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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95화 (195/221)

195화 선전포고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왕궁으로 쳐들어갔다.

그녀는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발걸음에서부터 그녀가 상당히 기분이 더럽다는 것이 느껴졌다.

시종들이나 시녀들 그리고 귀족들조차 그녀의 모습에 흠칫했다.

그들은 빠르게 그녀에게 허리를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그들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갈 길을 갔다.

그녀는 어떤 거대한 문 앞에 섰다.

그곳을 지키던 기사들이 그녀의 앞을 막았다.

“폐하께서는 지금 회의 중이십니다.”

“회의가 끝난 뒤에 오십시오.”

왕궁 기사들은 그녀를 막으면서 긴장했다.

그녀가 그들을 올려다봤다.

“비켜.”

“안 됩니다.”

“그래?”

“헉!”

엄청난 살기였다.

기사들조차 다리를 흔들리게 만드는 살기는 숨을 쉬기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다리에 힘이 빠지고 그들은 털썩 주저앉았다.

에레보스의 힘을 약간 썼는데 그런 것이다.

“열어라.”

“네.”

페루제 공작부인 곁에 있던 시종이 땀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 기사들은 주저앉는 것으로 끝이 났지 시종은 바로 죽을지 몰랐다.

그렇다고 폐하의 윤허 없이 문을 열었다가는 어떤 벌을 받을지도 몰랐다.

페루제 공작부인을 미워하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릴 것이 분명했다.

“비켜!”

그녀가 시종을 밀어버리고는 자신이 직접 문을 열었다.

전혀 귀족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우아하게 기다리거나 국왕이 어쩔 수 없이 문을 열도록 명령을 내리도록 했을 것이다.

그런 귀족적인 태도가 뭐가 그리 중요할까?

그 안일함이 빅토르를 잃게 만들었음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리 생각했다.

“핫! 이게 무슨 짓인가!”

무례한 방문자의 의상이 드레스임을 확인하자마자 알펜 국왕은 눈을 찌푸렸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회의 중에 난입할 여인은 오직 하나였다.

국왕에게 그녀는 이름만 들어도 짜증이 나는 여자였다.

그런 인물이 눈앞에 있으니 짜증을 넘어서 분노가 느껴졌다.

“이제는 기본적인 예법조차 지키지 않다니……….”

국왕이 비꼬는 말투로 말하다가 멈췄다.

정확히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굳은 것이었다.

그녀는 우아한 페루제 공작부인이었다.

언제나 우아했기에 사람들은 완벽한 귀족의 표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눈앞의 페루제 공작부인은 페루제 공작부인이되 페루제 공작부인이 아닌 것만 같았다.

살기를 드러내도 아름다웠던 여인은 아름답지 않았다.

광기를 보여도 아름다웠던 여인은 아름답지 않았다.

슬픔을 비춰도 아름다웠던 여인은 아름답지 않았다.

아름답지 않은 페루제 공작부인?

그것으로는 표현이 부족하다.

그녀는 살기도, 광기도, 슬픔도 모두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꾸며내지 않은, 계산되지 않은 모습은 추했다.

그 추함은 앞으로 일어날 비극을 암시하는 듯한 착각을 줬다.

알펜 국왕은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대…….”

자신이 모르는 어떤 큰일이 벌어졌음을 말이다.

국왕은 어떤 일로 왔는지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두 나가.”

그녀는 국왕의 말을 끊어 버리고 회의장의 귀족들에게 말했다.

국왕을 욱하게 만들었다.

감히 국왕이 보는 앞에서 왕의 신하들에게 하대하고 명령하고 있었다.

왕실의 지엄한 권위를 안다면 감히 할 수 없는 짓거리였다.

“지금 짐이 여기에 있거늘! 그대가 윗사람인양 구는 것인가!”

“폐하나 저는 잘 알지 않습니까? 세상에는 알면 안 되는 것을 알면 어찌 되는 지를요. 다음날을 맞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지금 협박하는 것인가?!”

“그것은 생각하기 따라서지요.”

회의장에 있던 귀족들은 당장이라도 엉덩이를 떼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그동안 행해 왔던 일들을 생각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그들을 죽이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리라.

먼저 공격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시도하지 않은 이들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 앞에 명령을 수행하던 부하들의 시신이 배달되었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마침 회의장에 친왕파 귀족들만 있으니 뼈가 아프실 수 있겠군요.”

감추지 않고 드러난 추함에 귀족들이 움찔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떠는 귀족이 있을 정도였다.

국왕은 그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또 무슨 수를 쥐고 있길래 이러는지 모르겠으나 일단 따르는 것이 맞았다.

정말로 친왕파를 국왕이 처리해야 하는 상황은 막아야 하니까.

“나가 보게.”

“알겠습니다.”

의자들이 밀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 사람들은 회의장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서 있었고 국왕은 앉아서 그녀를 올려다봤다.

“시종장도 내보내시지요.”

“그러지.”

국왕이 눈짓하자 연배가 있어 보이는 하얀 머리의 시종장도 방을 나갔다

진짜로 국왕과 페루제 공작부인만 남게 되었다.

“이제 모두 나갔으니 말해 봐. 무례하게 허락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이유를 말이야.”

“저는 일개 영애에서 시작해서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국왕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적어도 하나는 알아야 했다.

지금은 비아냥거리거나 말을 끊어야 할 때가 아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

“아무것도 없는 나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손을 피로 더럽혀 줄 인물이요.”

“그 인물이 없었다면 자네와 내가 여기까지 만날 일도 없었겠군.”

국왕은 그녀의 논리대로 말한 것이었다.

웃기지 않는가.

