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사생아를 위한 아버지
헤레스를 괴롭히지 말라고 란델리노에게 경고하던 날이었다.
“란셀 그 아이를 대리인으로 삼아서 헤레스를 괴롭히지 말거라.”
“괴롭힌 적은 없으나 란셀에게 적당히 하라고 말하죠.”
다리를 꼬고 오만하게 대답하던 놈이었다.
키워준 어미를 닮아서인지 건방지기가 그지없었다.
“으으으.”
“헤레스!”
저녁에 함께 다과를 즐기던 헤레스가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억울합니다.”
“저는 아닙니다. 믿어주십시오”
독을 탔을 만한 인물들을 문초했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약한 독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약한 독도 아이에게는 강한 고통을 줬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었다.
그만큼 내정을 완벽하게 자신의 부인이 장악했음이고 동시에 그 내정에 란델리노가 자기 사람들을 심어뒀다는 뜻이었다.
벨로나 공작은 그 일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았다.
자신의 부인이 배후가 아니다.
그녀에게 헤레스는 관심을 가질 정도의 가치가 없었다.
단지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에 약간의 흥미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 일은 란델리노의 경고라는 것이 더 타당했다.
나는 당신이 사랑하는 아들을 언제라도 죽일 수 있다.
가문 내부의 안주인과 유일한 법적 아들이 묵인하는 일에 토를 달 고용인은 없었다.
아무리 공작이라고 해도 증거도 없이 유일한 법적 아들을 쫓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모든 것은 헤레스를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후에 가능한 일이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귀족들은 라보공작과 벨로나 공작을 힐끔힐끔 봤다.
수많은 귀족을 직. 접 죽여 버린 벨로나 공작이었다.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는데 토를 달기 어려웠다.
자신들은 죄가 없을지라도 벨로나 공작가문의 무력이 다시 한번 증명된 시점에서 괜히 찍히고 싶지 않았다.
국왕조차 놀랄 힘이었다.
그는 공작을 친왕파에서 배제하려 했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했다.
아무리 부부 간의 연좌제가 적용이 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메디치 백작을 공격하기 어려울지라도 벨로나 공작을 붙잡는 것이 맞았다.
“건국 이래도 바뀐 적이 없는 법이야. 그것을 굳이 바꾸려고 해서 분란을 일으켜야겠나? 하필 이런 뒤숭숭한 시기에?”
국왕이 근엄한 척, 여유로운 척을 하며 말했다.
그러면서 메디치 백작을 봤다.
메디치 백작은 벨로나 공작부인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식이 없고 전처의 아들인 란델리노를 밀고 있었다.
란델리노는 그녀의 말이라면 무릎이라고 꿇을 아이였다.
란델리노는 유일한 적자이자 가문의 미래다.
그녀는 가문의 미래를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헤레스라는 불순분자가 가문에 들어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것은 뻔했다.
벨로나 공작은 자신이 총애하는 아들을 밀어주기 위해서 란델리노를 위협할 것이 뻔했다,
벨로나 공작이 란델리노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는 판단은 맞았다.
그러나 그렇게 될지라도 란델리노가 자신의 자리에서 허무하게 물러나게 될 것이라는 예상은 틀렸다.
란델리노는 아버지가 자신을 위협한다고 해서 흔들리고 위협을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그에게 포섭된 벨로나 가문의 가신들이 수두룩했다.
벨로나 공작가문의 가신이나 공작과 미묘하게 거리를 두고 있던 이들이었다.
벨로나 공작가문의 일에서 세력이 약한 무리라는 뜻이다.
그들이 헤레스를 지지해도 얻어낼 것이 없었다.
이미 벨로나 공작이 밀어주는 가신들이 그를 지지할 것이었으니까.
결국 헤레스를 지지한다는 것은 지금처럼 비주류에 머문다는 것과 같았다.
