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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203화 (203/221)

203화 파빌리오 공작

사내가 당황해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닙니다! 제가 본 배후는 검은 머리카락에, 검붉은 입술을 가진 중년의 남자였고 백작이라고 불렸다고 했습니다. 저는 양심이 찔려서 도저히 사실을 숨길 수 없습니다.”

사내의 말에 귀족들의 눈이 잠시 커졌다.

곧 의심의 눈초리로 국왕을 조심스럽게 봤다.

도저히 사실을 숨길 수 없다니…….

마치 국왕폐하가 거짓을 말하도록 종용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그는 상황이 자신에게 아주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바보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내가 이 많은 귀족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냐!”

알펜 국왕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결국 참지 못했다.

언성이 높아졌다.

이 개판에서 조용히 있다가 파빌리오 공작이 입을 열었다.

“폐하, 진의를 아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진의라니요! 폐하께서 이 많은 귀족 앞에서 한 귀족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라보 공작이 알펜 국왕의 편을 들었으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국왕을 향한 불신이 강렬하게 인식되었다.

같은 친왕파의 귀족 중 라보 공작과 알펜 국왕을 옹호하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간단합니다. 그대는 그 반역의 배후를 언제 어디서 봤는가?”

“저는 지난달 만월이 뜨던 밤에 할레니움가의 66-6 주택 앞에서 그를 봤습니다.”

사내의 말에 에드네 백작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진짜로 에드네 백작이 그곳에서 뭔가를 도모했다면 그 주택 안에 증좌가 있겠지요.”

만약 그 주택에 에드네 백작이 반역을 도모했다는 증거가 나온다면 사내의 말은 진실이고 알펜 국왕이 메디치 백작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했음이다.

반대로 주택에서 증거가 나오지 않거나 메디치 백작이 반역을 하려고 했다는 증거가 나온다면 사내가 국왕과 귀족들을 기만했음이다.

파빌리오 공작의 말은 합당하게 들리기는 했으나 결국은 국왕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었다.

왕실과 국왕을 향한 신뢰가 얼마나 깨졌으면 이런 말이 나오겠는가.

“이 반역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그 어떤 귀족도 왕궁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도주라도 하면 일이 복잡해지니까요.”

귀족들이 파빌리오 공작의 말에 호응했다.

“파빌리오 공작각하의 말이 지극히 옳습니다.”

“공작각하의 의견을 받아들여 지금 당장 왕실기사들을 그 주택으로 보내십시오!”

“맞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역도들이 도망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어서 움직여 주십시오!”

친왕파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폐하, 지금 당장 왕실기사단을 보낼 수 없다면 여기 있는 귀족들의 기사들을 모아서 조사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메디치 백작도 여기에 합세했다.

고위 귀족가문에 소속된 기사들이 조금씩 차출되어서 그 주택을 조사하게 된다?

그것은 왕실이 가진 사건조사의 주도권을 귀족들이 빼앗겠다는 것이고 이는 왕실의 권위가 그만큼 떨어진다는 의미였다.

메디치 백작이 아주 작게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당했구나.’

알펜 국왕은 깨달았다.

메디치 백작의 농간에 빠졌음이라.

여기서 조사를 거부한다면 거부하는 대로 그가 한 귀족을 누명 씌우려고 했음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그렇다고 조사를 해서 에드네 백작이 반역모의를 했다는 증거가 나온다면 그것도 그가 누명을 씌우려고 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다.

“당장 왕실기사단을 그곳으로 보내겠네.”

“현명한 결정이십니다.”

파빌리오 공작은 말을 마치고 슬쩍 메디치 백작을 쳐다봤다.

며칠 전에 메디치 백작이 찾아왔다.

그녀가 중립파 귀족들과 친왕파 귀족들을 만나고 다니며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이야기는 널리 퍼져있었다.

국왕폐하가 진짜로 노리는 세력은 중립파라는 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지나가던 개도 믿지 않을 헛소리였다.

“그이가 오지 않았는데 어쩌죠?”

“아닙니다. 기다리면 될 일이지요.”

하필 파빌리오 공작이 없을 때 오는 바람에 그녀는 그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기다림의 적적함을 해결해 준 사람이 파빌리오 공작부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정원을 안내했다.

“하이니아, 로드나, 카벨까지 부인이 얼마나 안목이 높으신 분인지 알겠군요.”

“이 꽃들의 이름을 다 알고 계시나요? 식물에 관한 지식이 풍부하시네요.”

파빌리오 공작부인은 그녀가 부담스러웠다.

그동안 보아 온 모습이 있고 들어온 모습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도 그녀와 거리를 두라고 했고 말이다.

자신도 원하지 않고 남편도 원하지 않는데 굳이 가까이할 이유는 없었다.

“하이니아는 마력이 비어진 마력석을 근처에 심으면 좀 더 잘 자란답니다.”

“정말로요? 그건 어떤 책에서도 보지 못했는데요.”

“얼마 전에 논문으로 나왔습니다. 하이니아는 오염된 마력을 흡수하는데 그 양이 한도를 넘으면 죽지요. 그렇지만 근처에 비어진 마석을 심어놓으면 그 흡수한 마력이 비어진 마석으로 간다고 하더군요.”

“세상에! 논문이라니 생각도 못했어요! 저는 시중의 파는 전문서적들만 봤거든요.”

“저희 정도 지식이면 논문은 쉽게 이해할 수 있죠.”

그런 여인이 직접 자신들이 있는 저택에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얼마나 몰려 있으면 그럴까 싶었지만 말이다.

