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200화 (200/221)

200화 중립파의 수장

페루제 공작부인! 그 여인이 아니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균열과 분열이 왕실을 쇠약하게 했다.

“제가 평온해야 왕실이 평온합니다.”

“그대는 망언이 특기인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지요.”

알펜 국왕과 페루제 공작부인의 대화는 이것으로 끝이 났다.

어느 합의도 없는 대결이 벌어진 것이다.

* * *

수도의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왕실 기사단과 병사들이 수도를 들쑤셨다.

“이 죄인을 숨겨주는 자가 있다면 가족까지 그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다!”

루비로즈 파의 기사들도 움직였다.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여야 한다.”

“알겠습니다.”

왕실 기사들과 달리 조심스럽게 그 죄인을 찾고 있다는 차이가 있었다.

그렇지만 아랫사람이란 무릇 윗사람의 눈치를 보는 법.

왕실 기사들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찾는 평민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불안한데 귀족들도 그 인물을 비밀리에 찾았다.

그 평민이 어떤 죄로 잡히느냐에 따라 그 주변까지 망하게 생긴 것이다.

가령 운이 없으면 반역죄로 엮일 수 있다.

그 죄인인 누군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그 불운한 인물이 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은 없었다.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으니 알음알음 백성들 사이에서는 그 인물이 큰 사단을 벌일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평범하지 않은 대응에 언론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괜한 추측도, 기자의 직업정신도 목숨을 위협할 요소가 되었다.

* * *

수도가 이렇게 왕실과 페루제 메디치 백작의 눈치를 보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 중 하나는 의외의 인물을 만나는 중이었다.

“저에게 힘을 실어주시지요.”

“어허, 내가 어찌 그래야 합니다.”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개인의 갤러리였다.

예술품들의 수준을 보아하니 이곳의 주인은 예술적 안목이 뛰어난 모양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과 어떤 사내는 한 그림을 서서 바라봤다.

“죄가 없다면 당당하게 왕실에 맡기면 그만입니다.”

“거짓 증거로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곳이 정계입니다.”

“이 왕국의 군주께서는 그런 모략꾼이 아니지요.”

“기회를 놓칠 분도 아니지요.”

그녀가 허리를 숙이고 진중하게 부탁했다.

그러자 주리스 후작이 몸을 돌렸다.

“중립파의 수장이신 주리스 후작께 간곡히 요청합니다. 이 조사를 방관하지 마십시오. 막아 십시오.”

“메디치 백작각하,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제가 난감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사내는 중립파의 수장인 주리스 후작이었다.

비록 그가 후작이고 그녀가 백작이라고 해도 윗사람 대접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백작이라고 해도 그 위세가 공작과 격을 나란히 했고 라스타 왕국에서는 왕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백작각하께서는 폐하가 각하를 노리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저희 중립파를 노리고 있다고 하시지만…….

“무슨 말씀하시려는 압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요.”

“네, 맞습니다. 폐하께서 그동안 친왕파, 반왕파, 중립파가 이루던 균형을 한순간에 깨버릴 분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주리스 후작은 국왕이 굳이 중립파를 건드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들을 공격해서 얻을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자칫 그들을 공격했다가는 중립파가 반왕파로 바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힘의 무게가 반왕파에 실리게 된다.

알펜 국왕은 자기 세력이 밀리는 짓을 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가문이 유지될 정도의 타격만 받는다면 그렇겠지요.”

“완전히 몰락하게 만들 것이란 뜻입니까?”

가문을 완전히 지우거나 도저히 회복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는 한가지 전제 조건이 이뤄져야 한다.

그 가문이 그렇게 몰락해도 될 만한 죄를 저질러야 한다.

예를 들면 반역죄라던가 그에 준하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중립파의 재산은 왕실에 귀속하게 될 것이니까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진 가문의 재산은 전부 왕실에서 가지게 된다.

세력 확정과 유지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다.

사람은 돈이 있는 곳으로 몰리기 마련이니까. 친왕파의 세력을 크게 할 밑바탕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중립파는 상황에 따라서 친왕파를 지지할 때가 있고 반왕파를 지지할 때가 있지요. 중립파를 처리한다면 오직 둘만 남게 됩니다.”

“친왕파와 반왕파.”

“적과 아군만 남는 것이지요. 얼마나 좋습니까? 아군이 아니면 눈치 볼 것도 없이 공격만 하면 됩니다.”

주리스 후작은 그럴듯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맹점이 있었다.

그 맹점은 이 모든 그럴싸함을 부정하도록 만들었다.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올리기 죄송하나 저는 메디치 백작각하께서 자신의 사람도 아닌 이들을 위해 나서줄 분이 아님을 압니다.”

과연 페루제 공작부인이 자신의 편도 아닌 세력을 위해 호의를 내밀 인물인가?

그녀가 벨로나 가문의 안주인이 되던 날부터 지금까지 그런 적은 한번도 없었다.

중립파의 세력을 깎아서 자기 세력으로 만든 적은 있어도 말이다.

“이런 말은 무례인 것을 알지만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그러십시오.”

“저는 각하께서 저희 중립파를 무너뜨리기 위해 수를 쓰는 것이 아닐까 우려스럽습니다.”

