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205화 (205/221)

205화 주리스 후작의 독방

주리스 후작은 독방에 갇혀 있었다.

다행히도 거짓 자백을 받아내려고 고문하지는 않았으나 두려웠다.

독방에 있더라도 다른 감방에 있는 이들의 절규와 고통이 두 귀로 또렷하게 들려왔다.

뚜벅. 뚜벅. 뚜벅.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 누구도 오지 않는 독방에 조심스러운 걸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긴 시간을 드릴 수 없습니다.”

“짧게 이야기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게.”

상대는 높은 자리에 있는 인물임이 분명하다.

정체 모를 방문자에게 간수가 굽신거리는 것이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곧 독방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 누군가의 호위로 보이는 이와 함께였다.

“메디치 백작께서 여기에는 무슨 일입니까?”

“잘 지내시는지 걱정이 되어서 왔습니다.”

“백작께서 나를 그리도 생각해주는 줄은 꿈에도 몰랐군요.”

주리스 후작은 그녀에게 비아냥거렸다.

반역죄에 엮인 이상, 그는 죽은 목숨이었다.

그는 이 망할 사태가 저 여인이 꾸민 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중립파를 이렇게 쓸어버려서 국왕이 얻는 이득보다 그로 인한 분란으로 메디치 백작이 얻는 것이 더 많았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국왕도 피해자가 아닐까?

그러면 억울한 중립파를 일부라도 구명해주지 않을까?

매일 매일 여러 생각이 주리스 후작을 집어삼켰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참담함에 숨을 쉬지 못할 것 같았다.

자신을 향한 비아냥에도 그녀는 담담했다.

“맞습니다. 솔직히 제가 생각해도 저답지 않지요.”

예상치 못한 반응에 주리스 후작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녀가 우아하게 서서는 슬쩍 뒤를 눈짓했다.

“그렇지만 저도 아들이 있는 몸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알지요.”

“아버지!”

“아들아!”

주리스 후작의 입술과 손이 떨렸다.

잡힌 줄 알았던, 고초를 당하고 있을 것이라 여겼던 아들이 이곳에 있었다.

사지가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가 아들을 안으며 울었다.

곧 아들의 얼굴과 몸을 만졌다.

보지 못한 곳을 다친 것은 아닐까 싶어서였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힘든 일은 겪지는 않았고? 네 어머니와 동생들은?”

“메디치 백작각하께서 왕실기사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저희를 구해주셨습니다.”

엄하게 끌려가지 않았다.

고문당하지 않았다.

하나만 살아남아도 다행인데 가족들이 모두 안전하게 살아 있다고 한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안전한 곳에 있어요. 아버지.”

주리스 후작의 아들이 눈물을 흘렀다.

전보다 살이 훨씬 빠진 모습에서 아버지가 얼마나 심신이 힘든지 느끼게 해줬다.

그러면서 증오심이 드러난 눈빛으로 말했다.

“국왕이 중립파 귀족들은 아주 도륙하고 그것으로 부족해서 반왕파, 루비로즈 파의 귀족들까지 처리했어요.”

“그놈이 욕심에 미쳤구나.”

주리스 후작이 이를 갈았다.

메디치 백작이 걱정하며 다가왔던 날에 그 손을 잡아야 했다.

간악한 놈이 국왕의 자리에 올라서 그따위로 굴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니 메디치 백작도 무엇인지 모르지만 걱정하며 자신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 호의를 자신은 거부했다.

“저희뿐만이 아니에요. 백작 각하 덕분에 일부지만 중립파 가문의 후계자와 가족들도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그이가 군사를 움직여 즉각 항의하던 영주의 아들들을 죽이려고 하더군요. 어쩔 수 없었어요.”

주리스 후작은 그녀를 슬쩍 돌아보던 아들을 봤다.

그녀가 벨로나 공작과 같이 역적들을 토벌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주리스 후작과 그 아들의 착각이었다.

