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이해할 수 없는 조항의 의미
페루제 공작부인이 눈을 뜨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뭐라고요?”
“네. 그대들도 티파티니 연회를 준비한다고 하지만 솔직히 시녀장과 집사가 하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라보 공작부인이 소리치며 일어섰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삿대질까지 했다.
“연회의 컨셉, 장소, 식기 등, 정해야 할 것이 산더미라고요!”
그 말에 동부 귀부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단순히 연회 준비를 시녀장과 집사에게 맡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연회의 분위기, 목적, 시간 등, 정해야 할 것은 많았으니까.
그것을 어찌 시작하고 마무리하느냐에 따라 사교계에서의 위상이 달라졌다.
그녀는 따뜻한 찻잔의 두 손으로 감싸며 온기를 느꼈다.
“내가 일개 가문의 안주인에 불과했다면 그리했겠지요.”
“일, 일개 가문?! 지금 라보 공작가문을 일개 가문이라고 말한 건가요!”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수습하는 것이 정상적인 대응이었다.
그렇지만 페루제 공작부인은 다른 사람과 달랐다.
라보 공작가문을 일개 가문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내가 무엇을 하신다고 생각합니까?”
페루제 공작부인이 차를 한입 마시고는 라보공작 부인을 올려다봤다.
“나는 벨로나 공작가문의 안주인이죠.”
“그래요.”
“동시에 나는 메디치 백작가문의 가주이며 라스타 왕국에서는 경국부인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성모이기도 하고요.”
그녀가 하는 말의 요지는 간단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벨로나 공작가문의 내정만 보는 것이 아니다.
메디치 백작가문의 가주로 영지 업무와 내정을 동시에 아우르곤 했다.
또한 라스타 왕국에서는 경국부인이라는 칭호에 맞게 왕국의 대소사를 처리해야 했다.
성모로 신전과 꾸준히 소통하며 그들을 지원해야 했다.
일개 가문의 안주인들은 가문의 내정만 맡으면 되었지만 페루제 공작부인은 달랐다.
해야 할 일의 무게가 그들과 차원이 달랐다.
“라보 공작부인 말해 보세요. 내가 하는 책무와 그대들이 하는 책무의 무게가 같나요?”
“그것이 라보 공작가문을 ‘일개’개문으로 표현한 것을 정당화할 수 없어요.”
“성물의 선택을 받은 성모의 권위는 교황폐하와 같아요. 성모와 교황폐하는 신 아래에 가장 높은 존재라는 뜻이지요.”
성모와 교황이 신 아래에 가장 높은 존재인 이유는 하나다.
그들이 신의 대리자이기 때문이다.
신을 대리하는 존재로 모든 존재는 그 아래에 있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페루제 공작부인이 라보 공작가문을 ‘일개’ 가문으로 표현한 것은 과할지언정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신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가 교황과 성모였고 나머지 모두가 그들 아래에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대의 마음을 불쾌하게 만드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그리 무례하시니까 루비로즈 가문이 오만방자하여 예의를 모른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에요.”
라보 공작부인의 말에 페루제 공작부인의 표정이 굳었다.
방금 전에 죽은 시체처럼 서서히 생기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소름이 돋았다는 것이다.
그런 중에 우아하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지금 무슨 무례를 저지르시는 것입니까!”
“어서 페루제 공작부인께 사과하세요!”
“북부에는 북부만의 규칙이 있습니다. 초대받은 자로 응당 따라야지요!”
“공작부인께서 틀린 말씀을 하신 것이 없는데 이리 예의 없게 구십니까!”
북부 귀부인들이 다급하게 일어나서 손가락질하며 분노했다.
그것은 진짜로 분노했다기보다는 그들의 윗분께서 하실 분노가 두려워서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페루제 공작부인이 화가 어디까지 미칠지 공포에 질렸다.
장미회의 일원으로 페루제 공작부인을 곁에서 봤기에 더 무서운 것이다.
“초대해 놓고 손님을 위한 준비조차 하지 않다니요! 무례는 그쪽이 했지요.”
“성모라는 이름으로 저희를 찍어 누르려고 하다니요! 사교계 안에서도 도리가 있다는 것을 모르시나요!”
“정말 북부와 동부의 화합을 위한 자리는 맞는 건가요!”
동부 부인들도 질세라 소리쳤다.
라보 공작부인이 시작하기도 했고, 솔직히 기가 죽기는 했으나 동부의 자존심이 있지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북부에게 동부가 지는 꼴이었다.
동부와 북부를 대표하는 가문의 안주인들이 모인 자리였으니까.
“풋.”
페루제 공작부인이 짧은 웃음소리에 부인들의 외침은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동부 부인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봤다.
“그대들이 대단해서 여기에 있는 줄 아십니까? 아니지요.”
“무슨 망언이에요!”
“망언이 아니지요. 그대들이 뭐가 그리 대단합니까? 가문?”
그녀가 담담하지만 날카로운 말투였다.
라보 공작부인과 동부 부인들이 움찔했다.
“그대들의 가문이 아무리 대단한들 나의 가문보다 더 대단할까요?”
“여기 있는 부인들의 가문은 동부를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런 가문들을 무시하다니요!”
“사실을 말하는데 이리 격한 반응이라니 신기하군요.”
라보 공작부인이 분노를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그런데도 페루제 공작부인은 도리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이 바라봤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문제는 가문 차원에서 정식으로 항의하겠어요!”
라보 공작부인의 경고이자 예고에 동부 부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뿐 아니라 가문까지 싸잡아서 모욕을 하는데 가만히 있는 것은 아둔한 짓이었다.
