오 왕국의 왕궁.
늦은 밤이었다.
“윽!”
“과연 이것들은 누가 보낸 놈들일까?”
복면을 쓴 괴한들이 처절하게 피를 흘리며 싸늘하게 죽어 있었다.
왕궁의 길이 시신으로 더럽혀졌다고 표현할 만큼이었다.
헬리오 대공은 그들을 밟고는 웃었다.
왕실기사단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대공 전하, 이렇게 다 죽이시면 배후를…….”
“우리 측에서도 희생자가 많이 나왔어요. 소드마스터인 나와 그대가 직접 키워낸 정예병들이 말이야. 그 정도 수준의 실력자를 이렇게 많이 보낼 인물은 하나뿐이지 않아?”
헬리오 대공은 암살자가 왕궁에 왔다는 사실보다 그들로 인해 그가 오러를 썼다는 것에 놀랐다.
그만한 인력을 양성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렇게 버림패로 쓰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재들이었다,
그들을 겨우 암살자로 쓸 만큼 인력이 많다는 것일 수 있다.
반대로 그만큼 몰려 있다는 뜻일 수 있으나 가능성은 희박했다.
“전장이 아닌 곳에서 오러를 이렇게 써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소드마스터가 전장에서 쓰듯이 오러를 쓰게 만든 암살자들을 키워내려면 엄청난 자금을 썼을 것이다.
“심증일 뿐입니다.”
헬리오 대공이 단장의 말에 헛웃음을 뱉었다.
“농담이지?”
“아무리 모두가 아는 진실이라고 해도 증좌 없이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정론이야. 그렇지만 자네도 알지 않는가. 그녀는 증좌를 들이민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야.”
헬리오 대공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기사단장이 한숨을 쉬었다.
헬리오 대공이 언급한 암살자들의 ‘배후’인 ‘그녀’는 페루제 공작부인이었다.
“그 증좌라도 없으면 역으로 이용할 여인이기도 하지요.”
“뭐, 못 찾으면 가짜라도 만들지.”
헬리오 대공의 입에서 가짜 증거를 만들겠다는 말이 너무 쉽게 나왔다.
“그건 그렇고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어. 동맹을 깨겠다는 선언을 암살자를 보내서 알리다니 대단해.”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들의 군사적 동맹은 초원의 드워프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 동맹을 페루제 공작부인이 먼저 파기했다.
드워프가 그녀의 적이 아니라는 뜻이었고 이는 드워프와 그녀가 손을 잡았다는 뜻이었다.
“드워프 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지.”
“배신자지요.”
왕궁에 암살자들이 아무런 방해도 없이 쉽게 왕성에 들어왔다.
그 어떤 병사들과 부딪히지 않고 말이다.
왕궁 사람이 돕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드시 찾아야 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런 일이 가능한 인물 중 의심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페루제 루비로즈라는 숙적과 본격적으로 싸워야 하는 때가 다가오고 있다.
내부의 배신자로 인해서 처음부터 밀리고 시작할 수는 없었다.
헬리오 대공은 이번 일을 기회로 삼아서 배신자를 처리하고 왕실을 위협하는 세력들을 일망타진할 생각이었다.
그래야 자신의 조카가 성인이 되면 편히 왕궁을 다스릴 수 있게 되리라.
자신의 손을 피로 더럽혀서 헬리오 왕국과 왕실을 번영하도록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수백 번, 수천 번도 할 수 있다.
헬리오 대공은 갑자기 시야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쿨럭.”
소드마스터가 되고 감기라고는 걸린 적이 없었다.
그는 입 밖에 무언가가 튀어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손으로 입이 닦았다.
그 손에는 피가 있었다.
“대공 전하!”
기사단장이 경악하며 자신을 급하게 부르는 모습을 보고 난 후, 헬리오 대공에게는 어둠만 남았다.
소식을 들은 재상이 급하게 왕궁 내에 마련된 헬리오 대공의 방으로 달려왔다.
