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파빌리오 공작과 헬리오 대공
그들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잠시 침묵했다.
공기가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메디치 백작이 먼저 백기를 든 것과 같았다.
란델리노를 통해서 안주인의 입지를 탄탄하게 하던 여인이 그 우위를 스스로 버린 것이다.
헤레스가 입적되는 것은 그 정도로 큰일이었다.
* * *
벨로나 공작이 원하는 대로 헤레스의 입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대들 먼저 가 있게.”
“알겠습니다.”
귀족들이 회의장을 벗어나고 파빌리오 공작이 홀로 남았다.
그는 자신의 한 손을 내려다봤다.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회의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아찔하고 또 아찔했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도래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가 은근히 바닥을 보면서 복도를 걸었다.
누군가의 구두가 보이자 파비리오 공작은 고개를 들었다.
절로 눈이 날카로워졌다.
“생각이 많아보이시는군요.”
“제 머리가 복잡하게 만드신 분이 할 말은 아니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그녀가 부채로 자신의 뺨을 툭툭 약하게 쳤다.
눈빛에서 비웃음이 느껴졌다.
‘네 머리가 복잡한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해?’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리고 회의장에서 위협하시는 말 잘 들었습니다.”
“하스칸 성 수비를 담당하겠다고 한 말이 서부를 노리고 하는 말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스칸 성 수비를 메디치 백작이 관리한다면 언제라도 헬리오 왕국의 군을 서부 쪽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타국의 군대를 자국에 들이는 상황은 그만큼 왕국이 극단적인 상황에 처해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녀라면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알펜 왕국을 극단적으로 위험하게 만들 여지가 충분했다.
“그이가 반대해서 넘어가 일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지요.”
“언제까지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녀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드러냈다.
“무엇을요?”
“지금 벨로나 공작과 백작의 분위기에 압도되어서 그냥 넘어갔지만 점점 알아차리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입니다.”
파빌리오 공작은 벨로나 공작과 메디치 백작의 연기를 잘 봤다.
서로 적대하는 척하면서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겉으로는 벨로나 공작만 원하는 바를 이뤄낸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지금 친왕파가 왕국의 최대 세력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벨로나 공작과 메디치 백작의 연합 세력이 왕국의 최대 세력이었다.
“그런 생각을 못하게 혼을 빼놓을 생각이고 점점 많아지기 전에 처리할 생각이에요.”
“…….”
어떻게 혼을 빼놓을 것이고 무엇을 처리할 생각이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비열한 미소는 그녀가 벨로나 공작과 함께 할 일의 여파를 간접적으로 실감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박수를 치면서 해맑게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파빌리오 공작부인의 병문안을 가고 싶군요.”
“아직 몸이 좋지 않습니다.”
저 악독한 여인이 자신의 부인에게 무슨 짓을 할지도 몰랐다.
파빌리오 공작이 분노와 경멸을 애써 감췄다.
미세한 틈이라도 보이면 알아챌 여인이었다.
“곧 나으시겠죠. 제가 해독제를 줄 것이니까요.”
“사람을 시키시지요. 번거롭게 직접 오신다고 하십니까?”
“재미가 있는 일은 번거롭더라도 직접 하는 편이라서요.”
파빌리오 공작이 헛웃음을 뱉어냈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반응이었다.
사람을 죽기 직전까지 내몰았으면서 그것을 ‘재미’로 치부하고 있다.
그게 사람이 할 생각인가! 일말의 양심도 없는 말이었다.
“싫으면 그냥 완화제만 드릴까요?”
“아닙니다. 같이 가시지요.”
메디치 백작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사람의 목숨과 고통을 이용해서 그 인생을 좌지우지할 것이다.
* * *
화려한 방, 아름다운 안주인이 침대에서 남편과 손님을 맞이했다.
그 방의 주인은 손님을 보며 정말 반가워했다.
“페루제 공작부인,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프다는 말을 들었는데 바로 오지 못해서 미안하죠.”
파빌리오 공작부인은 침대 옆에 마련된 작은 의자에 앉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손을 잡았다.
그 온기는 정말 다정했다.
“아니에요. 오셨어도 제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만나 뵙지 못했을 거예요.”
“그 정도로 아프셨군요. 지금은 어떠세요?”
“의사가 준 약 덕분에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어요.”
“다행이에요.”
파빌리오 공작은 감탄했다.
누구라도 저 모습을 본다면 페루제 공작부인이 자신의 부인을 죽이려고 했음을 예상하지 못하리라.
정말 상대를 걱정하고 아끼는 것 같았고 절친한 벗처럼 보였다.
연기인 것을 아는데도 진심처럼 느껴지는 목소리와 얼굴 그리고 눈빛이었다.
“부인께서 나으시면 우리 자주 만나도록 해요.”
“그래요. 저도 벨로나 공작부인과 나무와 꽃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제가 갈게요.”
십년지기처럼 두 공작부인은 즐겁게 재잘거렸다.
파빌리오 공작은 그 정겨운 모습을 경계심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러던 중에 페루제 공작부인이 바필리오 공작부인의 손을 다시 쥐었다.
“제가 인맥이 넓은 만큼 아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정말 그러시겠네요. 여러 사람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으셨을 테니까요.”
“맞아요. 하나 이야기를 해드릴까요?”
“그래주시면 저야 좋죠.”
그녀의 말에 파빌리오 공작부인이 좋아하며 밝게 웃었다.
그녀라면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들을 아주 많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 이야기가 기대가 되었다.
“옛날에 저 먼 어느 왕국에 어떤 재상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는 부와 명예와 권력을 전부 가지고 있었지요. 왕조차 그에게 예의를 갖췄다고 합니다.”
