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에레보스의 질투 (2)
란델리노가 어둠의 정령왕을 보면서 크게 웃었다.
“웃기지 않습니까? 정령왕이 백 년도 못 사는 인간 하나를 질투하다니요!”
어둠의 정령왕은 마음만 먹으면 대륙 전체를 피로 물들일 수 있는 존재다.
그동안 어둠의 정령왕과 계약한 인간들은 모두 인류에게 패배했다.
신전이나 역사서에 따르면 신관과 영웅들의 노력으로 승리를 얻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지만 란델리노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어둠의 정령왕과 계약한 인간들은 정령왕의 끝없는 힘을 신체와 마나를 담은 그릇이 감당하지 못하고 자멸한 것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신관과 영웅들이 그 힘을 막 끌어다가 쓰게 했으니 역사가 아예 틀렸다고 할 수 없겠다.
다르게 말하면 계약자가 어둠의 정령왕이 가진 힘을 감당할 수 있는 마나를 가졌다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대륙을 멸망까지 가게 할 존재가요!”
“너…….”
에레보스는 눈이 크게 떠졌다.
설마 란델리노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인간의 일은 인간이 해야 한다.
페루제 루비로즈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정령에게 떠넘기지 않았다.
그녀는 인간이 가진 가치를 믿었기 때문이다.
에레보스가 그리 말하면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볼 것이지만 말이다.
“왜 그리 질투를 하셨습니까?”
어머니가 어둠의 정령사들을 악마의 추종자 혹은 이단으로 몰아 죽이는 것을 금지했다.
성모라는 위치에서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 일로 그녀를 신전 내 성모 자리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말이 많았다고 들었다.
힘으로 그런 세력을 찍어 눌러서 금방 잠잠해졌다.
“어머니가 당신보다 빅토르에게 의지를 해서요?”
“…….”
“당연하지요. 당신은 정령이고 빅토르는 사람인데요.”
에레보스는 조롱이 담긴 란델리노의 말투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와 그는 정령과 계약자이자 친구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솔직한 듯하면서도 어떤 선을 넘지 않았다.
“당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당신은 빅토르보다 우선시될 수 없습니다.”
“…….”
“아무것도 없던 어린 소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손을 피로 물들인 사람은 오직 빅토르뿐이니까요!”
에레보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변명을 내뱉었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그것밖에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인간이었고 그녀를 알았다면 나도 그렇게 해줬을 거야.”
“당신이요? 푸핫!”
란델리노가 크게 웃었다.
웃긴 희극을 본 듯한 반응이었다.
“빅토르처럼 주기만 할 수 있습니까? 그는 오직 어머니에게 주기만 하는 사람입니다. 어머니에게 어떤 애정도, 어떤 믿음도 요구하지 않고 오직 어머니를 위해 사는 존재란 말입니다. 그리 하실 수 있습니까? 위대한 정령왕이시여?”
그는 에레보스에게 비아냥거렸다.
에레보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에게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그녀가 의지하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으면 했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만은 속마음을 터놓기를 원했다.
그는 그녀에게 관심, 애정, 믿음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네 어머니는…….”
에레보스가 말을 흩트렸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어둠의 정령왕이 하찮은 인간 하나를 질투하고 있음이 까발려졌다.
“페루제는 너의 말에 흔들리고 상처받았어.”
“아…….”
란델리노는 어머니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제가 어머니의 거울이라고 했던 거요?”
“그래.”
“자신의 추함을 인정하기 싫으셨겠지요.”
그는 담담하게 인정했다.
어머니는 자신이 추할 수 있다는 가정 자체를 하지 않고 살아왔었으니까.
그의 말이 충격이기는 했을 것이다.
충격이 가시고 짜증과 분노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수치스러움도.
추하다는 것은 우아하지 않다는 것.
그것은 귀족답지 않다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생각하다가 란델리노가 번뜩 눈이 날카로워졌다.
“어머니가 이혼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나도 알아.”
