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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98화 (198/221)

198화 함정인가? 실수인가?

데뷔탕트 연회가 한창이던 때.

그곳과 사뭇 다른 장소에서는 나름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헉! 헉! 헉!”

수도 골목길에서 허름한 차림의 병색이 완연한 사내가 한쪽 팔을 손으로 잡고는 다급하게 달리고 있었다.

손을 잡고 있는 팔에는 피가 흘렀다.

그런 그를 어떤 무리가 뒤쫓고 있었다.

그들은 건장한 신체와 날렵한 몸놀림을 지녔다.

“쥐새끼처럼 여기저기를 뛰는군.”

“빨리 잡아야 한다.”

압도적인 신체적 차이에도 도망치는 사내가 그들에게 잡히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 사내는 이 수도의 뒷골목 토박이로 일반 백성들이 잘 모르는 골목길들을 전부 알았다.

그를 쫓는 이들은 수도 출신이 아니었기에 길을 헤맬 수밖에 없었다.

“이, 이제 거의 다 왔어.”

어두운 골목길이 아니라 대로가 눈앞에 나타났다.

수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니 자신을 죽이려는 작자들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리라.

눈빛에는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게다가 운이 좋게도 수도 치안 병사들이 보였다.

“살, 살려주세요!”

치안 병사들이 그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되었다! 그들이 봤다! 자신을 쫓던 이들도 도망갈 것이다.

“무슨 일인가?”

“저, 저를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저기요!”

누가 보아도 자신을 죽이려던 자들에게서 도망치던 행색이다.

수도의 치안 병사들은 긴장하며 그가 손가락질한 방향을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어쩌지?”

“이대로 돌아가면 죽는다. 그분이라면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겠지.”

“선택의 여지가 없군.”

그들은 검을 검집에 넣고 다가갔다.

그리고는 몸을 가리던 겉옷을 벗어서 어두운 곳에 던져버렸다.

빛이 드러난 곳에서 그들은 사내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쫓기던 사내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낭패를 본 표정을 지었다.

귀족 가문의 기사단에 속한 인물임을 알게 해주는 정복을 입고 있었다.

“거기서 멈추십시오.”

수도 치안병사가 검집을 들며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저지했다.

사내를 쫓던 이들은 순순히 발걸음을 멈췄다.

그 중 하나가 난감함을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이군요.”

“그대들의 소속을 말하십시오.”

그 능글거림에도 치안 병사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당연히 알려드려야지요. 저희는 메디치 백작가문의 <다섯뱀> 기사단 소속입니다.”

“메디치 백작가문?”

치안 병사들의 동공이 흔들렸다.

거물이어도 너무 거물이었다.

그 위세가 얼마나 강렬한지 국왕조차 한수 물러난다고 하지 않던가.

심장이 떨렸으나 하필 여기에 있는 치안 병사들은 본연의 책무에 충실했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그들의 소속만 듣고 그를 넘겼을 것인데 말이다.

“여기에 있던 사내를 죽이려고 했다고 하는데 맞습니까?”

<다섯뱀> 기사들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마치 일이 꼬였다는 듯한 생각을 하는 얼굴이었다.

곧, 겉으로 드러난 마음을 감췄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검을 뽑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죽이다니요? 절대 아닙니다.”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메디치 백작각하를 위험에 처하게 한 죄인을 잡기 위해서 쫓은 것입니다.

벌의 강도는 그 죄와 배후를 밝히고 난 뒤에 정해지겠지요.”

치안 병사들은 그 사내를 자신들의 뒤에 완전히 보내며 기사들의 시선을 막았다.

그러나 그들은 알았다.

기사들에게 이 사내를 데려갈 명분은 충분했다.

치안 병사들 위에 치안 기사들이 있었다.

병사보다 기사가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치안 병사들은 평민이며 일개 병사에 불과했다.

메디치 백작가문을 언급하며 허름한 사내를 데려가려고 한다면 이를 막을 힘이 없었다.

