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갑작스러운 상황
라보 공작부인과 동부 귀부인들은 낯선 초대장을 받게 되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보낸 것이었다.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같았다.
라보 공작부인부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집사에게 물었다.
“진짜로 페루제 공작부인이 보낸 거 맞아?”
“제 눈에도 페루제 공작부인이 보낸 것으로 써져 있습니다.”
눈을 비벼 보며 초대장의 내용을 확인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 행동은 이해가 되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벨로나 공작과 혼인한 이래로 타 지역 부인들과 교류를 딱히 하지 않았다.
북부 사교계의 주인으로 군림하기만 했을 뿐이다.
정치적 세력은 있으되 수도의 사교계에는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랬던 사람이 이제야 타 지역의 부인들과 친분을 쌓겠다고 나선 것이다.
“불순한 의도일 것이나 거부하기도 마땅치 않지. 가겠다고 답을 보내야겠어.”
라보 공작부인은 거부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 오만방자한 페루제 공작부인이 먼저 호의적인 손길을 내밀었다.
거절했다가는 어떤 번거로운 일을 경험하게 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래도 페루제 공작부인은 남편과 적대적인 입장에 있었다.
라보 공작의 뜻을 물어보는 것이 맞았다.
가문의 숙적과 같은 존재의 초대에 관해 그녀 홀로 판단하기에는 꺼림칙했으니까.
업무 중인 남편 앞에 그녀는 초대장을 내밀었다.
“거절하고 싶지만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초대를 거절하면 무슨 짓거리를 할지 모를 여자지. 최대한 대립할 일이 없도록 해. 그리고 되도록 빨리 돌아와.”
오죽하면 그녀의 남편인 라보 공작마저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겠는가.
그 정도로 상대를 짓누르려고 하면 숨이 막히게 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알았어요.”
라보 공작부인은 대답하고는 방을 나서려고 했다.
문을 열려는 찰나였다.
“잠깐.”
남편의 말에 그녀는 손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비록 가문의 인장을 도둑맞아서 약점이 잡히기는 했으나, 이대로 가만히 있기에는 억울한 감이 있었다.
“나는 자네와 다른 부인들이 그 여자가 주최하는 티파티에서 솔직했으면 좋겠어.”
“예를 들면요?”
“상대를 생각해서 억. 지. 로 티파티에 만족한 척하지 말라는 것이지.”
라보 공작의 말에 그녀가 웃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연 티파티를 무조건 평가절하고 깔아뭉개라는 말이었으니까.
티파티를 제대로 망쳤다는 소문이 퍼지도록 말이다.
그 소문이 그녀의 안목이 떨어진다는 평을 주게 될 것이었다.
감히 그녀의 아들을 사교계에서 망신거리로 조롱거리로 만든 여인이다.
그것도 아들과 합작으로 말이다.
—라보 영식은 무능하기 짝이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자기가 조롱을 당해서 몰랐죠.
—무능함을 메우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겠어요. 우리 그만 놀려요.
뒤에서 수군거리는 말들로 인한 모멸감은 곧 증오가 되었다.
아쉽게도 그 증오를 터트릴 수 없었다.
가문의 힘으로 보복하기에 페루제 공작부인은 너무 강했다.
부유함과 군사적 힘까지 압도적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독살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 해의 건국제 연회에서 만난 페루제 공작부인이 작게 귓속말했다.
—가장 허접한 독살 시도였어요. 다음에는 나를 즐겁게 해봐요. 너무 하찮아서 헛웃음이 나왔잖아요.
라보 공작부인의 눈에 비친 모습은 비웃음이었다.
나날이 분노로 속이 타들어갔다.
그런 와중에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남편이 대놓고 허락한 보복의 기회였다.
“그 여자가 분노라도 하면요?”
“사교계에서 일어난 해프닝에 불과해.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면 내가 적극적으로 막아주지.”
이번에 아들이 당한 조롱을 개망신으로 갚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다고 할 수 있겠다.
사교계는 가문의 영향력보다 ‘개인’의 영향력이 더 중시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가문의 힘을 빌어서 보복하는 것은 명분이 될 수 없었다.
게다가 남편도 적극적으로 그녀의 편이 되겠다고 하는 마당이 아닌가.
그녀에게 유리했다.
“부인들에게 그 티파티에 관해서 솔직하게 말하라고 할게요.”
“그러도록 해.”
“당신이 있어서 든든하네요.”
“남편이 아내의 편을 들어야지 누구의 편을 들겠어.”
남편이라는 말은 ‘남의 편’의 준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라보 공작도 이번만큼은 그녀의 편이었다.
