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양과 담장
기세가 당당한 것이 사실만 말하고 있다는 자신감인가? 아니면 자신의 가장 뛰어난 제자를 향한 자부심인가?
“그대가 저 아이를 참으로 많이 아껴.”
“아낌을 받아야 할 아이입니다.”
“으흠.”
페루제 공작부인이 흥미롭다는 듯이 실리 남작을 보다가 와인 잔을 잡았다.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간결하면서도 우아한 몸짓이었다.
그들은 란델리노와 레티시아가 함께 춤추는 모습을 함께 바라봤다.
완벽한 커플의 춤이 끝나고 그들은 페루제 공작부인과 실리 남작에게 다가왔다.
“레티시아를 보자마자 어미는 모른다는 듯이 가 버리다니 섭섭하구나.”
“어머니가 아끼는 영애의 첫 춤을 하찮은 자에게 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페루제 공작부인은 전혀 섭섭하지 않은 표정으로 섭섭하다고 말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란델리노가 환하게 웃었다.
레티시아에게 춤을 청하던 영식들을 모조리 하찮은 작자로 전락시키면서 말이다.
주변에서 그 말을 들은 영식들의 얼굴은 붉어졌음이다.
모욕적이었으나 누구 하나 그 발언에 항의하지 못했다.
힘이 있는 자에게 약자는 고개를 숙이는 법이다.
“저는 어머니의 격이 떨어지지 않도록 나선 것입니다.”
“말은 정말 잘하지.”
그녀가 아들의 말에 미소로 답했다.
나름의 장난도 치며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란델리노와 페루제 공작부인.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들을 죽일까 고민하던 어머니와 어떻게 하면 어머니에게서 살아남을까 고민하던 아들처럼 보이지 않았다.
저택이 아닌 밖에서 그들은 완벽한 모자지간이었다.
물론 저택 안에서도 그들은 전혀 그런 적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얼굴에 철판을 깐 것처럼 말이다.
그녀가 레티시아에게 다가와서 안아주고는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레티시아, 그 어떤 공작가문의 영애도 너보다 아름답고 지혜롭지 못할 것이야.”
“과찬이십니다.”
알펜 왕국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공작가문이 있었다.
벨로나 공작가문과 라보 공작가문에는 여식이 없었다.
그렇지만 나머지 두 공작가문에는 공작 영애가 존재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가문에 딸이 있는 공작가문들을 자신보다 낮잡아 본 것이다.
공작가문의 영애들과 레티시아 영애를 비교하는 말을 했으나 실상은 두 공작가문과 ‘페루제 공작부인’을 둔 말이었다.
두 공작가문은 페루제 루비로즈보다 못하다고 말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말은 몰라도 나의 말은 진실이니 그대로 믿거라.”
주변에 있던 귀족들의 몸이 굳었다.
그 발언은 지금 반왕파의 수장 가문과 중립파 수장 가문을 적으로 돌리는 말이었으니까.
라보 공작가문과 이미 척을 있는 대로 진 상황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그 의중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귀족들이 동요하는데 비해서 레티시아는 담담했다.
“그렇다면 더욱 그 말씀을 받들 수 없습니다.”
“뭐?”
그뿐인가?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을 부정하는 잘못까지 저질렀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소름끼치는 인형이 어린 영애를 보는 것 같았다.
귀족들이 여기서 사람 하나가 죽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공작부인께서 없으셨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공작부인께서 지금의 저를 만드신 것이지요.”
페루제 공작부인의 표정이 점점 풀어졌다.
레티시아를 깜찍하다고 생각했다.
“공작가문의 영애들이 저보다 못하다고 함은 영애들의 자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공작가문이 부족해서다?”
자신이 후원하여 수준이 높은 교사들과 실리 남작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줬다.
그 후원이 전혀 아깝지 않을 만큼 레티시아는 성장했음이다.
그렇기에 어떤 말이 자신의 기분을 좋게 하는지 알았겠지 싶었다.