솔직히 지금이라도 이 사내를 넘기는 것이 마음 편했다.

“메디치 가문의 기사단 소속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수도에 입성할 당시에 받은 승인패가 있습니다.”

귀족들이 수도에 들일 수 있는 기사와 병사의 수는 정해져있었다.

승인패는 그들이 정식으로 수도에 들어오는 것이 허락된 존재라는 증거였다.

수도에 있는 기간과 왕실의 상징이 찍혀 있는 승인패는 그것이 진품임을 알게 해 줬다.

거물과 관련이 되어 있는데다가 이 사내를 보호할 명분도 미약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낀 사내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거, 거짓말입니다. 저들은 제 입막음을 하려고!”

“닥쳐라! 감히 어디서 거짓을 말하려는 것이냐!”

<다섯뱀> 기사가 사내의 말에 크게 소리쳤다.

대로를 지나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은근슬쩍 쳐다보다가 후다닥 사라졌다.

분위기가 살벌하다 못해서 무서웠다.

치안 병사들에게 향하는 살기에 애먼 사람들이 죽을 것만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기사님들에게…….”

“이게 무슨 짓인가!”

웬 일갈에 치안 병사들도 <다섯뱀> 기사들도 얼굴이 굳었다.

그들 앞에는 왕실 기사단의 단장과 기사들이 있었다.

치안 유지를 위해 지원을 나온 모양이었다.

“수도에서 벌어지는 모든 죄와 벌은 왕실에서 판단하고 결정한다. 그것이 법이거늘. 어찌 스스럼없이 저들에게 사내를 내어준다는 말인가!”

수도는 왕과 왕족이 거주하는 곳.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왕실에서 관리하는 것이 마땅했다.

각 가문의 영지 내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가문에서 처리하는 것과 같은 논리였다.

그런데 수도는 수많은 귀족이 모이는 왕국의 중심지다.

그것도 자기 영지에서 왕 노릇하던 귀족들이 말이다.

그 법을 지키는 귀족들이 몇이나 있겠는가.

왕실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데 귀족이 직접 처리해도 될 만한 일까지 손을 대기에는 좀 그러했다.

그런 일들을 모두 파악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말이다.

“그 법이 적용되지 않은지가 수십 년이지요.”

<다섯뱀>의 기사는 그것을 꼬집었다.

남들에게 적용하지 않는 것을 메디치 백작에게만 적용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뜻이었다.

“법의 틈새를 악용하는 자들이 있는 것이지 법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네. 그러니 그 자를 넘기게.”

“저희는 주군을 해치려던 죄인을 데려가야 합니다.”

<다섯뱀>의 기사들이 조심스럽게 칼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러자 왕실 기사단들도 칼을 뽑을 준비를 했다.

양측이 으르렁거리며 언제든 싸울 태세를 갖췄다.

왕실기사단과 <다섯뱀> 기사단 사이에서 치안 병사들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 못했다.

“어?”

한 치안 병사가 잠시 뒤를 돌아보더니 벙찐 얼굴이 되었다.

“그 사내가 사라졌습니다!”

“뭐?! 나는 바로 왕궁으로 갈 것이다. 나머지는 당장 그 자를 찾아라!”

“젠장! 어서 그놈 찾아! 나는 주군께 간다.”

왕실 기사단장과 <다섯뱀>의 기사는 부하 기사들에게 외쳤다.

“네!”

양측 기사들이 같은 대답을 하며 빠르게 그 사내를 찾기 위해 달렸다.

* * *

기사단장과 대립하던 <다섯뱀>의 기사는 바로 <붉은 뱀>의 단장인 레드카였다.

그는 쇼파에 눈을 감고 누워있는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부복했다.

“주군께서 말씀하신대로 되었습니다.”

