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무시
날이 밝자마자 알펜 국왕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입궁을 명했다.
그녀는 국왕이 그런 명령을 내릴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전령이 명을 전하려 오기 전에 이미 그녀는 왕궁으로 향할 채비를 끝마쳤으니까.
왕궁에 도착하자 시종이 그녀는 어딘가로 안내했다.
탁! 타닥! 타타닥!
알펜 국왕이 왕실 기사와 대련을 하고 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폐하,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보지 않고 기사를 향해 검을 내려쳤다.
그녀의 인사를 무시하면서 계속 움직였다.
감히 라스타 왕국과 알펜 왕국 북부를 호령하는 여인을 멀뚱멀뚱 서 있게 한 것이다.
알펜 국왕의 무시를 당하는 페루제 공작부인도, 무시를 하는 알펜 국왕도 아무렇지 않아 했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 침묵하며 그렇게 있었다.
사단이 벌어질까 조마조마한 것은 아랫것들뿐이었다.
국왕과 대련 중인 기사도 눈치를 슬쩍 봤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흘렀다.
국왕이 검이 기사의 목에 거의 닿았다.
“제, 제가 졌습니다.”
“자네가 봐줘서 내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이지.”
“아닙니다. 정말 대단하신 경지였습니다.”
국왕은 시종에게 검을 건냈다.
왕궁 시녀가 다가와서 그의 얼굴에 난 땀을 수건으로 닦았다.
그리고는 이제야 상대를 봤다는 듯한 표정으로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말했다.
“응? 언제 왔는가? 왔으면 말을 하지.”
분명히 그녀의 인사를 들었음에도 그는 모른 척했다.
“온 지, 별로 되지 않았습니다. 폐하의 뛰어난 실력을 구경하느라 인사를 드리는 것을 잊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뭘, 그리 사람을 띄어주나. 민망하게.”
인사를 무시당한 것이 아니다.
인사를 한 적이 없었으니까.
페루제 공작부인의 무논리였다.
무시당한 사람은 무시당한 적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무시당했다는 것을 인정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으니까.
무시한 사람은 무시한 적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무시했음을 인정하면 사과를 해야 해니까.
사이가 나쁘기는 했어도 성향은 비슷한 모양이었다.
“제가 검에 무지하지만 상당한 실력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 말하니 진심처럼 느껴지는군.”
알펜 국왕은 시종이 가져온 물을 마시려고 했다.
“네, 그래서 안타까웠습니다.”
손은 잔에 닿지도 못하고 멈췄다.
그가 매서운 눈초리로 그녀를 봤다.
“그 말은 무슨 뜻인가?”
“폐하께서 다른 신분으로 태어났다면 그 자질을 더 갈고 닦으며 능히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겠습니까?”
한마디로 너는 ‘국왕’으로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위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왕실 기사단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그러면서 검을 빼들고는 페루제 공작부인을 위협했다.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폐하를 모욕한단 말인가! 폐하, 저 말 자체가 폐하를 부정하는 것이니 이것이 역심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명령만 내리신다면 저 죄인을 제가 지금 처단하겠나이다!”
왕실 기사단장이 뿜어내는 살기는 그 말이 진심임을 알게 해 줬다.
그는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다.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두려움에 떨어야 정상이었으나 페루제 공작부인은 달랐다.
“그 정도로 폐하의 자질이 뛰어나시다는 말이었습니다.”
손가락으로 검등을 밀었다.
마치 산책 가는 길 앞에 있는 나뭇가지를 치우는 것처럼 말이다.
여유롭고 흔들림이 없었다.
국왕의 말 한마디에 그녀의 목숨이 달려 있을 수 있음에도 당당했다.
과연 어둠의 정령왕이 선택한 여인답다고 할 수 있었다.
국왕은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잠시간의 침묵이었다.
그들을 스치는 바람만이 시간이 흐름을 알려줄 정도의 찰나였다.
