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레티시아의 데뷔탕트
페루제 공작부인이 한껏 일그러진 표정으로 국왕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왕궁 밖까지 퍼졌다.
모두가 궁금해했다.
과연 페루제 공작부인은 무슨 일로 그곳에 갔을까?
과연 페루제 공작부인은 국왕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귀족들은 벨로나 공작도 주시했다.
그녀가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벨로나 공작이 막기 위해 움직일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이 민망하게 그녀는 반응이 없었다.
벨로나 공작가문의 저택에서 나오지 않았고 누구의 방문도 허락하지 않았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이번에 좀 더 수도에 있기로 했다면서요?”
“벨로나 공작각하는 몬스터 토벌 때문에 돌아가셨는데 말이에요.”
“원래 같이 벨로나 공작령으로 돌아갔잖아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 죽겠어요.”
“궁금하다는 말보다는 걱정이 된다는 말이 맞죠.”
평소와 다르면서 고요한 것은 징조였다.
고요함 이후에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고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귀족가문의 안주인들은 모이면 모두 그녀에 관해 말을 꺼냈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 실리 시녀장님이 데뷔탕트를 주최한다면서요?”
“남작으로 데뷔탕트를 연다고 하더라고요.”
“실리 시녀장님이 남작이에요?”
“공작부인이 여기에 오기 전에 라스타 왕국에서 남작 작위를 받았다고 들었어요.”
그녀의 행보 다음으로 나오는 대화 주제는 실리 시녀장이 여는 데뷔탕트였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최측근으로 그 영향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수많은 양자, 양녀가 그녀에게 인맥이자 힘이 되었고 실리 남작의 남작령에 있는 군사들은 언제든 페루제 공작부인을 위해서 검을 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정치적 세력이 될 기반과 그를 유지할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실리 시녀장이 여는 데뷔탕트 무대가 보통이겠는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 줄 것이다.
“온갖 인맥이 다 올 것인데 이번에 우리 아이도 거기서 데뷔탕트를 할 수 있도록 힘을 다하고 있어요.”
“수도 귀부인 중에 거기에 자기 딸을 데려가고 싶지 않아하는 부인이 얼마나 있겠어요?”
수많은 귀족 여인들의 관심을 받으며 시간은 흘렀다.
그리고 모든 귀부인과 영애가 초대받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데뷔탕트 날이 도래했다.
* * *
실리 시녀장인 실리 남작은 평소와 다르게 화려한 가면과 값비싼 보석들이 어우러진 드레스를 입었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시녀들의 치장을 받는 레티시아를 바라봤다.
시녀들은 분주하다못해서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상사가 올곧은 자세로 서서는 자신들을 날카롭게 바라보면 누구라도 그리될 것이다.
지옥 같은 상사와의 시간을 끝내기 위해서 시녀들은 필사적이었다.
그 노력의 성과인 레티시아는 그들의 감정이 느껴져서 난감했다.
“다 꾸몄습니다.”
“그래? 어디 한번 일어나서 몸을 돌려 보렴.”
“네.”
꿀꺽.
시녀 하나가 긴장하여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다른 시녀가 옆구리를 툭 치는 것은 당연했다.
무서운 상사에게 혼이 날 빌미를 주기 싫었으니까.
물론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실리 남작은 레티시아를 꼼꼼하게 머리부터 발까지 봤다.
입술은 마치 사과처럼 붉었고 금발은 태양처럼 빛났다.
황금빛 드레스는 그녀의 머리카락과 어우러져서 아름다움을 뽐냈다.
실리 남작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하며 레티시아의 손을 잡았다.
“레티시아, 정말 아름답구나. 데뷔탕트를 하는 그 어떤 영애들도 너보다 아름답지는 못할 거야.”
“스승님이 아니었다면 이런 데뷔탕트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에요. 감사합니다.”
