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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91화 (191/221)

191화 믿고 싶지 않은 일

말을 머뭇거리는 부단장들을 서늘하게 쳐다봤다.

살기까지 느껴지는 것이 보통 심기가 불편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빅, 빅토르님이…….”

“빅토르가 왜?”

부단장 중 하나가 눈을 질끈 감고는 말했다.

“돌아가셨습니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빅토르는 아침까지만 해도 이 저택에서 잘 있었다.

마차를 타고 가는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일부러 정문에서 기다렸던 그였다.

빅토르가 이혼에 관해 말을 꺼냈던 밤은 얼마 전에 불과했다.

믿기 어려운 소식이었다.

부정하고 거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부단장들의 표정이 진실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피살되었습니다.”

“어디냐?”

“…….”

“지금 어디에 있냐고…….”

그녀는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으며 입을 움직였다.

이곳에서 소리를 쳤다가는 모두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해 할 것이 뻔했다.

빅토르를 하찮은 것들이 흥밋거리로 만들 수 없었다.

그녀는 모두가 잠든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은밀히 저택을 빠져나갔다.

* * *

그들은 그녀를 수도 외곽의 으슥한 숲 속에 있는 별장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차갑게 식은 빅토르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언제나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짓던 빅토르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오면 기민하게 알아채는 그가 누워만 있었다.

“일어나.”

그녀가 부르면 언제라도, 어디서라도 오던 그가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라고!”

저택에서 참고 있던 절규가 입 밖으로 나왔다.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죽지 않는다며! 왜 이러고 있는 것이야!”

모두가 무언가를 받기 위해서 그녀의 명령을 따르며 그녀를 지켰다.

그런 ‘모두’에 빅토르는 제외였다.

그녀에게 무엇도 바라지 않던 사람.

그녀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것을 선택한 사람.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해 주려고 했던 사람.

오직 ‘그녀’만을 위한 사람이었다.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주기만 하던 사람 말이다.

“나를 위해 산다고 했잖아! 왜 이러고 있는 것이야!”

자신이 이렇게 소리를 치는데도 눈을 뜨지 않았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제야 실감이 났다.

그녀의 뺨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유일한 사람이 떠나고 말았다.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기운을 주던 사람을 말이다.

티는 내지 않았을지언정 소중했던 어린 시절의 벗을 잃었다.

“찾아라.”

“네.”

페루제 공작부인은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두 눈에 뚜렷하게 새겨진 광기는 그 아름다움을 소름 돋게 해줬다.

부단장들은 누구를 찾으라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대답했다.

빅토르 단장을 죽인 범인을 뜻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배후가 있다면 반드시 그 배후도 알아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사지가 잘려도 상관이 없어.”

“네.”

그녀에게 최악의 날이었다.

이제 그녀는 그 누구도 의지하고 믿을 수 없는 외톨이가 되었다.

* * *

별장을 나온 그녀는 숲을 걸었다.

진정이 좀 되었는지 표정은 아까보다 담담했다.

“타나토스.”

“왜 이렇게 얼굴이 상했어? 무슨 일이 있어?”

에레보스(어둠의 정령왕)의 힘으로 인해 <검은 뱀> 기사들은 그녀가 타나토스와 이야기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대화하는 내용도 듣지 못했다.

“어둠의 정령들을 통해서 빅토르를 죽인 놈을 찾아줘.”

“…….”

“사람의 일은 사람이 해야 한다며?”

에레보스의 물음에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계약 정령에게 하는 명령이야.”

“알았다.”

타나토스를 친구로 대했던 그녀가 처음으로 명령을 내렸다.

계약자의 사명을 다한다는 의미로 그는 그 명령을 이행해야 했다.

분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에레보스가 그 명령을 꺼려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 * *

빅토르의 죽음은 란델리노의 작품이었다.

란델리노를 아들처럼 여긴 빅토르였다.

그런 그를 란델리노가 죽인 것이다.

상대가 준 애정을 죽음으로 갚다니 배은망덕하기 그지없었다.

이 비극의 시작은 며칠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종으로 위장한 비밀 조직의 조직원이 그를 찾아왔다.

란델리노가 찾아오라고 요청한 물건을 가져온 것이다.

백합 무늬와 푸른 줄기 무늬가 어우러진 손거울이었다.

특이한 점이라고는 마나를 넣으면 푸른빛이 난다는 것뿐이었다.

“여기 원하시던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그래. 수고했네.”

저택 내에 있는 미로정원에 있던 그가 환하게 웃었다.

조직원은 저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손을 잡기로 한 마당에다가 상대는 원하는 것이 확실한 상황이었다.

의심하는 것은 시간낭비였다.

조직원은 의문을 뒤로 하고 얼른 미로 정원을 빠져나갔다.

그는 꿈에서 본 내용을 떠올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예지몽을 꾸지 않았다면 이 손거울의 진정한 능력을 몰랐겠지.’

란델리노가 여유롭게 웃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미로 정원을 둘러보고는 저택으로 향했다.

늦은 밤이 되었다.

그는 모두에게 잊혀진 신전으로 향했다.

과거 이단으로 배척당한 종파의 신전이었다.

그 신전은 수도 외관의 두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는 동굴에 있었다.

신전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허름했다.

천장에 훼손된 그림이 하나 있을 뿐이었으니까.

“여기라면 안심하고 불러올 수 있겠지.”

그가 손거울을 꺼냈다.

마석을 꺼내서 거울에 가져다댔다.

그리고는 누군가를 불렀다.

“그대는 어서 오라!”

다시 누군가를 불렀다.

“그대는 어서 나의 부름에 답하라!”

거울에서 푸른빛이 점점 강해졌다.