연회장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티시아, 아무리 사실이라고 해도 너무 대놓고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란다.”
“죄송합니다. 경솔했습니다.”
“웃어른에게 혼이 났으니 두 가문에서도 뭐라고 하지 않겠지.”
그녀가 걱정 따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한손을 내저었다.
귀족들은 당혹스러웠다.
이 대화 어디에 레티시아 영애를 혼내는 것이 있었는가? 아무리 그들의 대화를 떠올려 봐도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녀를 혼낸 적은 없었다.
말투는 애정이 가득했다.
질책하고 훈계하는 것이 아니다.
뭔가 훈계하는 척을 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두 공작가문을 모욕한 것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었다.
사실을 너무 적나라하게 말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건 대놓고 인정한 꼴이다.
자신이, 루비로즈 백작 가문이, 메디치 백작가문이 두 공작가문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이다.
“만약 이 문제로 너에게 두 공작가문이 뭐라고 한다면 나에게 말하거라.”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글쎄… 적어도 둘 중 하나는 그럴 수 있거든. 아니면 둘 전부…….”
그녀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을 흐렸다.
연회장에 아름다운 연주가 들렸다.
데뷔탕트를 하게 된 화사한 영애들은 홀 중앙에서 춤을 췄다.
그 연주와 아름다운 영애들은 관심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모든 귀족들의 관심을 페루제 공작부인과 레티시아 영애가 가지게 된 것이다.
방금 전까지 이곳에서의 데뷔탕트를 만족해하던 영애들은 지금 최악의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한 영애는 휴게실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진정해. 어른들이 말씀하셨잖아. 이 데뷔탕트의 주인공은 레티시아 영애라고…….”
“맞아. 몰랐던 것도 아니잖아.”
눈물을 흘리는 영애를 친구들이 위로해 줬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이게 뭐야!”
이 데뷔탕트 연회가 끝나면 모두가 페루제 공작부인과 레티시아 영애에 관한 이야기만 할 것이다.
그들의 부모님은 여기에 있는 인맥들과 연이 닿게 된 것만으로 최고라고 할 것이다.
그 중에 하나만 사위로 삼아도 성공했다고 할 것이다.
“그 영애만 처음이 아니야! 우리도 처음이라고! 다시는 오지 않을 날이란 말이야!”
그렇지만 영애들의 입장은 다르지 않는가.
사교계에 자신을 소개하며 데뷔를 하는 날이다.
그날만큼은 자신만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잊혀져도 너무 강렬하게 잊혀지게 되었다.
“우린 그저 레티시아 영애의 데뷔탕트에 참석한 영애로 기억이 될 거라고!”
그들과 대화를 나눴던 영식들도, 그들과 춤을 췄던 영식들도 모두 레티시아에게 관심을 쏟았다.
이 데뷔탕트 연회에서 그녀들은 레티시아 영애를 독보이게 하기 위한 쩌리에 불과했다.
데뷔탕트를 위해 자신을 꾸미고 그날을 기대하던 소녀들에게는 상처가 될 날이었다.
아직 어린 그들은 몰랐다.
이 데뷔탕트 연회에서 레티시아 영애와 함께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수준은 높아졌음을 말이다.
부모님이 아무리 말해도 실제로 직접 그것을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모양이다.
레티시아는 또래 영애들의 상황을 전혀 몰랐다.
그녀에게 데뷔탕트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좋은 가문에 시집가는 것도, 사교계의 중심이 되는 것도 그녀가 원하는 것이 전혀 아니었으니까.
‘빨리 끝냈으면 좋겠다.’
그녀는 데뷔탕트 연회가 얼른 끝나버렸으면 했다.
자기 방에서 하이힐을 벗고 편한 옷을 입고 침대에서 쉬고 싶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기분이 나쁘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그녀는 와인 잔을 들고 레티시아에게 다가왔다.
“순수하고 어렸던 아이가 이렇게 숙녀가 되다니 세월이 빠름을 느끼는구나.”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에 그녀가 말하려고 했는데 결국 말하지 못했다.