그 문 앞에는 기사들이 살기를 드러내며 지키고 있었다.
재상은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의원이 헬리오 대공을 살피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대공 전하께서 쓰러지다니요!”
“나도 모르겠소. 갑자기 피를 뱉고는 쓰러지셨소.”
기사단장은 눈을 감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오직 헬리오 왕국과 국왕폐하에게 충성을 바친 헬리오 대공이었다.
곁에서 그를 지켜본 기사단장은 잘 알았다.
이 왕국에서 가장 백성과 왕실을 위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그는 주저하지 않고 헬리오 대공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선왕의 급사로 인한 왕국의 혼란을 헬리오 대공이 빠르게 잠재웠다.
그가 없었다면 어린 국왕을 지키고 왕국을 안정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아직 폐하는 성인이 아니었다.
헬리오 대공이 지켜주지 않으면 그를 지킬 인물이 없었다.
국왕의 친모는 그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었고 그의 외가는 힘이 없었다.
이에 비해서 선왕의 계비인 대비는 본디 그 가문의 힘이 강했다.
헬리오 대공의 힘이 눌려 있다고 해도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님이다.
게다가 대비와 그녀의 가문은 언제든 권력을 쥐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헬리오 대공을 살피던 의원이 재상과 기사단장에게 왔다.
그들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께서는 어떠신가?”
“언제쯤 깨어나실 듯 한가?”
두 사람은 진심으로 헬리오 대공을 걱정했다.
그는 왕국에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를 잃는 것은 헬리오 왕국의 재앙과 같았다.
의원이 땀을 닦았다.
얼굴은 흙빛이었다.
“전하께서 독에 당하신 듯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폐하는 소드마스터야!”
“소드마스터가 독에 당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네!”
소드마스터가 어떤 존재인가?
모든 무의의 극에 선 존재이자 완전무결한 신체를 가진 존재이다.
그 무력은 병사들을 낙엽처럼 가볍게 쓸려나갈 존재로 만든다.
그 완전한 신체는 그 어떤 독도 통하지 않는 체질로 탈바꿈하게 만든다.
소드마스터를 이길 수 있는 것은 같은 소드마스터뿐이기에 백성들에게는 든든한 존재가 되어준다.
소드마스터가 왕국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소드마스터가 왕국의 국력과 연관되는 이유였다.
“저도 믿어지지 않지만 분명히 독입니다.”
“어떤 독인가? 치료는 할 수 있는가?”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의원도 진찰하면서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소드마스터에게 통하는 독이라니!
수십 년, 의원으로 살면서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는 일이다.
그 의원의 말은 헬리오 대공이 죽을 것이라는 말과 같았다.
독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은 치료할 수 없다는 말이었으니까.
재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것은 찰나였으나 왕국의 미래를 결정지을 중요한 결정을 고민한 시간이었다.
“전하께서는 얼마나 사실 수 있는가?”
“재상!”
재상이 대공의 죽음을 언급하자 기사단장이 분노했다.
대공이 쓰러진지 하루가 지났는가? 이틀이 지났는가?
어찌도 이리 굴 수 있단 말인가!
“단장의 분노는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왕국의 미래를 생각해야 합니다.”
“재상!”
“그, 그만하라. 재상의 말이 맞으니까.”
대공이 기사단장에게 말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으켰다고 해도 침대벽에 등을 기대는 것이 전부였다.
재상이 자신의 무력함에 눈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나의 목숨보다 왕국의 미래가 더 중요하지.”
헬리오 대공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언제든 죽을 수 있는 병자의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한 왕국의 권력을 차지한 인물답게 죽음을 앞두고도 그 기백은 그대로였다.
“내가 하는 질문에 의원은 말하라.”
“네…….”
“나는 얼마나 살 수 있겠는가?”