“간수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런 비화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억울한 누명도 억울할 것이 분명한데 그 자식들까지 죽게 할 수 없는 노릇이지요.”

그는 자신의 가족뿐 아니라 다른 귀족들의 자제와 부인까지 구한 메디치 백작에게 감탄했다.

어느 귀족이 이렇게 위험을 감수하고 반역자의 자식과 부인을 구하려고 노력하겠는가.

누명임을 알아도 외면하는 것이 당연한 죄가 ‘반역죄’인데 말이다.

모두가 국왕의 칼이 자신에게 향할까 두려워하는데 그녀는 주저 없이 그들을 위해 나섰다.

그 길이 사람을 죽인 피로 더러워졌을지라도 당당하게 나아갔다.

진정한 신념이란 무엇인가를 느끼게 하는 듯했다.

주리스 후작이 머리를 바닥에 댔다.

“메디치 백작각하, 아까의 무례를 용서하시오.”

“이러지 마십시오.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제가 죄송하지요.”

“각하야말로 세상에 유일무이한 진정한 귀족입니다.”

그녀가 주리스 후작을 일으켜 세웠고 그는 감동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다정하게 주리스 후작의 손을 잡았다.

“제가 구해드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닙니다. 제 가족들을 구해주신 것만으로 저는 여한이 없습니다.”

그가 흘린 눈물이 그녀의 손에 닿았다.

“이제는 나오셔야 합니다.”

“알겠네. 잠시만 기다리게.”

그녀가 주리스 후작에게서 손을 뗐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시지요.”

독방에서 그녀가 나가자 주리스 후작과 그의 아들만 남았다.

“아들아, 우리는 왕실과 달리 도리를 아는 가문이다.”

“알고 있습니다.”

“메디치 백작께 너와 네 어머니 그리고 동생을 살려준 은혜를 갚거라.”

“물론입니다.”

주리스 후작은 이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잘 알았다.

메디치 백작을 돕는 것이 바로 지금의 국왕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주리스 후작의 아들은 그가 한 말에 담긴 뜻을 눈치챘다.

눈빛에는 아버지를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슬픔과 국왕을 향한 증오로 이글거렸다.

흐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훔치고는 그는 독방을 나갔다.

곧 사형을 당할 아버지를 뒤로하고 말이다.

그 모습에 그녀가 정말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더 시간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군.”

“아닙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주리스 후작은 메디치 백작각하를 향한 악명은 모두 왕실의 수작질이었다고 확신했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타당한 이유도 없이 나서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진정한 귀족답게 목숨을 걸고 반역죄로 멸문 당하게 생긴 그들을 몰래 구해주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해주니 마음의 무거움이 덜어지는 기분이야. 고맙네.”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를 반드시 갚을 것입니다. 언제든 무엇이든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 * *

그들이 감옥을 빠져나와 밖에 나오자 하늘은 어두웠고 달빛은 구름에 가려져있었다.

마차를 타고 그들은 어느 숲에 도착했다.

그가 마차에서 내리고 그녀가 살짝 열린 문사이로 말했다.

“일단 너와 같은 희생자들을 위한 마을을 마련했으니 거기서 쉬거라.”

그녀가 손가락을 가르킨 방향에 어떤 사내가 서 있었다.

그 마을로 이끌 안내자였다.

살뜰하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멸문 당했다고 알려진 가문의 사람들을 챙겼다.

주리스 후작의 아들은 감동하며 근엄하게 말했다.

“네! 각하의 명령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래.”

그녀가 대답하고 눈짓하자 마차 안이 시녀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들은 수도로 다시 돌아갔다.

마차 안에서 그녀가 홀로 생각했다.

‘목숨을 구해줬는데 그들 중 몇이 나를 위해 목숨을 걸까?’

그녀는 단순했다.

그녀가 그들을 구했기에 그들 중 그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믿음에는 근거가 필요했다.

