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단죄의 홀
왕궁의 거의 모든 고위 귀족이 왕궁으로 들어왔다.
알펜 국왕과 메디치 백작 간의 싸움은 알펜 왕국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큰사건이었다.
알펜 국왕이 지게 된다면 왕권은 크게 약화가 될 것이었고 이를 초래한 메디치 백작의 힘은 엄청나게 커질 것이다.
반대로 알펜 국왕이 이긴다면 메디치 백작이라고 해도 알펜 왕국에서의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이 도착한 곳은 넓고 거대한 재판장이었다.
귀족들은 이곳의 개방에 관해 놀라하며 수군거렸다.
“단죄의 홀이 열린지 몇 년 만이지?”
“선왕께서 살아계실 적에 열렸으니 20-30년 정도 되었을 것 같군요.”
단죄의 홀이란 사건의 경중이 너무 무겁고 커서 국왕이 직접 판결을 내리는 재판장이었다.
그 무겁고 큰 죄는 반역죄였다.
반역이 실패로 돌아간 역적들이 최종 판결을 받는 곳이었다.
“아직 반역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단죄의 홀을 열다니…….”
“반역의 증거는 있으나 그 증거가 메디치 백작과 관련이 있다는 증좌는 찾지 못했네.”
“어지간히 죽여 버리고 싶었나보지요.”
거사에 실패한 반역은 무조건 죽음이었기에 어떤 사람들은 이곳을 죽음의 홀이라고 불렀다.
귀족들은 국왕이 얼마나 메디치 백작을 싫어하는지가 피부로 느껴지는 듯했다.
동시에 이곳에 있어야만 하는 인물이 보이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벨로나 공작각하는?”
“몬스터들이 날뛰어서 전령이 가지 못했다고 서신을 보냈다고 하더군.”
한 귀족이 말도 안 되는 말에 눈이 커졌다.
국왕이 미쳤나 싶었다.
몬스터 토벌로 영웅이 된 벨로나 공작이다.
그런 그가 몬스터 토벌에서 밀리고 있다면 이미 그 지역은 난리가 났어야 했다.
알펜 국왕은 이상한 이유로 이 소식을 벨로나 공작에게 전하지 않은 것이다.
메디치 백작을 처리하겠다는 것은 부부의 죄는 연좌제를 적용한다는 법에 따라서 벨로나 공작도 처벌하는 것과 이어진다.
그것은 더는 두 사람이 같은 편이 아님을 드러낸 것과 같았다.
“어허, 아무리 싫어도 아내가 죽게 생겼고 벨로나 공작가문도 반역죄에 엮이게 생겼네. 그런데 전령이 가지 못해?”
다른 귀족도 놀란 귀족을 이해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펜 국왕이 벨로나 공작을 버렸다는 것은 이해했다.
오랜 친우이자 충신을 버릴 정도로 메디치 백작은 강한 적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고 벨로나 공작가문의 명운이 걸린 일이다.
어찌 가주에게 이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둘 중 하나겠죠. 이 상황에 관해 폐하와 벨로나 공작 사이에 이야기가 되었던가 아니면…….”
“폐하께서 벨로나 공작을 버리기로 한 것일 수 있지.”
그렇게 속닥거리는데 드디어 중요 인물 중 하나가 등장했다.
바로 메디치 백작이었다.
“헉!”
“아니! 어찌 저런!”
귀족들이 그녀의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인이 어떻게 저런 망조 들린 짓을 하는가.”
“드디어 정신이 나갔나 보네.”
그것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고 여인은 절대로 하면 안 될 짓이었다.
그녀는 바지를 입고 단죄의 홀에 들어왔다.
바지, 남성의 전유물인 바지를 입고 온 것은 파격 그 자체였다.
여인이 바지를 입는 일은 있을 수 없었으니까.
과거에 어떤 여인에게 바지를 입었다는 누명이 씌워져서 화형에 처한 일도 있었다.