“뭘, 너는 이런 대우를 받아야 마땅한 아이임을 명심해야 한다.”
“알겠어요.”
레티시아가 실리남작의 팔을 다정하게 잡고 말했다.
“그러면 이제 연회장으로 가볼까요?”
“벌써 시간이 그리 되었구나. 어서 가자.”
그들은 마치 모녀지간처럼 사이좋게 연회장으로 향했다.
“실리 남작님과 레티시아 영애가 연회장에 도착하셨습니다.”
시존의 안내와 함께 문이 열리고 미리 연회장에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닿았다.
고급지면서 얼마를 들였는지 알기 어려운 데뷔탕트 연회였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생화들로 장식이 되어 있었고 음식도 일반 귀족 연회에서는 볼 수 없는 귀한 재료들로 만들어졌다.
이곳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레티시아와 같이 데뷔탕트를 치르는 영애들의 격도 높아질만 했다.
원래라면 경험할 수 없는 수준의 데뷔탕트였으니까.
실리 남작이 얼마나 레티시아를 아끼는지 알게 해 주는 모습이다.
실리 남작이 초대받은 귀족들과 영애들에게 말했다.
“여기에 와주신 모든 분들께 참석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모두 즐겁게 이 연회를 즐겨 주십시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름을 받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이 연회장에 있는 귀족들이 실리 남작의 인사가 격렬하게 답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레티시아 영애를 드디어 만나게 되었군요. 역시 소문대로입니다.”
“아닙니다. 로시테 자작님이야 말로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그 지혜로움이 느껴지세요.”
“어허! 아직 소개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소문처럼 지혜로움이 보이시니까요.”
그러면서 레티시아의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세하게 관찰했다.
우아한 몸가짐은 일상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적당한 유머, 다정한 미소와 격조있는 말투는 그녀가 얼마나 교양이 있는지 느끼게 해 줬다.
귀족들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레티시아에게 호감을 가졌다.
특히 젊은 영식은 더욱 그러했다.
페루제 공작부인과 실리 남작의 비호를 받는 레티시아는 가문은 별 볼 일 없어도 그 가치가 높았다.
“레티시아는 내 딸입니다. 나를 대하는 마음으로 아껴주세요.”
“그럼요.”
“암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실리 남작이 친자식도 아닌데 대놓고 딸이라고 칭할 정도였으니까.
하긴 엄청나게 아끼기에 사치스러운 데뷔탕트 연회가 열어줬을 것이다.
실리 남작은 자신의 양자들에게도 데뷔탕트를 열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미혼의 영식들은 그렇게 생각하며 동시에 이런 생각도 했다.
‘레티시아 영애와 잘되면 페루제 공작부인과 실리 남작의 비호와 권세를 등에 업을 수 있다.’
레티시아는 알펜왕국에서 귀족 자제들이 가장 원하는 신붓감이 되었다.
연주자들이 왈츠 연주를 시작하자 우르르 레티시아에게 몰려갔다.
“레티시아 영애, 저와 춤을…….”
“아니, 저와 춤을 함께 해 주십시오.”
“무슨 소리야. 영애, 제가 능숙하게 리드하겠습니다. 저와!”
모두가 레티시아 영애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그 중심의 당사자인 레티시아가 어떤 마음인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부담스럽다. 빨리 끝났으면…….’
번쩍거리는 연회장.
화려한 드레스.
값비싼 장신구.
고급진 디자인의 하이힐.
자신을 비호하는 권세가를 등에 업으려는 사람들.
그 권세가들과 연을 맺고 싶어하는 사람들.
이 상황이 주는 모든 것들이 부담스럽고 싫었다.
스승님의 선의와 페루제 공작부인의 호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데뷔탕트라서 마음은 더 불편했다.
거절할 권리가 없는 입장이었기에 지금 이 자리가 더욱 힘들게 느껴진 것인지도 모른다.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저는…….”
춤을 출 생각이 없다고 말하려고 했다.
