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운수 좋은 날
“누가 위에 있는지요.”
모두를 하찮게 여기는 눈빛이었다.
부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어 놓고 페루제 공작부인은 차를 마셨다.
차의 향을 눈을 감으며 음미했다.
짧은 시간이었다.
“풋!”
갑자기 웃더니 잔을 내려놓았다.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농담인데 뭘 이리 굳어요?”
“농담이요?!”
“네. 화합을 위해서 초대한 자리에서 설마 정말 네 윗사람이 누군지 밝히기라도 할까요?”
아까가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처럼 보이지 않던 말투와 눈빛, 표정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동부 부인들은 등에 식은땀이 나는 듯했다.
도저히, 어떻게 수습할 수 없는 압박감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손님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네요. 미안해요.”
그녀가 한쪽 눈으로 윙크하며 다정하게 말했다.
라보 공작부인은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티 파티의 분위기를 있는 대로 망쳐 놓은 당사자가 할 말은 아니었다.
그 당사자가 이 티 파티의 주최자인 것이 더 말이 되지 않았는데 실제로 벌어지고 말았다.
“다음에는 완벽하게 준비할 터이니 그때도 자리를 채워 주세요.”
“그따위로 굴어 놓고 다시 초대를 하겠다니 뻔뻔하네요.”
“당당함이라고 해두죠.”
* * *
라보 공작부인은 주도권을 제대로 쥐지 못하고 패잔병처럼 돌아가야 했다.
다른 동부 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성격 아닌 것은 알았지만 진짜 대단하네요.”
“그렇죠? 친교 목적이라고 해서 믿고 왔는데 아니었어요.”
동부에서 내로라하는 가문의 부인들이다.
이번 티 파티에 초대된 이들 중 다수가 이번 건국제의 참석자이기도 했다.
솔직히 초대를 받고 두렵기는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본인이 초대한 티 파티이고 목적도 ‘화합’이었다.
천하의 페루제 공작부인이라고 해도 자신들이 좀 뭐라고 한다고 해서 일이 터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었다.
북부 귀부인들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착각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화합을 위해 고개를 숙이느니 상대를 처리하고 다 빼앗는 쪽을 택할 사람이었다.
부인들은 자신들의 비판에 자식들이 팔려 나가게 된 여인을 떠올렸다.
괜한 죄책감이 들었다.
모든 것을 실행한 사람은 따로 있음에도 그 빌미는 그들이 주었으니까.
“트집을 잡으려고 한 우리도 잘못했지만 그것 때문에 사람 하나를 지옥으로 보내 버리는 페루제 공작부인도 참 너무해요.”
“누가 아니래요. 괜히 저희 마음만 찜찜하게 되었잖아요.”
“그게 노림수죠. 처음에 말조심하라고 경고한 것부터 보세요.”
“라보 공작부인은 절대로 못 이겨요.”
동부 부인들은 손사래를 치며 페루제 공작부인의 압승을 확신했다.
부인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카리스마부터 사람을 가지고 노는 수작질까지 상상을 초월했다.
이에 반해서 북부 부인들은 자신들이 승자인 것처럼 위풍당당했다.
“동부 부인들이 깐죽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속이 시원하네.”
“딱 정확한 표현이야. 깐죽!”
그녀들은 깔깔거렸다.
평소에 고아한 척하며 시비를 거는 동부 부인들이 거슬렸던 참이니까.
아무리 라보 공작부인의 입김이 있다는 것을 알아도 짜증이 났던 것이다.
이해해 주려고 하고 페루제 공작부인의 명령에 따라 참았기에 그 짜증은 더욱 컸었다.
오늘은 가슴 안에 담아 둔 것을 다 해소한 날이었다.
부인 중 하나가 다른 북부 부인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런데 다음에 티 파티를 할 때에 오늘처럼 동부 부인들이 트집을 잡을 수 있잖아.”
“그거 해결하기 쉬워.”
“쉽다고? 그게?”