란델리노를 지지하는 세력과 페루제 공작부인을 지지하는 세력이 합쳐진다면 기존의 공작을 지지하던 세력에 뒤쳐지지 않은 힘을 발휘했다.
지지하는 귀족의 수는 벨로나 공작 측보다 적을지라도 공작부인의 자금력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벨로나 공작가문은 국왕이 보고받은 것 이상으로 분열되고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하여튼 국왕은 그런 요소들을 생각하면 그녀가 반대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확신처럼 그녀가 손을 들었다.
남편이 사생아를 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본 것치고는 흔들림이 없었다.
당당하기까지 했다.
“반역자의 핏줄을 귀족 가문에 입양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문제지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훗날 벌어질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야지요.”
친왕파의 귀족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반역자들을 단숨에 토벌한 공적으로 기세등등한 벨로나 공작을 막을 인물이 친왕파 내에는 없었음이다.
국왕이나 라보 공작도 대놓고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기 못하는 형국이다.
이 와중에 반왕파의 귀족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벨로나 공작으로 인해 세력이 너무 축소되었다.
이런 시기에는 웅크리고 있으며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맞았다.
괜한 트집에 지금 남아 있던 세력을 더 쪼갤 수 없지 않은가.
그렇게 각자가 다른 시선에서 메디치 백작을 바라봤다.
“그렇지만 제가 지금을 유지하기도 벅차서 반대하기가 조심스럽네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슬쩍 국왕을 쳐다봤다.
모두가 그녀가 하는 말에 담긴 뜻을 알았다.
‘네가 반왕파도 중립파도 루비로즈 파도 숙청해서 벨로나 공작의 기행을 막을 놈이 없잖아.’
중립파는 완전히 없애버리고 반왕파도 큰 타격을 받고 루비로즈 파도 타격이 없지 않았다.
친왕파 귀족들조차 이번 숙청을 불편하게 생각했다.
국왕이 언제라도 이렇게 비열하게 나설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또한! 그렇다고 그냥 찬성하기에는 왕국의 미래가 걱정이 되고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벨로나 공작이 살기를 드러냈다.
“으으.”
그 살기에 신음하는 귀족들이 있었으나 그녀는 평소와 같았다.
언제나처럼 우아하게 웃었다.
“그 가문의 혈육에 한에서 귀족 가문에 정식으로 입적할 수 있도록 하지요. 그리고 그가 태어나기 전에 반역이 이뤄졌고 처리되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 하에요.”
같은 편이면서 서로가 참으로 능청스러웠다.
사실 벨로나 공작은 처음부터 귀족 가문의 핏줄에 한해서 입적될 수 있도록 주장할 수 있었다.
그리하지 않은 이유는 그녀와 그가 힘을 합쳤다는 것을 감춰야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오직 그들만 알아야 할 동맹이었다.
“물론 이를 반대하지 않는 대가를 받아야겠어요.”
“메디치 백작으로? 아니면 벨로나 공작부인으로?”
“벨로나 공작부인으로 왕국와 가문을 걱정하는 마음은 크지요.”
언제부터 그리 알펜 왕국을 생각했다고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곳에 있는 귀족들의 공통적으로 하는 생각이었다.
“하스칸 성의 국경수비를 메디치 백작가문에서 담당했으면 좋겠어요.”
하스칸 성은 헬리오 왕국와 알펜 왕국의 국경 중 하나였다.
그곳이 점령당하면 헬리오 왕국은 알펜 왕국의 북부로도, 서부로도 군을 움직일 수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녀가 헬리오 왕국의 병사들에게 문을 열어준다면 서부도, 북부도 공격당한다는 것이다.
북부는 자신이 안주인으로 있는 벨로나 공작가문의 영지와 메디치 백작령이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위험한 것은 서부인 셈이다.
국왕도 이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소리쳤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세상 어디에 비밀리에 해야 할 말들을 귀족들과 국왕이 보는 앞에서 한단 말인가!