“하긴 재상의 위치에 있으면 왕도 무례하게 하대하기는 어렵죠.”
파빌리오 공작부인이 이해가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그 대단한 재상도 세월을 막을 길이 없었지요. 늙어지면 늙어질수록 약해졌고 아래에서는 젊고 강한 젊은이가 치고 올라왔어요.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때가 다가오는 것이죠.”
“그는 물러났나요?”
“아니요. 아쉽게도 그는 때를 알면서도 물러나지 않았어요.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놓기 싫었거든요.”
“그러면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는 젊은이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데요.”
파빌리오 공작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갔다.
그의 눈빛은 서늘한 그 자체였다.
“그렇죠. 젊은이는 결심했어요. 이대로 그 자리에 머물게 하기에는 그의 인내심이 부족했거든요. 젊은 만큼 혈기왕성했어요.”
“윽!”
파빌리오 공작부인가 얼굴을 미세하게 찡그렸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손에 힘을 점점 더 세게 쥐었기 때문이다.
손의 힘이 강해질수록 그녀의 표정에서 점점 웃음이 사라졌다.
“그 재상의 부인을 죽이고, 자식들을 죽이고, 기사들을 죽이고 가신들을 죽이고 영지의 백성들을 모조리 죽였어요. 자신을 기다리게 만든 대가를 치루게 한 것이지요.”
페루제 공작부인이 말을 마치고 손을 뗐다.
“그래서 젊은이는 재상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답니다.”
그녀가 일어났다.
아까의 우아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군요. 여기 제가 가져온 차입니다. 오늘 안에 꼭 드시고 우리 자주 만나요.”
“네, 그러도록 해요.”
페루제 공작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자리를 떠났다.
방 안은 적막만이 남았다.
파빌리오 공작부인이 진중하게 남편에게 물었다.
아까 자신의 손을 꽉 쥐던 페루제 공작부인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웠다.
분위기가 사람을 절로 떨게 만들었다.
“여보, 내가 모르는 일이 있나요?”
파빌리오 공작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아까 페루베 공작부인이 말한 늙은 재상의 이야기.
그 늙은 재상은 파빌리오 공작가문이었고 그 이야기의 아래에서 올라오는 젊은이는 메디치 가문과 벨로나 공작가문을 의미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늙어지고 약해진다는 것은 지금 파빌리오 공작가문이 점점 위세가 약해지고 있음이다.
젊은이의 인내심이 부족했다는 말은 페루제 공작부인이 더는 파빌리오 공작이 한 파벌에 수장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지켜보지 않겠다는 말과 같았다.
“부인, 앞으로 알펜 왕국은 지금과 완전히 달라질 것이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해.”
“그게 무슨?”
“일단 메디치 백작이 가져온 차를 마시고 쉬어요. 그 다음에 이야기 나눕시다.”
파빌리오 공작부인은 남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의 표정이 너무 씁쓸하여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경고했는데도 들어먹지 않는다면 치워야겠지.”
방을 나온 페루제 공작부인이 혼잣말했다.
* * *
그녀는 바빠도 너무 바빴다.
그 바쁨으로 인한 피곤함도 그녀를 가로막지 못했으나 간만에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집무실에 있는 소파에 옆으로 누워서 피로를 해소하는 중이었다.
“실리.”
“네”
그런 그녀의 곁에 실리 시녀장이 있었다.
레티시아의 데뷔탕트도 끝냈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동안 헬리오 대공과 좋은 동맹관계였지?”
“예. 같이 초원의 드워프들을 막아내며 에클레시아 교단을 지켰지요.”
“그래. 그랬지. 우리는 같이 신을 수호하며 야만인들을 몰아냈다.”
실리의 담담한 말에 그녀가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
“드워프 부족 중에 프랑크 부족이라고 있더군.”
“네. 드워프 부족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부족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들이 나에게 밀서를 보내왔지.”
초원의 야만족이라 불리는 드워프가 그녀에게 밀서를 보냈다.
그 밀서의 내용은 그동안 군사적 동맹을 맺고 있던 헬리오 왕국과의 관계를 변하게 할 정도로 중요했다.
그 내용은 드워프들이 개종을 하겠다며 페루제 공작부인이 그 증인이 되어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드워프 전부를 대변하는 내용은 아니지만 드워프 부족 중 가장 큰 부족의 족장이 직접 쓴 서신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더는 헬리오 왕국과 이단을 막아낸다는 명분으로 군사적 동맹을 펼칠 이유가 없었다.
그녀가 헬리오 왕국에 군사적 지원을 한 이유는 오직 이단을 막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진심이 아닐 것입니다.”
“거짓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 서신이 거짓이라도 상관이 없었다.
나중에 그 대가를 받아내면 되니까.
훗날 드워프들의 영역을 노려야 된다면 거짓 개종으로 신을 기만했다는 명분만큼 좋은 것은 없으리라.
이제 남편과 손도 잡았겠다.
그녀가 원하던 판세가 꾸려지고 있었다.
더는 만만치 않은 헬리오 대공과 기 싸움하면서 무의미하게 싸우지 않아도 된다.
그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진실이 아니더라도 명분은 되겠지.”
“그러면 어찌할까요?”
그녀가 고개를 위로 올리고 천장을 바라봤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곧은 자세로 소파에 앉았다.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헬리오 대공을 처리해야겠다.
헬리오 왕국은 좀 더 분란이 일어나줘야 해.”
“그러면 준비해 놓은 일을 하라고 전하겠습니다.”
“그리하거라.”
그녀가 차를 마시며 우아하게 말했고 순식간에 헬리오 대공의 목숨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