“그래. 페루제 공작부인은 위계를 중시하는 분이시잖아.”
“아! 왕비마마나 대비마마를 화합의 중재자로 초대했다면 달라졌겠네!”
“그치. 왕비마마나 대비마마가 칭찬하는 티 파티를 품격 떨어지게 평가하는 부인들은 없을 것이니까.”
“왕비마마께서 페루제 공작부인께서 힘을 써주셔서 예전과 그 위상이 달라졌지.”
“맞아. 왕비마마가 페루제 공작부인만 찾는 것이 이해가 되고도 남아.”
질문하던 부인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쫓겨난 것’은 몰랐지?”
“왜냐고? 걔가 쫓겨나야 자기 사람을 꽂아 넣을 수 있잖아.”
“아! 그렇구나! 나는 아직 멀었네.”
장미회 부인들에게 자식이 팔려 나갈 운명이 처한 부인은 ‘쫓겨난 것’에 불과했다.
그들은 상대의 몰락을 즐거워하며 웃었다.
* * *
모두 자리를 떠난 성지에서 페루제 공작부인은 홀로 있었다.
서 있는 그녀는 신전을 조용히 바라봤다.
그녀의 곁에는 투구를 쓴 사내가 있었다.
투구 주제에 경건함이 느껴지는 고급스러움이 있었다.
투구에는 빛을 상징하는 그림과 검이 새겨져 있었다.
그 투구는 성전기사가 쓰는 것이었다.
성전기사는 신전 소속의 기사다.
단순히 신전을 수호하는 개념의 성기사와 달랐다.
성전이라는 표현에 맞게 ‘전쟁’에 특화된 기사들이었다.
신전에 소속이 된 사람을 잘 죽이는 기사인 것이다.
“어찌 이리 서 계십니까?”
“그대는 신전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언제라고 생각하지?”
성전기사의 질문에 답하지는 않고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물음에 그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신전은 신의 권위를 보여주는 곳입니다. 어찌 사사로운 감정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 그게 성전기사의 태도지.”
신을 누구보다 위에 두고 사는 존재.
세상의 절대자로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준다.
그런 신을 경배하는 신전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존귀한 것이다.
신과 관련된 것은 평가받는 존재가 아니며 오직 받들기만 해야 한다.
그것이 신전에 소속된 모든 신관이 받들어야 할 도리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그의 대답은 정석적이며 완벽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성전기사도 신관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런 논리라면 성모도 엄연히 신전의 소속이고 페루제 공작부인도 사사로운 마음을 가져서도 말해서도 아니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도 함부로 평하면 아니 되는 것인가?”
“부인께서는 성모인 동시에 백작이자 공작부인이십니다.”
성전기사는 페루제 공작부인이 성모인 것은 부정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녀가 신전 밖의 사람임도 인정했다.
그녀는 신전 소속이면서도 신전 밖의 사람이었다.
본디 사람이란 두 가지 직위나 위치가 놓인다면 더 높은 쪽을 선택하게 된다.
평민들이 신관이 됨으로 ‘평민’의 과거를 버리는 것은 평민의 위치보다 신관의 위치가 더 높기 때문이다.
귀족의 자제들이 신관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귀족의 자제’였던 과거를 버리는 것이다.
일개 귀족의 자제보다는 신관의 권위가 더 높았기 때문이다.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라면 다른 형제들은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한 예비에 불과했다.
“해가 질 때의 붉은 빛에 물든 신전은 참으로 아름답지.”
“그러십니까? 저는 매일 보던 풍경이라서 그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꺼져 가는 생명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는 느낌이거든.”
해가 질 때는 가장 해가 붉을 때였다.
마지막 남은 빛을 짜내듯이 혼신의 힘을 다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빛을 하얀 신전이 받아들이며 나타나는 절경은 가히 상상하지 못할 아름다움이다.
왜 아무도 그 아름다움을 경외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살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살아가고 싶었다.
말 그대로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언제나 마지막 힘을 다하듯이 살아가고 싶었다.