대가를 준다면 벨로나 공작이 추진하는 일을 허락하겠다니!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무슨 짓이라니요?”
“지금 왕국의 중요한 일을 상인이 거래하듯이 거래를 하고 있으면서 내게 그리 말해?!”
“폐하, 오해십니다.”
“벨로나 공작!”
벨로나 공작은 정말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메디치 백작은 그런 척조차 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재수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부부가 쌍으로 선을 넘고 있었다.
“폐하, 그이가 추진하는 일은 왕국에도 중요한 일이지만 ‘저’와 ‘아들’에게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세가 약해졌다고 해도 이를 악물고 나락으로 떨어뜨리려고 하면 못할 것도 없지요.”
솔직히 악다구니를 쓰며 죽을 각오로 덤비기로 마음을 먹으면 반왕파와 루비로즈 파가 반대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단지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을 뿐.
“그리고 제 세력은 알펜 왕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요.”
“헉!”
사람들이 기겁했다.
자신이 작정하고 나서면 왕국을 개판으로 만들 수 있음을 대놓고 드러냈으니까.
최악의 상황은 알펜 왕국의 최강 무력집단인 벨로나 공작가문의 기사단과 라스타 왕국의 군사적 대립.
그것은 알펜 왕국 북부에 그치지 않았고 알펜 왕국 전체를 전란의 구렁텅이에 빠뜨릴 것이다.
“그래서 저는 여기서 제안한 것입니다. 피해를 최소화하고 다른 귀족들과 폐하를 안심시켜드리기 위해서요.”
“세간에서는 그런 말을 개소리라고 한다네.”
국왕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분명이 이런 생각을 하는 귀족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대놓고 실리를 챙기려는 것을 보면 뒤에서 수작을 부리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요. 그이가 제안을 받아들여야 가능한 이야기이기는 해도요.”
일부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갑자기 벌인 일들에 심장이 벌렁거렸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번만큼은 좀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다.
숙청의 공포와 불안이 아직 가시지 않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대답할 가치도 없는 소리지. 그대의 무엇을 믿고 국경지대를 그대 사람들이 지키게 한다는 것이지?”
벨로나 공작이 코웃음 쳤다.
이에 그녀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왕국을 배신하기로 한단 말인가요?”
“내가 아는 그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부부는 서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팽팽하게 대치했다.
한바탕 파란이 일어날 듯했다.
귀족들이 침을 삼켰다.
누가 이 숨이 막힐 상황에서 꺼내줬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기도했다.
파빌리오 공작이 입을 열었다.
“폐하, 지금 왕국은 역도들로 인해 공백이 아직 가시지 않았습니다.”
너무 많은 귀족들이 목숨을 잃었다.
기존에 그들이 맡았던 업무에 공백이 생겼다.
이것을 수습하고 그 업무에 맞는 새로운 인물을 앉히는 것은 시간이 걸렸다.
그 일에 어울리는 인재인지 아닌지 확인도 하지 않고 공석을 메울 수 없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북부가 격렬하게 분열한다면 왕국의 안위가 위태로울 것입니다. 서부에는 헬리오 왕국이, 북부에는 라스타 왕국이 동부에는 카플란 왕국이 그것을 노릴 것이 뻔합니다.”
“그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국왕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헬리오 왕국과 라스타 왕국의 군사적 동맹은 초원의 드워프들을 처리할 때에 드러났다.
그 군사적 동맹은 메디치 백작과 헬리오 대공 사이의 동맹과 같았다.
그런데 헬리오 왕국의 국경을 메디치 백작에게 맡겨라?
그것도 서부와 북부 양쪽을 언제라도 공략할 수 있는 중요 요충지를? 그게 말인가!
“일단 벨로나 공작의 요청을 들어주시고 메디치 백작에게는 다른 대가를 얻도록 중재를 하시지요. 두 분 모두 왕국이 흔들리는 것을 원하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
파빌리오 공작이 벨로나 공작부부를 한 명 한 명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