그런 부담스러운 여인이었으나 지금의 시간은 즐거운 편이었다.

파빌리오 공작부인만큼 식물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식물학자들이 있을까? 자기 또래의 부인과 이렇게 척척 말이 통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대화를 나누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이가 곧 올 것인데 더 있다가 가시지요.”

“아닙니다. 더 늦어지면 제 아들이 걱정을 해서요.”

“그러면 어쩔 수 없지요.”

메디치 백작이 아쉬워하며 파빌리오 공작부인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앗!”

“죄송해요!”

그녀의 길고 날카로운 손톱이 파빌리오 공작부인의 손에 상처를 냈다.

메디치 백작은 당황해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아니에요. 괜찮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생각 이상으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파빌리오 공작부인이 다정하게 웃었다.

천하의 메디치 백작에게도 저런 허당끼가 있는 모습이 있구나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꽤 괜찮은 벗을 얻을 수 있겠구나 하며 좋게 생각했다.

그래서 파빌리오 공작부인은 자신에게 생긴 상처가 점점 보랏빛으로 변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상처를 치료하고 메디치 백작과 헤어지고 난, 날의 밤이었다.

“메디치 백작에게 파빌리오 공작이 찾아왔다고 전해라.”

마차가 아닌 말을 타고 달려온 파빌리오 공작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무슨 비극이 벌어진 듯한 혹은 벌어지기 직전의 표정이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어떤 언질도 없이 방문하는 것은 무례였다.

시종은 이 저택에서 가장 높은 분에게 손님을 쫓아낼지, 손님을 만날지에 대한 결정을 들어야 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당장!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와!”

그가 검을 뽑고 오러를 발산했다.

파빌리오 공작도 소드마스터였다.

저택 안에 있던 <다섯뱀> 기사들이 검을 들었고 파빌리오 공작가문의 기사들도 검을 들었다.

서로가 대치하고 있었다.

“파빌리오 공작각하, 무슨 일입니까?”

그녀가 담요를 걸치고 우아하게 나타났다.

그 태연자약한 모습에 그가 이를 갈았다.

“무슨 일인지는 그대가 잘 알겠지.”

“글쎄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대화가 필요한 상황인 것은 알겠군요. 손님 접객실로 모시거라.”

“알겠습니다.

그녀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그와 함께 접객실로 향했다.

마치 암살자와 걸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메디치 백작의 걸음에는 소리가 없었다.

이렇게 존재감을 숨기고 걸을 수 있는 존재가 있을까?

그것도 훈련받은 암살자나 기사가 아닌데?

그들은 접객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곧 따뜻한 차가 준비되었다.

마치 그의 방문을 예상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 어떤 일로 이렇게 무례하게 밤중에 쳐들어왔는지 들어 보지요.”

“내 아내가 아프네.”

“저런 좋은 분인데 안타까운 일이군요.”

메디치 백작의 능청스러운 태도에 파빌리오 공작은 손이 떨려왔다.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여인이었다.

지금 그 여인이 오늘 내일하고 있었다.

“그대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건강했던 사람이 갑자기 앓아눕더군.”

“제가 운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오해할 상황이 벌어지다니요.”

그녀는 한결같았다.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듯이 굴었다.

“의사는 독에 당했는데 어떤 독인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네. 그가 확신하는 것은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라는 것뿐.”

“독의 해독은 중급 신관이상만 가능하지요. 그들을 찾아가보시지 왜 여기에 왔습니까?”

“그들을 불렀지. 그런데 하필 오늘 새벽에 수도의 중급 이상의 신관들이 교황의 부름을 받고 떠났다고 하지 않는가?”

정말로 메디치 백작이 파빌리오 공작부인이 독에 당한 것과 관계가 없다면 수도의 중급 이상 신관들이 사라지는 일이 생길 수 있었을까?

마음 같아서는 검을 들어서 위협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용이 없는 짓거리다.

성물이 지켜주고 있는 메디치 백작을 해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무릎을 꿇었다.

소드마스터이자 공작인 그가 아내를 살리기 위해 굴욕을 감내한 것이다.

“제발 내 아내를 살려주게. 무엇이든 해 주겠네. 부탁이네.”

“으흠…….”

그녀가 그 모습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었던 잔을 내려놓았다.

“겨우 여인 하나 때문에 이렇게 나오다니 신기하군요.”

“그녀는 내 전부와 같은 사람일세.”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요.”

파빌리오 공작의 말에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

아버지는 아내를 향한 존중과 신의를 버린 지 오래된 작자였다.

그녀와 벨로나 공작은 서로를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처럼 살았다.

남편은 그녀가 언제 빈틈을 보일까 매의 눈초리로 보면서 그녀와 루비로즈 가문을 무너뜨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 경험으로 인해 그녀에게 결혼과 부부라는 것은 가문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다.

“쉬운 길로 가 볼까 해서 한번 시도했는데 다행이죠. 차선책까지 가지 않아서 좋아요.”

그녀가 무언가를 그 앞에 던졌다.

“병세와 고통을 완화해 줄 약입니다.”

“완전한 해독제는?”

“그거야 각하께서 해야 할 일을 다 했을 경우에 드려야지요. 왜 이러십니까? 피차 알 만한 사람들끼리”

지금 완전한 해독제를 줬다가 파빌리오 공작부인이 회복된다면? 파빌리오 공작은 아내를 잃을 뻔했다는 분노에 휩싸여서 그녀를 공격하려고 들 것이 뻔했다.

그러니 모든 일이 어느 정도 처리되고 난 뒤에 완전한 해독제를 주는 것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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