하나하나를 허투로 외면하지 않고 싶었다.
귀찮다고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가진 것을 하나 버린다는 것은 그 열정을 다하지 못했음이었다.
“그렇지만 하나 정도는 버려야겠지.”
“그 하나는 어떤 것입니까? 공작부인의 자리? 아니면 메디치 백작의 자리?”
“글쎄…….”
“어떤 결정을 하시든지 젊은 성전기사들은 다 성모님을 지지합니다.”
“고맙구나.”
“아닙니다. 죄인의 자식들을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신 은혜에 비하면 하찮습니다.”
그를 포함한 젊은 성전기사들은 대부분 페루제 공작부인이 만든 신전 아카데미 출신이었다.
라스타 왕국의 혁명에서 페루제 공작부인이 ‘살려 준 아이들’이었다.
그들에게 페루제 공작부인은 죽어 마땅한 ‘죄인의 아이들’을 거둬 준 은인이었다.
연차가 짧더라도 성전기사단은 신전에 영향력이 있는 세력이었다.
그런 성전기사단의 미래를 담당한 젊은 성전기사들을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너희 덕분에 결정을 더 쉽게 내릴 수 있게 되었어.”
“성모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니 저희가 오히려 감사할 따름입니다.”
혹시라도 페루제 공작부인이 이혼하려고 한다면 교황의 반대는 반드시 따라온다.
다수의 젊은 성전기사가 ‘성모의 이혼’을 지지한다면 아무리 교황이라고 해도 조금은 생각을 바꿔 보려고 할지 모른다.
성전기사가 퍼뜩 하나가 떠오른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설마 이런 방식으로 접선해 오실 줄 몰랐습니다.”
“신전에서 티 파티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의외로 어렵지 않은 일이지.”
“교황 폐하도 이렇게 저희가 만났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겠죠. 저는 기도 후 공터에서 검 연습을 하던 중이고요.”
성전기사는 공식적인 자신의 행보를 말했다.
아무도 없는 공터에서 검술을 연습하는 성전기사.
신관들이 보기에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곳 신전에는 신전기사를 위한 훈련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검술 연습으로 남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서 아무도 없는 곳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티 파티에서 부인이 쫓겨난 큰 사건이 있었고요.”
페루제 공작부인은 교황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신전의 성지에서 티 파티를 연 것이었다.
교황 폐하는 페루제 공작부인이라면 성지에서 티 파티를 열 여인이라고 여길 것이니까.
이혼 진행을 편히 하기 위해서는 교황 폐하가 둘의 접선을 몰라야 했다.
게다가 페루제 공작부인이 노을이 지는 신전 모습을 보는 일은 라스타 왕국에서도 벨로나 공작령에서도 자주 있었던 일이었다.
수상하게 여길 요소가 없었다.
성전기사의 말에 페루제 공작부인이 대답했다.
“그렇겠지. 게다가 지금은 내가 홀로 있고 싶다고 다 물러가게 했으니까.”
“말을 듣지 않은 신관이 여기에 있었다면 제가 기척을 느끼고 처리했을 것입니다.”
“귀찮은 일이 벌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들은 사람 목숨을 거두는 것에 관해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것은 수급 과정이 귀찮은 일에 지나지 않았다.
“앞으로 내 행보가 그쪽으로 가닥이 잡혔다고 싶으면 그때에 움직이게.”
“알겠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성지를 빠져나갔다.
원하는 것을 얻어낸 좋은 날이었다.
그래서 방심했다.
해가 진 어둠에서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저택에서 어떤 소식을 듣게 될지 몰랐다.
* * *
늦은 시각.
페루제 공작부인이 벨로나 공작가문의 저택에 돌아왔다.
드레스도 구매하고 장신구도 구매하느라 늦게 들어온 것이다.
“무슨 일이냐?”
“그, 그것이…….”
<검은 뱀> 기사단의 부단장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붉어져 있었다.
마치 눈물을 흘린 것처럼 말이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나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