“내가 작은 문제 하나를 낼까?”
술에 취한 듯한 페루제 공작부인이었으나 그 와중에도 우아함을 유지했다.
실리 스승님이 술에 취했다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을 정도였다.
“제가 맞힐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걱정하지 마렴. 아주 쉬운 문제거든. 이거 치워.”
“네.”
페루제 공작부인은 자연스럽게 지나가던 시종에서 와인 잔을 건넸다.
그리고는 시원을 바람을 맞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레티시아, 왜 목장의 양들이 안전한지 아니?”
“담장이 있어서이지요.”
“맞아.”
그녀가 즐거워하며 박수를 작게 쳤다.
그 박수소리는 과하지 않으면서도 기분이 좋음을 드러낼 정도는 되었다.
“다르게 생각하자면 양은 담장 밖을 나가면 죽는다고 할 수 있지. 왜일까?”
“밖에는 양을 위협하는 맹수나 양을 위험에 빠뜨릴 절벽과 같은 환경이 있으니까요.”
귀족들은 페루제 공작부인이 저런 실없는 소리를 할 만큼 기분이 좋은가보다 하고 넘어갔다.
반면에 레티시아는 부채를 쥔 자신의 손에 힘을 줬다.
떨려오는 다리에 힘을 주고 굳어버릴 것만 같은 얼굴도 억지로 미소를 유지했다.
“가끔 목장주인의 부주위한 틈을 타서 담장을 넘어가버리는 양들이 있지.”
“종종 그런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담장을 넘어간 대가는 크지.”
목장주인은 페루제 공작부인이고 목장의 양은 레티시아였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녀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자신이 허락한 범위에서 자유를 누리라고 말이다.
레티시아는 평소와 같았다.
언제나처럼 페루제 공작부인을 만족시켰다.
평소와 다른 점이 하나가 있다면 부모님과 함께 벨로나 공작령을 떠나서 새로운 삶을 살아 볼 예정이었다는 것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담장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즉, 그녀가 허락하지 않은 자유였던 것이다.
“담장 밖을 나간 양과 같은 새끼 양을 또 낳을까봐 부모 양을 잡아먹는 경우도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지.”
레티시아는 벨로나 영지에서 떠나면 자신뿐 아니라 사랑하는 부모님까지 해를 당할 수 있음을 들었다.
말투는 농담인 듯했으나 잠시 반짝였던 눈빛은 경고임을 깨닫게 했다.
‘나는 공작부인의 허락 없이는 떠날 수 없구나.’
레티시아는 목에 족쇄가 감기는 기분이 들었다.
이 화려한 연회장이 마치 감옥처럼 느껴졌다.
이 데뷔탕트 자체가 자신에게 빚이 되는 것 같았다.
스승님이 호의로 연회를 준비해 줬으나 그 호의 안에 과연 페루제 공작부인의 뜻이 없었다고 할 수 있는가?
왜 자신은 스승님의 호의만 믿고 안일하게 굴었는가?
왜 페루제 공작부인께서 데뷔탕트를 준비하라고 했을 때에 순진하게 넘어갔을까?
왜 자신을 예뻐하여 그랬다고 단순하게 생각했을까?
왜 갑작스러운 호사를 경계하지 않았을까?
레티시아는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정신을 빠르게 차려야 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괜히 성서에 양이 어리석은 동물로 나오겠습니까? 우둔하고 바른길로 안내하려고 해도 모르니 그러지요. 제가 양이었다면 얌전히 주인의 뜻대로 했을 것인데 말이에요.”
레티시아가 뱉어낼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 데뷔탕트만 끝나면 떠날 생각이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대놓고 한 말이다.
레티시아가 부모님과 벨로나 공작령을 떠나면 반드시 죽게 할 것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다정하게 그녀에게 포옹했다.
그리고 뭐라고 속삭였다.
“정말 완벽한 대답이야.”
시체처럼 차가운 공작부인의 몸 때문인지 그녀의 가슴도 겨울처럼 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