“그쵸? 빅토르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가 그런 생각을 품지 않으리라는 것도 아시겠군요.”
으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난 듯했다.
빅토르가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이혼하고 라스타 왕국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꺼내던 밤, 에레보스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계약자가 그리 흔들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흔들려도 금방 정신을 차리고 앞을 나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누군가에게 안겨서 위로를 받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만약 그럴 일이 있다면 그녀를 위로할 존재는 에레보스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유일한 친구는 자신이었기에 할 수 있는 자신감이다.
그 믿음은 빅토르로 인해서 철저하게 깨져 버렸다.
에레보스는 깨달았다.
자신은 페루제의 친구는 될 수 있어도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될 수 없었다.
빅토르가 있는 한에서 말이다.
“그래. 나는 페루제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게 할 수 없어.”
“지금은 그렇죠. 그렇지만 당신도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란델리노가 자신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은 바보라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에레보스는 자꾸 그의 말에 솔깃하게 되었다.
그의 정신을 빨아들이는 기분이 들었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라면 치워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빅토르를 아버지처럼 여기고 스승으로 존경했다.
란델리노가 빅토르를 대하는 태도로 그 마음을 봤던 에레보스가 물었다.
그 눈빛에서 느껴지던 호감은 거짓이 아니었다.
“너에게는 아버지 같은 스승이 아닌가? 이혼하면 너를 아들로 받아줄 인간이던데.”
“저는 저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
“저는 어머니의 인정을 받는 유일무이한 후계자가 되고 싶은 것이지요.”
란델리노는 솔직했다.
그는 자신이 어머니의 아들로 어머니의 모든 것을 이어받기를 원했다.
“알량한 호의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을 바에 그 알량한 마음을 버리는 것이 낫지요.”
찰나의 시간 동안에 에레보스는 결정을 내렸다.
“좋아. 힘을 보태지.”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대신에 이것에 서명해라.”
허공에 글자가 나타났다.
[어둠의 정령왕 에레보스의 힘을 빌리는 대신 란델리노는 다음의 조건을 지켜야 한다.
1. 그 누구에게도 어둠의 정령왕이 이 일에 관여했음을 발설하지 않는다.
2. 그 누구에게도 페루제 루비로즈가 어둠의 정령왕과 계약했음을 발설하지 않는다.
3. 그 누구에게도 어둠의 정령왕이 하찮은 인간을 질투했음을 발설하지 않는다.
4. 다시는 그 신물로 어둠의 정령왕을 억지로 소환하지 않는다.
5. 두 번 다시는 란델리노의 목적을 위해서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좋습니다.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까요”
빅토르가 죽으면 어머니가 달라질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에레보스와 손을 잡을 일도 없었다.
물론 어둠의 정령왕과 힘을 합칠 기회를 잃는 것은 아쉽기는 했어도 말이다.
처음에 에레보스는 알량한 꺼림직함에 란델리노의 손을 잡지 않으려고 했다.
그 알량한 꺼림직함을 인간들은 죄책감이라고 했다.
그것은 빅토르를 향한 죄책감이 아니라 페루제를 향한 최책감이었다.
자신의 계약자가 얼마나 심적으로 빅토르를 의지하는지 알기에 드는 죄책감이었다.
에레보스는 자신이 느낀 감정이 죄책감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기회가 왔는데 거부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무엇을 돕기를 바라지?”
“직접 죽여 달라거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가 양쪽 어깨를 작게 올렸다가 내렸다.
그리고는 그가 손가락 2개로 V자로 만들었다.
“딱 두 가지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 두 가지가 뭐지?”
“하나는 빅토르의 행방을 숨기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예를 들면?”
“저희 쪽에서 최대한 위장을 하려고 해도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예상치 못한 목격자가 나올 수 있죠.”
“사람들이 그를 인지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그냥 나에게 다하라고 하지?”
에레보스가 비아냥거렸다.
“어둠의 정령왕이시지 않습니까? 어둠 속에서는 가능하신 것을 압니다.”