메디치 백작은 마치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것이 과연 죽음이 다가와서 미친 것인지 아니면 완벽한 승리를 확신하는 오만함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웃기는 것은 그 파격적인 모습이 너무 잘 어울렸다는 사실이다.
검은 색의 밍크가 둘러진 망토는 그녀의 카리스마를 독보이게 해줬다.
“뭘 그리 수근거리십니까? 내가 페루제 루비로즈가 아니었다면 화형이라도 시켰을 눈빛이군요.”
“흠흠흠.”
“오해입니다. 백작각하.”
아름다운 미소와 살벌한 눈으로 귀족들을 보자 그들은 눈을 피하기 바빴다.
어떤 귀족은 사람들 사이로 슬쩍 숨기까지 했다.
그들은 준비된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모두가 자리에 앉고 시종의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국왕폐하께서 드십니다.”
“알펜의 태양을 뵙습니다.”
귀족들이 왕을 향한 정식 인사를 하고 알펜 국왕이 자리에 앉았다.
알펜 국왕은 여유만만한 얼굴로 메디치 백작을 바라봤다.
“허례허식은 치워 버리고 본론으로 넘어가지.”
“폐하와 저의 생각이 통했군요.”
그녀가 여유롭게 웃었다.
마치 조금이라도 불안함을 보이면 지는 것처럼 말이다.
“언제까지 그 오만함이 유지될지 궁금하군. 증인을 들라하라.”
증인, 그 단어를 듣고 메디치 백작이 눈을 찌푸렸다.
분명히 메디치 백작을 위협한 죄인이라고 규정했음에도 국왕은 그를 죄인이 아니라 증인으로 칭했다.
그것은 그녀를 위협한 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알펜 국왕의 명령에 왕실 기사들이 허름한 사내 하나를 끌고 홀로 들어왔다.
병색이 완연하고 추레하였으나 몸단장을 시켰는지 깨끗했다.
그는 홀에 있는 귀족들을 둘러보며 떨었다.
언제든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상위 포식자들이었으니까.
그들 중 하나라도 못된 마음을 먹는다면 죽은 목숨이었다.
다행히 국왕폐하가 지켜 준다고 했으니 안심이 되었다.
그 증인은 증언대에 섰다.
그리고 나서 시종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대는 이 자리에서 사실만 말할 것을 맹세하는가?”
“맹, 맹세합니다.”
“그대는 이 자리에서 한 치의 과장도 한 치의 숨김도 없어야 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근엄한 시종의 말에 긴장하며 사내는 대답했다.
그러자 시종이 알펜 국왕을 쳐다봤다.
“폐하, 증인이 증언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허하노라.”
시종의 말에 국왕은 흔쾌히 허락의 말을 내뱉었다.
오도독. 오도독. 오도독.
갑자기 무언가를 씹어 먹는 소리가 모두의 귀에 들렸다.
그 소리의 원인은 바로 메디치 백작이었다.
여인이 바지를 입은 것으로 부족해서 그녀는 단죄의 홀에서 쿠키를 먹는 기행을 벌였다.
언제 챙겨왔는지 예쁜 그릇 위에 쿠키가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본인이 슬쩍 품에 챙겨 온 듯싶었다.
전혀 귀족다운 행동이 아니었다.
국왕이 미친 사람을 보는 표정과 함께 혀를 찼다.
자신의 패배를 직감하고 미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막나가기로 했는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대는 참으로 대단해. 이 단죄의 홀에서 쿠키를 먹을 생각을 하다니.”
“어머, 너무 크게 들렸나요.”
그녀가 당황하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능청스럽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어서요. 이해해주세요.”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곳에서 간식을 먹다니 그대는 비위가 좋군.”
“사람 몇 죽어나간다고 흔들리면 이 자리에 못 있지요.”
“그래. 이곳의 판결 이후에도 그럴 수 있는지 두고 보지.”
자신의 비아냥에도 굳건한 그녀를 보다가 다시 시선을 증인에게 옮겼다.
어차피 이번에 그가 승리하면 사라질 오만함이었다.
그는 입을 열었다.
