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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88화 (188/221)

188화 쫓겨난 여인

페루제 공작부인이 민망하다는 듯이 웃었다.

“손님들 모셔 놓고 이런 추태가 벌어지다니 제 부덕함 탓이에요.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주세요.”

“아, 괜…….”

라보 공작부인은 말이 목까지 올라갔다가 멈췄다.

다행히 그 머뭇거림은 짧았다.

하마터면 페루제 공작부인의 분위기에 압도되어서 자신도 모르게 괜찮다고 말하며 넘어갈 뻔했다.

그녀가 페루제 공작부인을 싫어하는 이유였다.

자신의 생각과 억지로 통제하는 기분을 들게 했으니까.

“괜찮아요.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죠. 이것이 북부의 수준인 것을요.”

“헉!”

북부 사교계를 ‘내 것’이라고 말할 만큼 장악하고 있는 페루제 공작부인이다.

라보 공작부인의 말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수준이 떨어진다고 대놓고 말한 것과 진배없었다.

북부 부인들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페루제 공작부인의 눈치를 봤다.

동부 부인들도 그 숨막힘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렇지만 이상했다.

아부라도 떨며 기분을 풀어주는 행동을 누구도 하지 않았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미소를 지었다.

사람 하나를 당장이라도 죽일 것 같은 눈빛이었다.

자신이 그 대상이 아님을 아는데도 모든 부인들이 소름 돋고 있었다.

그녀와 시선이라도 닿을까 두려워서 고개를 숙였다.

라보 공작부인은 그녀의 옆에 있어서 정면의 페루제 공작부인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들었지?”

“그, 그게…….”

“너 때문에 내 격이 떨어졌잖아.”

“공작부인,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무릎을 꿇고 있는 부인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제 가문이 영지가 있겠습니까? 재산이 있겠습니까? 오직 제가 장미회 소속이라는 것만이 가문의 자랑입니다.”

“그래서?”

그녀가 잔을 들고 스푼으로 차를 휘저었다.

눈물을 흘리는 여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 귀부인은 영지도, 귀족이라고 어깨를 피고 다닐 재산도 없는 가문의 안주인이었다. 소위 몰락 귀족이라고 불리는 가문의 부인인 것이다.

본래라면 페루제 공작부인 앞은커녕 귀족 모임조차 드나들 수 없는 인물이었다.

“원래 장미회는 가문의 수준이 되는 부인들만 들였어.”

철두철미한 검증과 절차를 통과한 부인들만 장미회에 들였다.

그리고 페루제 공작부인은 까다로운 부인이었다.

정해진 규칙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장미회에서 한 사람이 빠져야 다른 사람이 들어오도록 했다.

“그런데 너처럼 귀족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가문의 안주인을 장미회에 들인 이유가 뭘까?”

“그것이…….”

“내가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페루제 공작부인은 자신이 휘젓는 차를 들여다봤다.

“출신 때문에 인재를 놓치는 것은 안타깝다고 하셨습니다.”

“맞아. 능력이 있는데 가문이 허접하다고 외면하는 것은 웃긴 일이잖아.”

그녀가 미소 짓고는 고개를 들었다.

아름답고 우아한 미소였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드레스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내가 너를 장미회에 들이고 그에 맞는 ‘보상’을 한 이유는 오직 그것뿐이야.”

“가문 앞에 놓인 빚이 아직 남았습니다. 장미회 소속이라서 빚 갚을 날을 연장 받았는데 이렇게 쫓겨나면 어찌 되겠습니까? 아직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그래. 내 덕분에 빚을 갚았다고 들었는데 또 빚이 생겼니?”

페루제 공작부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녀가 일을 잘한다고 준 보상은 몰락 귀족 따위가 만져 볼 수 없는 금액이었으니까.

빚을 갚고도 남았다.

평민의 삶을 기준으로 보면 평생 여유롭게 살 만했다.

애원하던 여인의 고개가 땅으로 향했다.

“그이가 도박을 멈추지 못해서…….”

“한심하네.”

페루제 공작부인이 자신의 드레스를 잡고 있는 손을 향해 발을 찼다.

하이힐이 손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윽!”

“가문을 위태롭게 만들 놈이면 네 손을 더럽혀서라도 처리했어야지.”

가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 놈이니 남편을 죽였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렇게 다수가 있는 공간에서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다.

북부 부인들은 진짜 분노하셨구나 하는 생각만 있었다.

워낙 강렬한 사람이다 보니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예상이 되지 않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팔려 갈까 봐 걱정이 되니? 그러면 그렇게 되기 전에 네가 잘 처리했어야지.”

갚지 못한 빚으로 아이들이 팔려 나갈 것을 진심으로 걱정했다면 네 남편을 죽였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부인! 꺄악!”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다시 애원하려고 하던 순간이었다.

어떤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그 여인이 넘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우악스럽게 상대를 쓰러트린 부인이 공손한 자세로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말했다.

“부인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을 어찌 자비롭게 두십니까?”

“뭐라 말할지 궁금해서.”

“어서 ‘저것’을 치워!”

페루제 공작부인이 사과를 포크에 찍어서 한입 베어 물었다.

그 우아한 모습을 지켜주려는 것처럼 그 부인이 죄인이 된 여인을 쫓아냈다.

“부인! 공작부인! 제발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고용인들에게 끌려 나가는 와중에도 애원의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포크를 내려놨다.

그리고는 선심을 썼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장미회에 한 명이 나가게 되었으니 새로운 사람을 들여야겠지. 추천할 사람이 있는 부인은 어서 말해 봐.”

그 말이 시작이었다.

