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193화 (193/221)

193화 에레보스의 질투 (1)

에레보스의 무섭고 날카롭던 기운이 서서히 잠들었다.

억지로 살기를 조절한 것인지 흥분이 가라앉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는 란델리노를 향해서 비웃음을 날렸다.

“그게 무슨 헛소리지?”

“저는 진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란델리노가 여유롭게 말했다.

방금 전에 자신을 죽이기 직전까지 몰아갔던 정령을 상대로 말이다.

마치 에레보스에게 목이 졸려본 적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그 당당함을 넘어서 뻔뻔하기까지 한 란델리노에게 에레보스는 분노를 넘어서 황당함을 느끼게 되었다.

“세상의 어떤 정령이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 따위에게 질투를 느낀단 말이냐?”

“글쎄요…….”

란델리노가 장난끼가 담긴 눈빛으로 웃었다.

“빅토르보다 어머니와 더 가까울 수 없어서?”

“너…….”

란델리노는 꿈에서 봤던 이야기를 하나 기억해 냈다.

그것은 참으로 슬픈 빅토르의 죽음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 징조를 아주 서서히 빅토르를 잠식해 갔다.

* * *

“콜록, 콜록.”

“빅토르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콜록, 괜찮다.”

“요즘 너무 무리하셔서 그러신가 봅니다.”

꿈속의 란델리노는 <다섯 뱀>의 총단장인 로빈을 스승으로 삼았었다.

주기적으로 볼 명분도 없었고 그와 마주칠 기회도 없었다.

<검은 뱀>은 첩보 업무와 정보 수집이 우선시되는 기사단이었으니까.

다른 기사단보다 외부 업무가 월등히 많았다.

그래서 가끔씩 훈련장에서 인사하고 짧은 대화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가끔 인사하고 조금 대화했을 뿐이지만 빅토르는 좋은 사람이었다.

“나만 그런가?”

“무엇이 말입니까?”

“로빈 스승님, 빅토르 단장 말입니다.”

“빅토르 단장이요?”

“볼 때마다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요.”

“의사에게 진료를 받았으나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언제부터인가 걱정이 되었다.

뭔가 얼굴색이라든가 분위기라든가 차분하다가 못해서 시들어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로빈 단장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했다.

생각해 보면 란델리노가 빅토르와 친분을 쌓는 것은 경계했던 것 같다.

정보 쪽을 다루는 <검은 뱀>이 란델리노를 지지하게 되면 골치가 아팠다.

그날은 갑작스럽게 빅토르와 란델리노에게 찾아왔다.

검술 훈련을 위해서 훈련장에 왔다.

“빅토르님! 정신을 차리십시오!”

“어서 의원을 모셔 와라!”

“아니, 얼른 업히게 해! 의원이 오는 것보다 그게 더 빨라!”

쓰러진 빅토르와 그를 엎고 저택으로 달리는 기사와 곁을 함께하는 기사들.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평소의 어머니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일들이었다.

시종이나 시녀 그리고 저 말똥을 치우는 마구간지기까지 수군거렸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모이면 이 기행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마구간지기들은 말똥을 치우고는 밖에 널브러진 상자 위에 앉았다.

그리고는 옹기종기 이야기를 했다.

“공작부인께서 공작가문의 주치의 실력으로는 고칠 수 없어서 라스타 왕국의 유명한 의원들을 모두 불렀다고 하더라.”

“아니, 평소에 거들떠도 보지 않다가 왜 그런데?”

“윗분들이 두려움에 떨잖아.”

“잉?”

“잉? 아니 벨로나 공작가문에 있으면서 이런 쉬운 일도 생각을 못해?”

그들은 벨로나 공작가문의 고용인들이다.

그 페루제 공작부인을 안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인물들인 것이다.

마구간지기조차 주인의 심기를 읽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만큼 온갖 명분에 숙청을 당한 인물들의 말로를 지켜봤기 때문일 수 있다.

한낱 마구간지기들은 관련이 없겠지만 무서운 것은 무서운 것이었다.