“그대는 왜 메디치 백작의 기사들에게 쫓겼는가?”
“저, 저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습니다.”
“그 보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이지?”
“반, 반역 모의였습니다.”
단죄의 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반역을 증명하는 증거가 나오기는 했지만 그것은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었다.
누명을 씌우기 위해서 말이다.
일개 평민의 말에 불과했지만 직접 반역을 언급하는 것은 그 위력이 컸다.
누명보다 진실에 무게를 실어줬음이다.
“그 배후에 관해서도 들었는가?”
“직접 목도했습니다.”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혹시, 그대가 본 인물이 여기에 있는?”
“여기에 있습니다.”
모두가 국왕이 몰아가려는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엄연히 추측이었다.
그들의 예상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게 누구?”
알펜 국왕이 모두가 궁금해 하는 것을 물어보던 중이었다.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메디치 백작의 아래에는 깨진 접시 조각들이 있었다.
그녀가 쿠키를 먹다가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평소의 완벽함을 자랑하던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운 허술함이었다.
시선이 한곳에 쏠린 와중에도 그녀는 기죽지 않았다.
“사람이 간식 좀 먹다가 실수도 하는 법이지요.”
“가지가지 하는군. 그대는 어서 그대가 누구를 맞는지 말하라.”
알펜 국왕이 짜증스럽게 말하며 사내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으쓱 올렸다가 내리고 끝이었다.
“저는 그분의 이름은 모르나 그분의 얼굴만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켜라.”
“알겠습니다.”
명령에 따라 사내가 손가락으로 반역의 배후를 알렸다.
그리고 그 인물은 국왕이 예상하지 못했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알펜 국왕이 놀라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 이게 무슨?!”
이 공간 안에서 가장 경악한 사람은 손가락으로 지명된 당사자와 중립파의 수장인 주리스 후작이었다.
“가문과 제 이름으로 말하건대 저는 정말로 억울합니다!”
“폐하! 이는 모함입니다. 에드네 백작은 그런 대죄를 저지를 인물이 아닙니다.”
에드네 백작은 주리스 후작의 오른팔이었다.
그가 반역의 배후라는 것은 주리스 후작이 진짜 반역의 배후라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당장 거짓을 말하고 있는 죄인을 잡아다가 벌을 내리십시오!”
“거짓말로 왕국을 뒤흔들려는 배후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조사해 주십시오.”
중립파가 강경하게 사내를 잡아다가 조사하라고 주장했다.
이러다가 진짜로 반역죄로 엮이면 다 죽는 것이었다.
“조용! 조용히 하시오!”
알펜 국왕이 아무리 소리쳐도 들어먹질 않았다.
단죄의 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조용히!”
메디치 백작의 일갈에 홀을 흔들었다.
이성을 잃었던 사람들이 조금은 진정이 되는 듯했다.
사실은 에레보스가 그들의 정신에 미약한 공포를 심어서 순하게 만든 것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아까 중립파 귀족들이 국왕의 명령을 듣지 않은 것은 에레보스가 과한 공포감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메디치 백작이 우아하게 알펜 국왕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폐하, 말씀하시지요.”
“너는 아까 나에게 한 말과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예? 폐하! 저는 아까와 다른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거짓을 말한다고 하십니까?!”
사내는 억울해하며 발을 동동거렸다.
남들이 보기에 그것은 진실로 보였다.
이것이 연기라면 그는 희대의 배우가 될 인재였다.
알펜 국왕이 주먹을 쥐며 떨리는 입술을 겨우 진정시켰다.
“이곳에 오기 전에 너는 나에게 말했다. 배후는 검은 머리카락에, 사과처럼 붉은 입술을 가진 여인이었고 백작이라고 불렸다고 말이다.”
백작이라고 불리는 여인은 알펜 왕국에서 오직 메디치 백작뿐이었다.
그 말을 귀족들에게 한다면 메디치 백작을 한순간에 옭아맬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사내의 거짓말로 그런 계산이 완전히 틀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