라스타 왕국의 혁명 당시에 죽어 마땅했던 아이들을 살려주고 거뒀다.

철저히 세뇌했다.

그들의 부모와 형제, 방계는 죄인이고 성모인 그녀는 죄인의 핏줄이라는 오명을 씻겨주고 자애를 베푼 것으로 말이다.

인위적으로 그들에게 성모를 향한 신앙심과 감사함을 심었다.

그 신앙심은 그녀가 그들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알펜 왕국에도 이처럼 어떤 근거를 가지고 믿을 수 있는 세력이 필요했다.

가령 왕실을 향한 복수심이라던가, 그녀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먹고 살길이 막막하던가, 이런 이유들이 그녀를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들이 그녀를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녀가 그들을 믿는 것이 중요했다.

그녀는 근거 없이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 * *

시간이 약이라고 어느 정도의 기간이 지나지 대대적인 숙청도 끝나려고 하는 듯했다.

겨우 국왕이 숨을 돌리려고 했으나 그것은 무리였다.

메디치 백작이 행한 엄청난 짓거리를 겨우 수습했는데 이번에는 벨로나 공작이 문제를 일으켰다.

“반역자의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귀족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부당합니다.”

“흠…….”

국왕은 머리가 아팠다.

천천히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친왕파의 귀족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반역자는 몰살이 원칙이나 일부 여인들에 한해서는 평민으로 신분을 강등하고 살 수 있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엄청난 자비인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평민이 된 여인의 자식들에게조차 귀족가문의 양자가 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벨로나 공작이 살벌하게 함부로 입을 놀린 귀족을 노려봤다.

그 귀족은 눈이 마주칠까 두려운 듯이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이런 반응은 자연스러웠다.

벨로나 공작이 반역죄로 죽이고 몰살한 귀족들의 수가 어마어마하다.

그 가문과 관련된 가신들과 그 식솔들까지 합치면 고개가 절래절래 흔들어질 정도다.

“그들은 자신의 할아버지 혹은 삼촌이 지은 죄와 연관이 없어.”

국왕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다.

벨로나 공작의 의도는 이해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 혼인은 불가능하더라도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벨로나 가문에 입적하고 싶겠지.

이해는 하지만 벨로나 공작은 그리하면 아니 되었다.

하필 몰살에 가까운 숙청을 감행한 시점에서 말이다.

숙청을 당한 가문들의 재산은 왕실의 자산이 되었다.

혹시라도 신분이 강등된 여인의 자식이 귀족가문에 입적된다면?

죄인의 핏줄이 입적된 가문의 힘을 빌려서 멸문된 가문의 억울함을 주장하고 많은 귀족이 거기에 편승한다면?

신원이 회복된 가문은 빼앗겼던 재산도 돌려받을 수 있다.

왕실에서 가져간 재산을 돌려받게 해주면 입적한 가문에 재산의 일부를 주기로 하는 거래를 할 수 있음이다.

그 재산을 노리는 가문에서 반역자의 핏줄을 입양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후죽순으로 죄인의 후손을 방패로 왕실에 도전하는 가문들이 생겨나리라.

혹시 아나? 억울한 피해자를 주장하며 왕실을 부정하는 사특한 마음을 품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 가능성이 있다는 말로 부족하다.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은 분명했다.

보다 못한 라보 공작이 나섰다.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로 귀족이 될 수 없는 것은 부당하다. 옳은 말이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서 죄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모두가 알지 않은가.”

벨로나 공작이 눈을 찌푸렸다.

국왕과 친왕파에 관한 신뢰를 깨졌다.

점점 자신을 멀리하는 그들에게서 그는 더는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귀한 아들인 헤레스를 정식으로 벨로나 가문의 아들로 들여야 했다.

그래야 란델리노의 마수에서 아이를 지키기 수월했다.

란델리노가 란셀을 이용하여 헤레스를 괴롭히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나서지 못하는 것은 그가 법적인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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