“그만하게. 내 자질이 기사보다 더하다고 칭찬하지 않는가.”
“폐하!”
“폐하께서는 말을 곡해하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기사단장과 달리요.”
왕실 기사단장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의 주군을 눈앞에서 모욕하는 것을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었다.
그 마음은 알펜 국왕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은근슬쩍 기사단장이 그녀를 죽이는 것을 허락할까 고민도 했다.
“폐하, 저 하나를 여기서 죽인다는 것은 후일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될 것입니다.”
그랬다.
알펜 국왕은 저 망할 여인을 죽일 수 없었다.
그녀는 신전이 인정하고, 신의 성물이 직접 선택한 성모였기 때문이다.
성물의 선택을 받아서 그 격이 교황과 동격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을 죽인다는 것은 신의 선택을 받은 이를 죽인 죄인이 된다.
민심을 저버리는 짓이고 동시에 반역의 명분이 되어줬다.
이단자를 왕의 자리에서 쫓아내자는 명분은 백성들을 움직이기 쉬웠다.
종교만큼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수단이 있을까?
무엇보다도 그녀를 죽일 수 없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래. 게다가 그대는 성물의 주인이 아닌가. 내가 그대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려도 성물이 다 막아 주겠지.”
“제가 죽었으면 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은지라 성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알펜 국왕도 그녀가 죽기를 원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그녀의 팔찌를 밟아버릴 것처럼 내려봤다.
그 팔찌는 망할 성물이었다! 성물의 주인을 보호해주는 기능은 아주 사람을 난처하게 했다.
성물이 아니어도 죽이기 만만치 않은 사람인데 성물 때문에 죽이는 것이 아예 불가능했다.
그동안 암살자들을 보낼 때마다 저 여인은 얼마나 상대를 비웃었을지 상상만 해도 열이 난다.
저 성물만 아니었다면 기사단장에게 그녀를 죽이라고 했을 것이다.
자신이 반역의 명분을 쥐어주는 것보다 그녀가 죽어서 생기는 분란이 왕국에 더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었으니까.
그녀가 죽으면 라스타 왕국은 분열할 것이고 그 틈을 노린다면 라스타 왕국을 먹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었다.
알펜 국왕은 그리 생각했다.
그는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양산은 적당하게 햇빛을 막아줬다.
오직 왕을 위한 자리만 마련되어서 그녀는 서 있어야 했다.
왕실의 부름을 받은 고위 귀족을 이리 대우하는 경우는 없었다.
알펜 국왕이 얼마나 그녀를 싫어하는지 알게 해 주는 행동이다.
“농담은 서로 그만하고 본론을 말하지.”
“네, 말씀하십시오.”
고위 귀족다운 대접을 받지 못했음에도, 국왕이 자신을 어찌 생각하는지 알았음에도 그녀는 담담했다.
“어제 그대 기사들이 어떤 사내를 쫓고 있었다는데 맞나?”
“네, 저를 위험에 빠뜨리려는 죄인이기에 쫓으라 명을 내렸습니다.”
여기 저기 기사로 전날의 일이 알려졌다.
수도 내에서 그 일을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더 많을 판국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부정하는 것이 더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내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네. 자네를 위험에 처하게 한 죄인을 얼른 잡으라고 말이야.”
“메디치 가문의 일입니다. 바쁘신 폐하께서 나서실 필요가 없는 일이지요.”
“수도 내에서 벌어진 일에다가 고위 귀족이 연루된 일이야. 그런데 가만히 있으라니? 신하의 일을 외면하는 못난 군주가 되겠지.”
알펜 국왕은 이일에 끼어들고 싶은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것은 떠보는 것이었다.
과연 전날의 일이 자신을 몰아세우기 위한 미끼였는지 아니면 진짜로 한순간의 실수가 만든 기회인지 말이다.