“그대들의 가문이 아무리 위세가 있다고 한들 결국 동부에 한에서 그런 것임을 잘 압니다.”
“뭐라고요!”
라보 공작부인은 말을 다 하지도 못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파격적인 발언을 했으니까.
“무엇보다 모두가 왕실 아래에 있지요.”
“헉!”
모든 부인들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차마 내뱉지 못했다.
그만큼 놀라고 기겁하게 하는 말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지금 반역에 준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이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이다.
“루비로즈 가문은 라스타 왕국에서 왕실과 격을 나란히 하는 유일무이한 가문이에요. 그대들의 가문 중 그런 가문이 있나요?”
“…….”
“헬리오 대공조차 루비로즈 가문은 왕실에 준하는 대우를 해줍니다. 그대들의 가문 중에 그런 대우를 받는 가문이 있나요?”
“…….”
“그대들의 가문 중 루비로즈 가문처럼 30만 대군을 운용할 수 있는 가문이 있나요?”
“…….”
“나의 가문보다 다들 못하면서 어찌 그리도 뻔뻔하신가요?”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이곳에 난다 긴다 하는 가문의 안주인들이 모여 있었음에도 조용했다.
그만큼 루비로즈 가문의 영향력은, 페루제 공작부인이 만든 루비로즈 가문은 대단한 것이었다.
라보 공작부인은 손을 떨었다.
이대로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조롱당하는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한방 먹여주고 싶었다.
“그대는 벨로나 공작가문의 안주인으로 여기에 있어요. 어찌 루비로즈 가문을 언급하는 것이지요.”
“라스타 왕국과 알펜 왕국이 교류를 다시 시작하기 전에 협정을 맺었지요. 메디치 백작에 한하여 특례가 있었어요. 무엇인지 아십니까?”
“…….”
라보 공작부인이 그런 정치적인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것은 남자들의 영역이었으니까.
라보 공작이 그런 것을 말해 줄 위인도 아니었고 말이다.
“아는 분들이 없으신 모양이니 내가 설명하지요. 잘 들으세요.”
“…….”
“메디치 백작은 혼인한 가문의 안주인인 동시에 메디치 가문의 모든 권한을 가진 가주이다. 또한 메디치 백작 아래에 있는 가문에 관한 모든 권한과 권리를 알펜 왕국에서는 인정한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알펜 왕국은 여성 백작이 없었다.
그래서 메디치 백작은 라스타 왕국과 알펜 왕국 간의 조약을 통해 탄생한 첫 여성 백작이었다.
당시에 알펜 왕국의 귀족들은 이 문구의 영향력을 간과했다.
여인이 정치와 영지 운영을 제대로 할 리가 없으며 실질적인 주인이 따로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 실질적인 여인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알펜 왕국의 사람으로 채울 생각을 했다.
그러나 상대가 라스타 왕국의 페루제 루비로즈임이 알려지자 이 조항이 독이 되었다.
“그건 알펜 왕국에서 나의 가문을 루비로즈 백작 가문이라고 불러도, 메디치 백작 가문이라고 불러도 괜찮다는 말이에요. 왕국 간의 조약을 그대 따위가 뭐라고 부정하나요?”
이 조항으로 인해 페루제 공작부인은 메디치 백작으로 모든 권한을 자유자재로 행사하면서도, 벨로나 공작부인으로 벨로나 공작가문의 내정을 좌지우지했다.
내정을 장악하면서 벨로나 공작가문의 내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혼인하면 메디치 가문의 가주 자리와 벨로나 공작가문의 안주인 자리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아무래도 메디치 백작자리를 선택하고 혼인을 포기했을 확률이 높았다.
물론 페루제 공작부인이 그것을 허락할 리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그 독소 조항은 사교계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알펜 왕실에서 ‘메디치 백작 아래에 있는 가문에 관한 모든 권한과 권리를 인정한다’라고 했으니까.
그것은 그녀가 벨로나 공작부인이라고 하더라도 메디치 가문과 루비로즈 가문을 자신의 가문으로 언급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라보 공작부인, 설마 왕국 간의 조약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시지요?”
“나는 그런 내용이 있었는지 몰랐어요. 미안합니다.”
“우리 정도 위치에 있으면 무지도 죄가 되지요.”
라보 공작부인의 얼굴이 불타는 것처럼 붉어졌다.
솔직히 그녀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사과하기 싫었다.
사과해야 할 상대가 페루제 공작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왕국 간의, 왕실 간의 조약을 부정하는 것이었으니까.
페루제 공작부인이 초대한 동부 부인들과 라보 공작부인을 쳐다봤다.
눈빛에는 그들을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는지 느끼게 해줬다.
“아직도 내가 왜 이 자리를 마련했는지 모르십니까? 라보 공작부인.”
“그게 무슨 헛소리죠?!”
“솔직히 내 성격을 알지 않나요? 내가 누구랑 화합하는 성격이 아닌 것을요.”
라보 공작부인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해도 페루제 공작부인은 누군가와 화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화합의 의미를 아는 사람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대놓고 화합이 목적이 아니라고 말할 줄이야!
라보 공작부인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얼굴은 울그락불그락 말이 아니었다.
“하! 화합이 아니면 선전포고라도 하려고 했다는 말인가요?!”
“그냥 그대들이 알았으면 했거든요.”
페루제 공작부인은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표정을 보면 정말로 아무렇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백설 공주와 같은 하얀 피부로 우아하게 있는 페루제 공작부인.
불타는 감자처럼 얼굴색이 변화무쌍한 라보 공작부인.
라보 공작부인과 극렬한 대비를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