“아끼지도 않던 그를 왜 이제 와서 아끼겠어? 내가 아끼는 놈을 건들었으니 대가를 치르게 만들겠다는 거잖아!”

“헉! 진짜 그러네!”

누구도 페루제 공작부인이 빅토르를 진심으로 위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란델리노는 달랐다.

그는 어머니의 서재 앞에 섰다.

문을 두드렸다.

“어머니, 저 란델리노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오거라.”

그는 어머니와 마실 차를 직접 가지고 왔다.

그녀가 읽던 책을 덮고 란델리노를 올려다봤다.

“그래, 이 늦은 시각에 무슨 일이냐?”

“근래에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으시고 서재에만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탈이 나실까 걱정이에요.”

“내가 아들을 참 잘 길렀지. 남편이라는 작자는 내가 언제 죽나 하고 기다리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그녀가 농담인 듯 진담인 듯한 말을 하자 그가 웃었다.

“아버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마십시오. 원래 그런 분이었으니까.”

“뭐, 모르고 결혼한 것도 아니기는 하니까.”

좋은 분위기였다.

그 여세를 몰아서 란델리노는 자연스럽게 찻잔과 차를 세팅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덮어 버린 책의 제목을 확인했다.

[보랏빛 죽음 : 증세와 완화법]

란델리노가 잔에 차를 따르며 물었다.

“의학에도 관심이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백성들의 건강에 관심을 가지는 일은 중요하지.”

“일반적인 병명도 아니고 백성들을 위협할 전염병도 아닌 것 같아서요.”

그녀가 찻잔에 손을 대기 전에 멈췄다.

“란델리노.”

“네, 어머니.”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도 불편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우아한 말투임에도 짜증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어머니만이 할 수 있는 어머니 특유의 말투였다.

“선을 넘지 말거라.”

“죄송합니다.”

“그래, 알면 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어머니는 본인의 요양을 핑계로 메디치 백작령 근처에 있는 별장에 가 버렸다.

빅토르를 데리고 말이다.

몇몇 사람들은 대놓고 남편도 아닌 남자를 자신의 별장에 데려간다고 손가락질했다.

빅토르와 어머니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확신하는 말을 전했다.

얼마 뒤에 그들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것은 모두가 뒤에서 쉬쉬하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벨로나 공작령에 발걸음을 끊은 지 몇 달이 되자 조바심이 났다.

이러다가 어머니가 완전히 자신을 놓아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망상까지 들 정도였다.

요양을 간 지 1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이 루비로즈의 후계자가 되기 원해서 페루제 공작부인이 그를 버리려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떠돌았다.

자신의 사촌을 총애하는 어머니를 알기에 그 소문이 더 그럴싸하게 들렸다.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너무 불안했으니까.

“어머니!”

“쉿!”

그곳에서 봤던 모습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한 번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얼굴을 제외하고 피부가 보랏빛으로 물든 빅토르를 어머니가 직접 병간호하는 중이었다.

“계속 신음하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아, 알겠습니다.”

어머니는 방을 나갔고 그는 멍한 상태로 그녀를 따라갔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정신이 따라가지 못했다.

란델리노가 별장에 오고 며칠 후 빅토르는 숨을 거뒀다.

그의 장례식은 조용하고 조촐하게 끝났다.

평소 빅토르가 번잡한 것을 싫어했다는 이유였다.

“누가 죽었다고 믿기에는 너무 날씨가 좋군.”

해는 화창하고 구름은 적당히 강렬한 햇빛을 막아줬다.

장례식하기에는 야속하게 느껴지는 날씨였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기에는 너무 따스하고 좋았다.

직접 병간호까지 한 상대가 죽었음에도 어머니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장례식의 참석자 반응은 두 가지였다.

“역시 위하는 척만 한 거야.”

“그렇죠.”

“나는 이미 알고 있었어. 첫 번째 기사라느니 하면서 치켜세워 주기만 하고 제대로 된 대우는 해주지 않았잖아.”

장례식에 참석이 허락된 귀족 몇이 작게 속닥거렸다.

그들은 빅토르과 그다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과 연이 있는 이들이었다.