“설마 그런 아둔한 생각을 하는 작자들이 있겠습니까? 바보도 아니고요.”
“의외로 세상에 그런 바보가 많다네.”
그가 호통하게 웃으면서 물을 마셨다.
정말 시원했다.
물이 시원해서인지, 저 여인을 엿 먹일 수 있어서 가슴이 시원해서인지 당사자인 알펜 국왕도 잘 몰랐다.
어쩌면 둘 모두가 그를 시원하게 해 주는 것일 수 있겠다.
“걱정은 하지 말게나. 메디치 백작의 일이 아닌가. 내가 그 죄인을 잡아다가 하나하나 자세히 알아보고 처결을 내리도록 하지.”
그 조사 과정에서 페루제 공작부인의 죄가 드러난다면 그에 따른 처결을 내릴 것이다.
그녀가 약간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작게 속삭였다.
“폐하, 세상에는 조용히 넘어가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우아하고 아름답게 웃지 않았다.
왕궁에서 들어와서 국왕을 만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얼굴은 무표정에 가까웠다.
“지금의 평온함을 잃어버릴 일을 자초하지 마십시오.”
딱딱한 말투로 조용히 경고했다.
이 일에 관해서는 관여하지마라.
명확한 의사를 전했다.
그러자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비아냥거리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의 평온함? 그게 아니지.”
“…….”
“그대의 평온함이겠지. 그대가 누리고 있던 권력, 부, 명예 말이야.”
지금의 평온함? 알펜 국왕은 전혀 평온하지 않았다.
친왕파는 페루제 공작부인이 벨로나 공작가문의 안주인이 되면서 벨로나 공작가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되었다.
아무리 사이가 나쁘다고 해도 벨로나 공작과 그녀는 부부였다.
부부는 연좌제를 적용하고 있었기에 벨로나 공작이 완전히 그녀를 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라보 공작이 친왕파 전체를 아우르게 친왕파를 겨우 안정시켜 놓았다.
그런데 다시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설마 라보 공작가문의 인장을 훔쳐서 거짓 증거를 만들어 놓을 줄이야!
“그것을 위해 라보 공작가문의 인장을 훔쳐다가 거짓 문서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친왕파, 반왕파, 중립파가 이루는 균형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허상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을 따르는 루비로즈 파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판세가 한쪽으로 쏠릴 수 있었다.
그래서 친왕파도, 반왕파도, 중립파도 대놓고 그녀를 공격하지 못했다.
“그것을 위해서 루비로즈 파를 만들어서 분탕질했겠지.”
세 파벌이 모두 힘을 합쳐서 루비로즈 파를 공격한다는 방법도 있었으나 서로가 적대하던 친왕파와 반왕파가 힘을 합치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그 파벌 간에 신뢰가 있겠는가?
박쥐처럼 상황에 따라 친왕파에게, 반왕파에게 힘을 몰아주던 중립파는 어떠한가?
힘을 합치기로 해 놓고 루비로즈 파의 편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이런 불신들을 그들이 자신들 앞에 있는 거대한 적을 방관하게 했다.
오히려 눈치를 보는 꼴이라니 웃기기까지 하다.
“저는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직 왕국을 위해서 힘을 쓸 뿐입니다.”
국왕이 으르렁거리자 그녀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대비마마나 왕비마마께서는 그리 생각하시지 않을 것인데요. 저 같은 충신이 없다고 언제나 말하시니까요.”
“그대가 워낙 잘 구워삶지 않았는가. 나도 그 처세술을 배워보고 싶을 정도야.”
왕권 강화라는 목표는 자신의 대에서 이루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왕실 내부에서부터 왕을 지지 않는 왕족이 벌써 2명이다.
자신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대비와 아내인 왕비였다.
가족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이름을 가진 적처럼 느껴졌다.
오직 한 여인의 등장이 그리 만들었다.
가족이, 가족이 아니게 만들었고 권력 판세를 이상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