동굴 전체가 푸른빛으로 뒤덮였다.

“페루제 루비로즈의 정령이여! 신물의 뜻을 따르라!”

거울의 푸른빛이 점점 검붉어지더니 점점 어두워졌다.

란델리노가 들고 있던 마석의 빛조차 삼켜 버리는 어둠이었다.

곧 신성한 황금빛이 거울에서 뿜어져 나왔다가 하얀빛이 나왔다.

퇴폐미가 돋보이는 검은 머리카락의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소환이 되자마자 한 손으로 란델리노의 목을 졸랐다.

“으윽!”

“너, 정체가 뭐야?”

에레보스는 당혹스러웠다.

이 세상에서 빛의 정령왕 아후라마즈다와 어둠의 정령왕 에레보스보다 높은 존재는 없었다.

그들보다 높은 존재들은 분명히 존재했고 느껴졌으나 그들은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이 상상도 못하는 곳에서 바라만 보는 듯했다.

다시 말하면 공식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 중에 빛과 어둠의 정령왕을 힘으로 찍어 누를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에레보스는 그 자신감이 깨지고 말았다.

빛의 신으로 추앙받는 아후라 마즈다와 동급인 그가 억지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

그것은 절대로 깰 수 없는 절대 진리처럼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큭, 크크크크.”

“웃어?!”

목이 졸리는 와중에도 란델리노는 웃었다.

에레보스는 엄청난 살기를 꺼내며 분노했다.

“크큭, 이제 이해가 되어서요.”

꿈에서 봤던 어머니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꿈속에서 그는 청년이었다.

문무를 겸비한 잘난 어른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완벽한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성인인 란델리노는 여전히 지금의 자신과 같았다.

지금보다 몸은 커지고 지식은 넓었으며 능력은 뛰어났음에도 말이다.

어머니의 인정을 받기 위해 목숨을 걸듯이 살아가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 수많은 인재를 자신의 사람으로 뒀다.

그 인재에는 정령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젊은 날, 마법사들을 포섭한 어머니를 떠올리며 란델리노는 정령사의 양성에 힘썼다.

자신의 사촌이 마법사 세력을 흡수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에게 눈을 반짝이며 다가온 금발의 소년도 그것으로 삶이 바뀐 인재였다.

그에게 란델리노는 평생의 은인이었다.

평범한 빵가게 아들이 정령사가 된 것은 순전히 란델리노가 정령사의 자질을 확인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줬기 때문이었다.

“란델리노 백작님, 저를 정령사가 될 수 있도록 후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인재는 출신과 상관없이 마땅한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네, 압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지론인 것을요.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요.”

“모두가 그대처럼 생각해주면 참으로 고마울 것인데 말이야.”

“마법사들의 오만함에 질린 정령사들입니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그 정령사는 눈을 찌푸렸다.

마법사들이 사냥을 당하던 시대에도 정령사는 고귀한 존재로 대접을 받았다.

물론 어둠의 정령은 제외였다.

어둠의 정령은 악마의 사역마 취급이었으니까.

마법사도 마나를 이용하고 정령사도 마나를 이용한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마법사는 자신의 신체에 담긴 마나를 재구축한 써클 안의 마력을 이용한다는 것이고 정령사는 정령이 가진 마나의 힘을 쓴다는 것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으로 인해 마법사들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게 되었으나 정령사를 향한 열등감은 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마나’를 써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같은데 마법사들은 고문당하다가 사형 당했으니까.

“누구도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정령사가 마법사를 떠올리며 짜증스러운 눈빛을 비췄다.

마법사들이 이단 사냥의 희생양이 되기 전에 정령사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마나를 이용하는 존재로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공존했다.

신전이 마법사를 이단 취급하면서 그들의 사이는 멀어졌다.

“정령사들은 신전의 인정을 받았다며?”

“그래, 그들이 신전에 마법사도 인정하게 해 달라면 해 줄 거야.”

“그러겠지.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믿는 사이니까.”

정령사들은 마법사들을 신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지만 그 노력은 허사가 되었고 그들은 사형 당했다.

정령사의 눈빛에는 짜증뿐 아니라 경멸도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자신들을 외면했다고 하는데 억울하지요.”

정령사들은 마법사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가 이단 추종자로 낙인이 찍혀서 죽은 이들도 있었다.

마법사들은 정령사들의 희생을 외면했다.

신전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사냥 당했다는 이유만으로.

정령사들은 안위를 보장받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적으로 정령사들을 증오했다.

“마법사들이 억울한 것은 이해가 되어요. 쫓겨 다니던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제대로 내밀지 못했으니까요.”

“…….”

“그렇지만 그들도 알아야 해요. 이단을 사형을 당하면 정령사 하나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에요. 그의 배우자, 자식들, 이 연루가 된다고요”

시대가 마법사를 원하게 되자 정령사와 마법사의 위치는 달라졌다.

그들은 정령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은 라스타 왕국의 의회장에서 강하게 주장했다.

“환수 소환서로 동물형 정령을 일반인들도 소환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맞습니다. 예전처럼 정령사를 뭔가 대단한 존재로 떠받들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을 향한 각종 특혜를 없애야 합니다.”

“신전에서 그들을 신성한 존재로 생각하는데 그것부터 지워야 합니다.”

“정령사는 전문적인 이론으로 인재 양성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어찌 아카데미에서 그들을 위한 학과와 동아리를 만들어야 합니까?”

라스타 왕국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마법사 양성 정책으로 전문적인 마법사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마법사가 될 인재를 찾을 환경이 갖춰졌기에 가능했다.

그녀가 백성들이 사는 주요 구역에 아이들의 마법 재능을 확인할 수 있는 마법구를 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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