“빅토르님! 왜 이렇게 허무하게 가시나요?”

“아직도 돌아가셨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제발 장난이라고 꿈이라고 해주세요.”

그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은 전부 진심으로 슬퍼했다.

눈물과 콧물로 얼굴이 더러워졌음에도 멈추질 못했다.

빅토르가 자신의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들인지 보여주는 반응이었다.

“란델리노님.”

“무슨 일이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란델리노의 부하가 조용히 그의 귓가에 다가와 말했다.

“무엇인데?”

“그것이…….”

“알았어. 곧 장례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빠질 것이니 그때 이야기하지.”

“알겠습니다.”

그에게 다가온 부하는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면 입을 잘 열지 않았다.

오죽하면 사람인 척하는 인형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그와 란델리노만 묘에 남았다.

그리 병간호를 해놓고 뒤도 돌지 않고 가 버리다니 역시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의 감정이 드러나는 것이 싫었나?

“말해라.”

“주군, 저는 정령사이지요.”

“그렇지.”

“정령사들은 본디 기민하게 정령의 기운을 느낄 줄 압니다.”

“그런데?”

정령사인 부하는 말을 제대로 꺼내기 머뭇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미친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괜한 말을 해서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만약을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그 빅토르 단장님의 시신에서 정령의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그 기운에는 정령의 감정도 드물지만 느껴지기도 합니다. 물론 그 감정이 강할 때의 경우입니다.”

“살해당했다고?”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계약한 타나토스와 같은 계열의 힘인 듯싶었습니다. 게다가 그 기운에 증오하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상급 어둠의 정령과 같은 계열이라니 무슨 소리지?”

“저도 이상하여 정령에게 물었습니다.”

“뭐라고 말했지?”

“답을 거부했습니다. 두려움에 떨었고요. 단지 ‘그분’께서 평소의 ‘그분’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상급 어둠의 정령이 두려움에 떠는 존재에다가 비슷한 힘을 쓴다? 게다가 ‘그분’이라고?”

부하의 정령은 빅토르를 죽인 정령이 누군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령의 말 한마디로 충분했다.

문제라면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둠의 정령왕이라고?”

“네. 믿어지지 않기는 합니다.”

“어둠의 정령왕이 세상에 나타나면 언. 제. 나 대륙에 피바람이 불었어.”

모든 역사서에 보면 ‘어둠의 정령왕’과 계약한 악인들은 수많은 생명을 학살하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아무리 과장이 되었음을 반영한다고 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할 만큼이었다.

“저도 그게 의문이었습니다. 그런 존재가 어째서 일개 인간을 증오하였는지 말입니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만들어서 죽였다고 봅니다.”

란델리노는 문득 어떤 것들이 거침없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거울을 보다 검게 물들은 손거울.

어머니가 계약한 ‘어둠의 정령’.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빅토르를 직접 병간호할 정도로 아꼈던 어머니.

그는 어떤 가설을 하나 세우게 되었다.

누구에게 말하면 개꿈이라도 꿨다고 말할 이야기였다.

어머니는 무려 ‘어둠의 정령왕’과 계약한 정령사이다.

성모인 어머니가 ‘어둠의 정령사’라니 지나가던 개도 비웃을 말이었다.

어머니와 ‘어둠의 정령왕’은 서로 친밀한 관계였다.

에클레시아 교단의 신실한 신자인 어머니가 어둠의 정령사였다는 것이나 그 정령과 좋은 유대감을 쌓았다는 것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어둠의 정령왕과 친하다고 할지라도 어머니와 빅토르 간의 유대감을 이길 수 없었다.

질투가 심해지면 증오가 되는 법이다.

‘어둠의 정령왕’은 빅토르를 질투하여 어머니 몰래 그를 죽였다?

“아무리 정령왕이라고 해도 정령사의 기운을 정령사 몰래 가져다 쓰는 것이 가능해?”

“어둠의 정령왕과 계약할 정도의 그릇입니다.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은 바다에서 물 한 컵 뜨는 수준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몰라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군.”

이것이 빅토르의 죽음에 관련된 꿈의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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