“그것이 알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의원이 눈물을 흘리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도 대공이 얼마나 왕국을 위해 헌신했는지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왕국 최고의 의원이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헬리오 대공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것은 재상이 찰나에 했던 생각과 같았다.
“이번 암살자들의 침입을 빌미로 왕국에 위협이 될 놈들을 모두 처리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독에 당했다는 것이 알려지지 않도록 철저히 막겠습니다.”
“왕실기사들이 그 어떤 쥐새끼도 알지 못하게 막을 것입니다.
재상과 기사단장의 눈에는 단단했다.
앞으로 있을 왕국의 분란을 막기 위한 각오가 느껴졌다.
“그래. 빨리 시행하고 끝내야 한다. 특히 대비의 가문은 멸문하거나 몇 년은 조용히 있을 만큼 타격을 줘야 해.”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대들을 믿지. 쿨럭!”
“전하!”
한결 안심한 얼굴로 웃던 헬리오 대공이 다시 피를 흘렸다.
아까와는 차원이 달랐다.
“쿨럭! 쿨럭! 쿨럭!”
기침을 할 때마다 피가 나왔다.
의원이 빠르게 헬리오 대공에게 갔다.
그를 최대한 살려놔야 했다.
왕국을 위협하는 내부의 적들을 처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쿨럭, 그대는, 쿨럭, 일이 끝날 때까지, 쿨럭, 나를, 쿨럭, 살려놓으라.”
“전하. 반드시 그리할 것이니 제발 말을 아끼십시오.”
헬리오 대공은 말을 할 때마다 기침을 했고 점점 많은 피를 쏟아냈다.
피가 쏟아지면 쏟아질수록 죽음에 가까워진다.
의원은 그를 진심으로 살리고 싶었다.
헬리오 대공은 마땅히 존경받아야 하고 이렇게 죽으면 아니 될 인물이었다.
의원은 자괴감에 빠질 상황이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줘야하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왕국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살려고 했다.
그의 각오에 부응해줘야 한다.
비록 살리는 것은 불가능해도 그의 대의를 이루도록 해줘야 했다.
의원은 그리 마음을 먹었다.
재상과 기사단장은 고통스러워하는 대공을 뒤로하고 방을 나왔다.
기사단장이 재상에게 물었다.
“폐하께는 알려야 하지 않습니까? 누구보다 전하를 따르시던 폐하십니다.”
“한동안 폐하께는 비밀로 하시지요.”
재상이 안타까워하는 말투로 답했다.
친부모처럼 대공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데 그것을 숨긴다는 것은 양심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단지 대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침묵하는 것뿐이다.
“언제까지요?”
“어느 정도 잡아들였을 때요.”
“빨리 움직여야겠군요.”
기간이 지연될수록 폐하와 대공이 마지막 인사를 할 시간이 줄어든다.
두 사람의 마지막을 위해서라도 지금 바삐 움직여야 한다.
“한동안 수고해주십시오.”
“왕실의 신하로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둘은 간단한 대화를 마치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왕궁의 모든 관리가 출근을 하자 왕실기사들이 그들이 있는 사무실에 왔다.
근엄하고 절도 있게 왕궁 주변을 경계했다.
“이 시간부터 그 누구도 왕궁을 나갈 수 없고 들어올 수 없다!”
그리고 이달에 왕궁에 들어온 모든 인물들을 잡기 시작했다.
“이번 달에 왕궁에 방문한 모든 인물은 조사를 받아야 한다. 거부하는 자는 즉각 처벌하라!”
“네!”
남녀노소 가릴 것도 없이 끌려갔다.
“한사람도 놓쳐서는 아니 된다!”
“저는 오라버니와 이곳의 관리이기에 잠시 만나러 온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로 이러시는 것입니까?! 이유라도 알게 해주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이 끌려가는 이유조차 듣지 못했다.
“죄가 없다면 무사히 나올 것이고 죄가 있다면 벌을 받으면 될 일이다!”
살벌한 경고만 그들의 귀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