그 한 사람 덕분에 라스타 왕국에서 경국부인이라는 칭호를 얻고 정국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자가 되었다니 말이다.

그것만인가?

아니다.

그녀는 국왕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귀족으로 나름의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

위험한 인물이었다.

“네. 그가 나를 위해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핫!”

국왕은 그녀의 말처럼 그 한 사람이 지금의 그녀를 만들었다면 역사에 둘도 없는 대죄인이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저 여자 한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눈치를 보고 두려워하느냐 말이다.

국왕도 두려웠다.

그것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잔인함, 차가운 면모 등 때문이 아니었다.

저 여자가 얼마나 앞을 보고 사는지, 얼마나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였다.

“모두가 나에게 무언가를 받기 위해서 움직일 때에 오직 나만을 위해서 움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때였다.

국왕은 눈을 비볐다.

그가 자신이 볼 것이라고도 생각도, 예상도 하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한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까의 추함은 사라졌고 담담함만 남았다.

그 담담함이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슬픔을 느끼게 해줬다.

“지금의 나를 만든 그 사람이 죽었습니다.”

모두가 그녀가 주는 부, 권력, 명예를 쫒아서 그녀의 사람이 되었다.

오직 빅토르뿐이었다.

‘페루제 루비로즈’라는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불구덩이로 뛰어들어줄 사람은 말이다.

그녀가 거리를 둬도, 그녀가 무심해도 그녀의 뒤에서 묵묵히 곁을 지키던 사람은 이제 없었다.

“유일한 사람을 잃은 내 심정을 아십니까? 내장이 끊어지는 그 마음을 아십니까?”

더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고 만날 수 없었으며 그의 서신을 읽을 수 없었다.

차가운 시신이 되어 버린 빅토르를 보고 그녀는 그의 죽음을 인정해야 했다.

“더 가슴이 아팠던 것은 그가 죽었음에도 그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죽음을 보고 인정했음에도 그녀는 그가 자신을 사랑했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이 미안하고 또 미안하여 그의 죽음이 더 슬프고 괴로웠다.

“저는 이제 귀족의 우아함 따위는 집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짐이었다.

하늘로 간 빅토르를 향한 다짐이었다.

“이제부터는 비열할 것이고 추잡하게 굴 것입니다.”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기도 했다.

“선을 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며 더는 명분이란 틀에 갇히지 않을 것입니다.”

“선전포고라도 하는 것인가? 반역으로 간주해도 되겠지?”

“반역이라니요? 제가 왕좌를 원했다면 라스타 왕국의 왕좌부터 차지하고 알펜 왕국을 공격하여 폐하의 목을 베었겠지요.”

그녀는 빅토르를 위한 복수를 해줘야 마땅했다.

평생을 그녀를 위해서 살았던 기사를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애도였다.

설령 빅토르가 원치 않더라도 해도 그녀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아니, 용서하기 싫었다.

자신이 느낀 고통을 그들도 느껴야 했다.

후회해야 했다.

“그러나 원하신다면 다른 귀족들이 반역을 일으키도록 할 명분은 만들 수 있습니다.”

그녀가 국왕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그것은 엄청나게 구겨진 종이였다.

그 종이는 빅토르를 죽인 배후의 정체가 담긴 인장이 찍혀 있었다.

에레보스가 준비한 거짓증거였다.

국왕은 그것을 펼치고 자신의 손이 떨리는 것은 간신히 참았다.

“이 정체 모를 인장이 왕실에서 비밀 임무를 내릴 때 쓰는 인장이라더군요. 맞나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이미 상대는 확신했다.

그렇다고 해서 인정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자칫 이 인장으로 왕실이 비밀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친왕파 귀족들도 불만을 토로하며 이탈할 수 있었다.

인장의 정체가 알려지면 반왕파, 중립파의 연합이 결성되어서 그 비밀조직에 관해 캐려고 할 수 있다.

“하긴 사실이라고 말한다면 국왕이 아니라 머저리겠죠. 이해합니다.”

“나는 모르는 일이야.”

“그렇다고 치지요. 그건 그렇고.”

그 비밀조직이 한 일에는 귀족들이 들고 일어날 일들도 있었기에 절대로 알려져서는 아니 되었다.

가령 은밀하게 친왕파에 가까운 귀족이 가주가 되도록 가문 내의 일에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든가 하는 일이었다.

혹은 반왕파 가문의 분열을 조장했던 일도 있었다.

“아까 친왕파 귀족들을 여기서 나가게 하길 잘했지요?”

“…….”

솔직히 여기에 친왕파 귀족들이 있었고 이 인장에 관해 알게 되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을 처리해야 했을 것이다.

이 인장에 관해 알고 있는 극소수를 제외하고 말이다.

국왕은 그녀의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을 부정했다가 공론화하고 정식 조사를 요청하기라도 하면 큰일이고 인정하여 대놓고 약점을 잡히는 것도 큰일이었으니까.

“빅토르의 죽음을 조사하다가 찾게 된 증거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것으로 폐하를 공격할 생각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에요.”

“그러면 무엇 때문에 온 것이지?”

“앞으로 흥미진진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고죠.”

선전포고 아닌 선전포고였다.

그녀는 왕에게 준 서신 따위로 복수할 생각이 없었다.

기껏 해야 친왕파의 세력이 반으로 줄어드는 것?

반왕파, 중립파, 그녀의 파벌이 친왕파를 두들기는 것?

그것은 복수 축에도 들지 못했다.

진정한 복수는 상대가 가장 비참하고 굴욕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다시 우아한 페루제 공작부인으로 돌아왔다.

아름답게 미소 짓고 인사한 그녀는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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