친왕파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중립파를 살려 주려고 한다.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그녀는 중립파가 망하여 생긴 정치적 공백 사이에서 실리를 얻을 사람이지 중립파를 살려두고 현 상황을 유지할 사람이 아니었다.

“저는 각하께서 자신이 살기 위해서 저희 힘을 빌리려고 억지를 부리시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

페루제 공작부인은 잠시 침묵했다.

주리스 후작의 말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은 중립파의 와해 속에서 이득을 취할 사람이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을 구해서 얻는 이득보다 그것이 더 컸다.

“그 사내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에 관해서는 침묵하면서 중립파가 위험하다는 말을 믿으라니요.”

“그 사내가 저를 위협했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저희 측에서는 그가 중립파를 위험에 처하게 할 정보를 입수했다는 정보를 얻었으니까요.”

주리스 후작이 자신에 관해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뻔뻔하게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닌 척을 해야 했다.

주리스 후작 말처럼 나는 정말 호의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다고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러니까 그 정보가 무엇이냐 말입니다.”

“그걸 알아내려고 했는데 놓쳤지요.”

페루제 공작부인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정말로 모른다는 듯한 표정이 압권이었다.

중립파를 위기에 빠뜨릴 정보를 가진 것을 아는데 무슨 정보인지 모른다고?

지나가던 거렁뱅이도 믿지 않고 침을 뱉을 헛소리였다.

자신이 윗사람 대우를 해 준다고 해도 너무하다 싶었다.

동시에 주리스 후작은 이런 개소리를 할 정도로 그녀가 몰려 있다고 여겼다.

“좀 더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지요. 현명한 결정을 내리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녀가 예의 있게 인사하며 갤러리를 나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후작이 혼잣말했다.

“정말 위험한 모양이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말이야.”

그는 이미 그녀가 몰려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그녀를 도와줄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 * *

주리스 후작이 혼잣말을 했듯이 그녀도 혼잣말했다.

“살려 주겠다고 기회를 주는데 저버리다니 어리석군.”

중립파는 그녀가 내민 손을 내친 대가를 크게 치르게 될 것이다.

* * *

페루제 공작부인이 주리스 후작과 1:1로 만났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그녀가 위기에 처한 것이 맞다며 수군거리는 무리도 늘어만 갔다.

그 소문에 제일 흔들리고 있는 이들은 바로 루비로즈 파에 속한 귀족들이었다.

“그 죄인 하나가 도대체 무엇을 알기에 백작각하께서 이리 나서고 계신단 말인가.”

“그러게 말일세.”

“루비로즈 파에서 옮겨야 하지 않을까 싶어.”

“살기 위해서는 그러는 것이 맞겠지.”

그들은 괜히 루비로즈 파에 속했다는 이유로 같이 가문이 몰락하고 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합이 잘 맞았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벌써부터 배신할 생각이 가득했다.

물론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상하군.”

“역시 그렇지. 너무 대놓고 내가 위기라고 알리는 꼴이지 않는가.”

“보기에 따라서는 그 정도로 몰려 있다고 해석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알잖아.”

“그분은 아무리 위태로워도 그것을 드러내는 분이 아니야.”

루비로즈 파 안에는 그 끼리끼리와는 아예 다른 수준을 가진 인물들이 있었다.

끼리끼리에 속하지 않는 이들은 자신이 모시는 분이 어떤 인물인지 알았다.

그래서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라스타 왕국은 각하께서 위기에 있는데 전혀 동요가 없는 모양이야.”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일 수 있지.”

“그런 것치고는 너무 담담해. 아무런 지원도 오지 않는 상황이고”

“흠…….”

“조금 더 관망하며 알아봐야겠어.”

그들은 메디치 백작이 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무엇을 원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나아갈지가 궁금했다.

그 과정에 자신들이 휩쓸리지 않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과 가문이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정보였다.

* * *

알펜 국왕이 갑작스럽게 고위 귀족들을 호출했다.

예고가 없던 부름이었으나 귀족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페루제 공작부인으로 인해 왕궁에서 언젠가는 그들을 부를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들은 왕궁 주요 귀족들이 회의할 때에 모이는 회의장에 들어갔다.

그 안에 여인들은 없었다.

예로부터 어린 왕을 대신하여 대비를 제외하고 여인은 출입할 수 없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메디치 백작각하, 어서 오십시오.”

“편찮은 곳은 없으신지요?”

“괜찮습니다. 그리고 설령 몸이 아프더라도 왕명을 어길 순 없지요.”

여인이 금지된 공간에 대비가 아님에도 페루제 공작부인은 발을 들였다.

그녀가 얼마나 독보적인 존재인지 알게 해 주는 일이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하지.”

알펜 국왕은 회의장에 들어오자마자 입을 열었다.

귀족들이 그에게 인사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국왕의 자리에 앉았다.

모두를 바라보는 자리에서 그는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번에 왕실기사단과 메디치 백작의 기사단이 충돌한 일을 알고 있을 것이오.”

“약간의 의견 충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루비로즈 파의 귀족이 입을 열었다.

그는 그날 밤의 일을 단순히 죄인 인계에 관한 의견 충돌로 봤다.

그러니까 크게 문제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의견 충돌이라니요. 엄연히 왕실의 권위에 도전한 일입니다.”

라보 공작이 반박했다.

그는 이 일을 왕실의 기사단에게 일개 백작가문의 기사단이 항명한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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