“밤에도 빛이 있다. 빠르게 처리해라. 다음은?”
“빅토르가 처리되면 어머니는 당신에게 그 배후나 범인을 찾으라고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명령을 내린 적이 없어.”
“빅토르니까요.”
에레보스가 눈을 찌푸렸다.
너 따위와 빅토르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뉘앙스였으니까.
자신의 계약자는 우아하고 품위가 넘치는데 아들이라는 놈은 이런 쓰레기였다.
자식 교육을 참 잘못시켰다는 생각했다.
완벽한 자신의 계약자에게 느낀 의외의 허당미였다.
“좋아. 그렇다고 치고. 뭘 하면 되지?”
“왕실을 배후로 지정할 만한 것들을 찾아와 주십시오. 아! 그의 시신 곁에서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시면 더 감사하고요.”
“알펜 왕실의 음모를 밝히는 과정에서 죽은 것처럼 꾸미려는 것인가?”
여기서 의아한 점이 있을 것이다.
과연 정령은 계약자에게 거짓말할 수 있는가?
답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성이 낮은 하급 정령은 불가능하지만 어느 정도 지성이 있는 중급 이상의 정령들은 가능하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정령들이 순수하고 거짓을 모른다고 생각할까?
일단 정령들이 자기 목적에 맞게 거짓말을 할 상황이 없었기 때문이 첫 번째이고 거짓을 꾸미기에 계약자가 가진 마나가 미약하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이에 반해 에레보스는 상대를 기만해야 할 목적이 분명했고, 계약자의 마나는 그것을 꾸밀 정도로 충분했던 것이다.
“빅토르의 죽음에 이성을 잃으실 거예요. 누명임은 고려조차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럴싸한 정황만 있다면요.”
에레보스는 란델리노가 <검은 뱀>의 누군가를 포섭했음을 눈치 챘다.
알펜 왕실에서 계략을 꾸민 정황을 발견하고 추적하는 중이었다는 비밀문서를 만들어 줄만 인물이다.
그 동조자는 진위 확인 후에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보고하려고 했다고 말을 꾸며줄 수 있었다.
“너는 참으로 수완이 좋고.”
<검은 뱀> 내에서 빅토르의 인망은 엄청났다.
<검은 뱀>에서 빅토르를 진심으로 따르지 않는 기사들은 없었으니까.
그런 빅토르를 배신하게 만든 것은 나름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단기간에 이뤄질 일이 아니었다.
오래 전부터 준비했을 것이 뻔했다.
“무서운 놈이구나.”
“어머니의 아들답다고 해주시지요.”
그렇게 <검은 뱀> 내부의 동조자, 어둠의 정령왕 에레보스, 비밀조직 아나스타시스와 함께 란델리노는 빅토르를 죽였다.
* * *
죽은 빅토르가 발견된 장소 근처에 시신들이 발견되었다.
암살자로 추정되는 인물들이었다.
빅토르가 죽을 당시에 쥐고 있던 서신이 하나 있었다.
그 서신에는 인장이 찍혀 있었다.
어떤 가문의 인장인 것은 분명한데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 정체를 에레보스가 알려 줬다.
자기가 둔 거짓 증거들이었으니 알려 주기도 쉬웠다.
그녀는 어느 깊은 숲속에 서 있었다.
빅토르가 쓰러져서 죽어갔던 자리였다.
그녀가 혼잣말했다.
비밀임무로 빅토르 혼자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서 그가 홀로 있었던 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홀로 싸우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추웠을까?”
“밤새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칼에 크게 찔려서 얼마나 아팠을까?”
차가운 눈빛으로 그 자리를 한참 노려봤다.
에레보스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한 말이 진짜야?”
“그래. 나도 놀랐어.”
페루제 공작부인의 손이 떨려왔다.
분노로 인한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구겨 버렸다.
빅토르가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증거였다.
“정말로?”
“내가 확인한 바로는 그래.”
“감히 이딴 짓을 하고 무사하기를 바라?!”
그녀는 몸을 돌려서 수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