북부 부인들이 너 나 할 것이 없이 몸을 일으키고 손을 들었다.

“부인!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딱 맞는 부인을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추천한 사람을 들이게 해주십시오.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소리에요! 부인, 제가 인맥이 넓지 않습니까? 인재들을 많이 알아요!”

“쭉정이를 인재라고 하나요?”

“뭐예요?!”

그것은 광기였다.

눈빛에는 반드시 자기 사람을 장미회에 집어넣겠다는 야욕이 가득했다.

장미회 안에서 세력을 키워서 페루제 공작부인의 최측근이 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선택을 받은 ‘사교계의 꽃’ 4명은 그녀를 통해서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다.

그 부를 기반으로 가문 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다.

장미회 부인들은 언젠가는 그 선택받은 4명 안에 들고 말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마치 떨어지는 먹이를 향해 몰려오는 잉어 떼가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동부 부인들은 광기 어린 모습에 몸이 굳어 버렸다.

어서 이 상황이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여기에 있다가는 자신들도 정신이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저 광기에 끌려 다닐 듯싶었다.

그때였다.

이 개판을 끝내 줄 부인이 등장한 것은 말이다.

“어머! 정말 이기적이네요.”

한 부인이 능청스럽게 페루제 공작부인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그 옆에 앉았다.

바람처럼 빠르게 왔기에 막을 새도 없었다.

“공작부인께서 이리 힘드신데 아무도 신경조차 쓰지 않다니요.”

그 부인은 페루제 공작부인이 까닥거리던 발의 하이힐을 벗겼다.

그리고 그 발을 주물렀다.

마치 시녀가 모시는 분을 위해서 마사지를 해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 가문의 안주인으로 자존심이 있지 어찌 저럴 수 있는지 충격이었다.

이것은 동부 부인들에 한해서였다.

북부 부인들은 당했다는 표정과 함께 멈칫했다.

“이 많은 사람 중에 나를 신경 써 주는 부인이 그대뿐이군.”

“다른 부인들도 저랑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에요.”

“다들 내 옆에서 무언가 받아먹을 생각뿐이지.”

“…….”

북부 부인들이 페루제 공작부인의 차가운 말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어떤 말을 꺼내도 심기가 불편할 것이었으니 입을 열기조차 조심스러웠다.

적막만 있는 티파티에서 그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왜 이렇게 모두 굳어 있어? 농담이야. 자리에들 앉아.”

“역시 격조 높고 우아하세요. 농담조차 부인다우세요.”

“역시 부인의 유머는 정말 수준이 높으세요.”

북부 부인들은 엉덩이에 소파를 대는 짧은 순간에도 아부를 적극적으로 했다.

아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가 자기를 주무르는 부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는 다음 모임에 추천할 사람을 데려오고.”

“네, 감사합니다!”

“자리로 돌아가. 이제 충분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 부인은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하이힐을 신겨 주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하이힐이 신겨진 발을 보고는 그녀가 말했다.

“누구야? ‘그것’을 나에게 추천한 부인이?”

“힉! 죄, 죄송합니다.”

“그리 안목이 없어서 어떻게 장미회에 있어?”

페루제 공작부인이 발을 다시 까닥거렸다.

쫓겨난 부인을 추천했던 여인이 급하게 일어나서 허리를 숙였다.

여기서 할 일은 용서를 비는 일뿐이었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이 티파티 준비를 맡겼더니 이 따위로 해? 신전의 성지까지 들어오게 했는데?”

“죄송합니다. 설마 그리 천박하고 무능한 부인일 줄 몰랐습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그것을 변명이라고 하는 것이냐고 윽박을 지르려고 했다.

“잠깐. 페루제 공작부인.”

“네. 라보 공작부인.”

라보 공작부인이 한 손을 들며 그녀를 불렀다.

그 부름에 그녀가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하는 말을 들어보면 이 티파티 준비를 부인이 하신 것이 아니신 것 같은데 맞나요?”

“네, 아까 쫓겨나간 ‘것’이 준비했어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라보 공작부인만이 아니라 동부 귀부인들의 공통적인 기분이었다.

그런 그들의 심경은 관심도 없다는 듯이 페루제 공작부인의 표정은 밝았다.

라보 공작부인이 기가 막혀서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티파티를 초대해 놓고 다른 사람에게 준비를 떠넘겼다고요?”

“떠넘긴 것이 아니라 명령을 내린 것이지요.”

“그게 엄청난 무례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나요?”

이 티파티를 주최하고 초대한 사람은 명백히 페루제 공작부인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이 티파티의 준비도 페루제 공작부인이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게 왜 무례죠?”

“우리는 이 티파티를 부인이 한 줄 알았어요.”

“제가 주최했죠. 단지 꾸미고 하는 것은 ‘그것’이 하도록 했을 뿐이에요.”

“그 사실을 왜 저희에게 말하지 않았죠? 이것은 기만이에요.”

라보 공작부인과 동부 부인들이 이 티파티를 깎아 내린 것은 바보짓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준비하지도 않은 티파티를 가지고 욕하는 꼴이라니!

제삼자 입장으로 구경하면서 얼마나 속으로 비웃었을지 아찔하다.

게다가 찜찜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가.

하찮은 몰락가문을 완전히 망하게 만들게 되어 버렸다.

여기서 더 짜증이 나는 것은 북부 부인들이 가만히 있었던 것은 그들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이다.

“그리고 어떤 부인이 자신이 주최하는 티파티를 준비하지 않죠?”

“음…….”

라보 공작부인의 항의 섞인 말투에 페루제 공작부인이 팔짱을 끼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절로 침이 삼켜졌다.

도대체 어떤 말을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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