좀 이따가 스승님의 사람 중 하나와 춤을 추고 끝낼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시종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페루제 공작부인과 란델리노 백작각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모두가 나불거리던 입을 멈췄다.
그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물고기의 비늘을 떠올리게 하는 은빛 드레스는 우아하고 기품이 흘러넘쳤다.
란델리노의 의상은 간결하면서도 위풍당당한 느낌을 들도록 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실리 남작에게 다가가서 포옹했다.
“늦게 와서 분위기를 망친 것은 아닐까 싶어. 제때 도착하려고 했는데 바빴거든.”
“공작 부인께서는 언제 오시든 간에 오시는 것만으로 그곳을 빛나게 하시지요.”
“그대는 내 기분이 좋을 이야기를 해서 좋아.”
그들은 훈훈하게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공작 부인,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영애도 아니고 레티시아, 너의 데뷔탕트다. 당연히 와야지.”
페루제 공작부인은 자기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장미회 부인들의 자식들이 참석하는 데뷔탕트에도 오지 않았다.
이제 막 사교계에 발을 들이는 애송이들에게 관심을 둘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니 그녀의 참석은 레티시아가 얼마나 예쁨을 받고 있는지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란델리노 백작각하,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놀라게 해 주고 싶었거든.”
레티시아가 살짝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그 표정에는 장난스러움이 담겨있었다.
메디치아 아카데미 시험 준비로 오지 못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친구의 참석에 그녀는 기뻤다.
란델리노는 그 마음을 알아챘기에 윙크하며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영애에게 저를 각인시킬 수 있다면 얼마든지 놀라게 해 줄 수 있답니다.”
“백작각하, 다음에 이런 식으로 저를 놀라게 하면 삐질지 모르니 자중해 주세요.”
그들은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춤을 추기 위해서 홀 중앙으로 갔다.
누구도 춤을 추자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러웠다.
다음 대 공작이라는 성공된 미래가 기다리는 젊은 소년과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아름다운 영애는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두 사람보다 더 잘 어울리는 조합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들은 춤을 추면서 서로를 향해 미소 지었다.
“란델리노 백작님이 오셔서 정말 좋아요.”
“그놈의 란델리노 백작님. 그냥 란델리노라고 불러줘.”
“눈과 귀가 많잖아요. 괜한 빌미를 만들 수는 없죠.”
란델리노가 미세하게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저는 제 분수를 누구보다 잘 안답니다.”
그녀가 말하는 ‘빌미’는 그녀와 자신 사이를 연인이라고 오해하게 되는 계기를 뜻했다.
레티시아는 야속할 만큼 그 거리를 잘 쟀다.
‘너는 언제나 나에게서 한걸음 물러나 있구나. 그렇게 어머니의 손에서, 나의 곁을 벗어나고 싶어?’
그녀는 란델리노 자신을 향한 애정보다 그들이 없는 자유를 더 갈망했다.
그는 그녀가 원하는 자유보다 자신이 위에 있기를 원했다.
그 언짢음을 드러낸 찰나의 순간을 레티시아는 잡아내지 못했다.
그런 그들을 뿌듯하게 바라보고 있는 인물들이 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과 실리 남작이었다.
“그 총기가 넘치던 아이가 이렇게 우아한 숙녀로 자라다니 세월이 참 빨라.”
“정말 그러합니다.”
“가르치는 것은 어떤가? 바쁜 시간을 쪼개서 가르치는 것이 쉽지는 않은데.”
“가르친 하나에 열중하던 아이가 지금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압니다. 어찌 가르치는데 즐겁지 않겠습니까?”
실리 남작은 이제 레티시아를 가르치는 일에서 손을 떼는 것은 어떠냐는 주인의 말을 부드럽게 거절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담담하게 그 뜻을 존중했다.
자신을 보필한 세월을 생각하면 이런 일을 거절해도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