“이제 국왕이 미끼를 물지, 물지 않을지만 보면 되겠구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말을 흐리는 레드카가 거슬렸는지 페루제 공작부인이 작게 눈을 떴다.

“너만 진상을 알고 있는 것이 좀 그러니? 로빈 단장의 사람이라?”

“아닙니다! 저는 로빈 단장이 아니라 주군의 기사입니다.”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레드카가 다급하게 말했다.

여기서 괜히 로빈 단장의 사람이라고 찍히게 되면 주군은 가차 없이 그를 버릴 것이었다.

로빈 단장이야 조카의 아버지였으니 살려둔다고 치고 자신은 주군에게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래?”

“정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거슬리면 자신이 지금 진행하는 일에 관해서 책임지고 있으니 더욱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다.

입막음하고 새로운 책임자를 뽑아야 하니까.

“뭐,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

레드카가 심드렁한 그녀의 말에 안도했다.

적어도 로빈 단장을 따랐다는 이유로 숙청되지 않을 것 같았다.

하긴 그러니까 이런 중요한 임무를 맡겼을 것이다.

“오직, 너와 나 그리고 그놈만이 알고 있는 일이다. 네가 잘 해야 한다. 알지?”

“물론입니다.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래. 이만 가봐.”

레드카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다시 눈을 감고 혼잣말했다.

“폐하께서 미끼를 물으셨으면 좋겠는데…….”

* * *

기사단장은 국왕을 알현하고 있었다.

알펜 국왕은 머리가 복잡했다.

“그러니까 페루제 공작부인의 기사들이 한 사내를 쫓고 있었다?”

“네.”

“그것도 이 수도에서?”

“그 사내는 자신을 입막음하려고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왕실 기사단장의 말에 그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눌렀다.

“그 여자는 일을 허투루 하는 사람이 아니야. 특히 사람을 죽이는 일은 말이지.”

“…….”

“그런데 나의 영역인 수도에서 그런 짓을 해?”

“믿기 어려우나 사실입니다.”

명분을 중요시하는 여인이었다.

그동안 저지른 일들도 나름 이해가 가는 명분들이 있었다.

그런 자신이 명분에서 밀릴 짓을 할 것 같지 않았다.

“둘 중 하나겠지. 나를 향한 함정이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죽여야 할 것을 봤을 수 있죠.”

자신의 말을 이은 기사단장이었다.

알펜 국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함정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수많은 사람이 있었던 대로에서 정체를 드러내면서까지 데려가려고 했으니까.”

그는 기사단장의 말에 동의했다.

함정이라는 가설보다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다는 것이 타당했다.

함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설펐고 이상했다.

정말로 친왕파를 위협하려고 했음이라면 더 노련했어야지 이렇게 대놓고 들킬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슨 비밀인데 죽이려고 쫓고 있던 것을 드러내면서까지 포기하지 못했을까?”

얼마 전에 제정신이 아닌 듯했던 페루제 공작부인.

아름답지 않았고 우아하지 않았고 추했던 페루제 공작부인.

자신을 무너뜨리겠다고 대놓고 선언했던 페루제 공작부인.

그 선언을 이루기 위한 무언가를 계획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그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이 그녀의 모든 것을 잃게 만들 죄라면?

‘이성을 잃고 빈틈을 보인 것이라면?’

국왕 자신이 생각해도 그럴싸했다.

그가 진중하게 명령을 내렸다.

“최소한의 수비 인력을 제외하고 왕실기사단 모두를 이 일에 투입해라.”

“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 사내를 찾아라.”

“반드시 찾겠습니다.”

* * *

다음날, 이 사건은 수많은 언론사에서 대서특필되었다.

[메디치 백작과 왕실 기사단의 대립.]

[과연 메디치 백작은 무엇을 숨기려고 하는가?]

[향후 메디치 백작의 행보.]

[메디치 백작이 위험을 감수할만한 비밀.]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 어떤 언론사도 제대로 된 진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생각한 가설들을 사실인 것처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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