라보 공작부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방을 나갔다.
* * *
대망의 티파티 날이 도래했다.
라보 공작이 동부 귀부인들과 말을 맞추고 어떻게 비아냥거리며 깎아 내릴지를 생각하며 기대했다.
그들은 신전으로 왔다.
“어머, 신전에서 티파티를 하는 경우는 처음이네요.”
“그렇죠? 성모라면서 이렇게 개인적으로 신전의 공간을 이용하다니 혀를 차게 되네요.”
“왜 하필 신전이래요? 볼 것도 없는 곳인데 말이에요.”
“볼 것도 없고요.”
동부 부인들이 구시렁거릴 만했다.
겉으로는 그러했으나 속은 복잡했다.
초대 장소인 수도 외곽에 있는 신전은 국가적, 종교적 큰 행사를 위해서 마련된 곳이었다.
수도 내에서 하기에는 신전의 규모가 작았고 곳곳에 위치했다.
종교는 언제나 백성 가까이에 있어야 함이다.
소문으로 듣던 페루제 공작부인은 말로 듣는 것보다 훨씬 피부로 와 닿았다.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지 말이다.
그들은 신관의 안내를 받으며 어딘가로 향했다.
“어? 어디로 가는가?”
“따라오시면 압니다.”
“……?!”
귀부인들은 경악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신전에서 금지라며 출입을 금한 곳이었으니까.
국왕조차 출입할 수 없다는 대신관들만을 위한 장소.
그런 곳을 고작 티파티를 위해서 개방한 것이다.
“아름답다.”
황금빛의 성스러운 나뭇잎을 달고 있는 숲은 사람들에게 감탄을 자아냈다.
왜 대신관 이상의 신관들만 출입할 수 있는지 이해하게 하는 풍경이었다.
나무 가지 사이에 걸쳐진 천들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선사했다.
“각자 원하시는 자리에 앉으시면 됩니다.”
그곳에는 그들을 위한 자리 배치가 되어 있었다.
페루제 공작부인과 라보 공작부인이 앉을 소파 2개가 나란히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부인들을 마주볼 수 있도록 소파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한 소파에 부인이 3명씩 앉을 수 있었다.
한쪽 자리에는 벨로나 공작가문의 상징이 새겨진 찻잔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라보 공작가문의 새겨진 찻잔이 있었다.
라보 공작부인이 앉은 자리의 맞은편에는 동부 부인들이, 페루제 공작부인이 앉은 자리의 맞은편에는 북부 부인들이 앉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미리 와 있던 북부 부인들이 이를 알고 한쪽 줄에 앉았다.
동부 부인들이 고를 수 있는 자리는 정해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영향력과 가문이 높을수록 라보 공작부인과 가까운 자리에 앉을 것이니까.
동부 부인들이 자리를 잡자 신관이 다가와 알았다.
“성모님과 라보 공작부인이 오십니다.”
그 말이 들리자 북부 부인들이 병사처럼 절도 있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빠른 행동에 동부 부인들이 멍하게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성모님과 라보 공작부인께 인사 올립니다.”
“공작부인들께 인사드립니다.”
북부와 동부는 인사말조차 달랐다.
북부는 페루제 공작부인을 성모로 부름으로 라보 공작부인보다 우위에 있음을 드러냈다.
이에 반해 동부는 페루제 공작부인과 라보 공작부인을 동등한 위치로 보았다.
‘공작부인들’이라고 말한 것이 그것을 보여줬다.
“편히들 앉아요.”
“이렇게 초대를 해주니 너무 좋네요.”
“이리 좋아하실 줄 알았으면 진작 자리를 마련해 볼 걸 그랬어요.”
겉으로는 페루제 공작부인과 라보 공작부인은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라보 공작부인은 억지로 웃느라 입가에 경련이 날 것만 같았다.
지금도 뒤에서 수군거림을 당할 아들을 생각하니 뺨이라도 치고 싶었다.
공작부인들의 도착을 끝으로 티파티의 참석자들이 모이게 되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자리에 앉기 전에 경고 한마디를 했다.
“여러분, 나는 부인들이 이 티파티에 관해 어떤 말을 내뱉을지 기대가 됩니다. 그대들의 말 한마디에 누군가의 인생이 좌지우지될 수 있음을 알아두세요.”
분위기가 싸해졌다.
심드렁하게 한 말임에도 그 눈빛과 특유의 기세가 사람들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 정말 좋은 조언이에요. 그렇지만 이 모임의 목적을 생각하면 그런 말은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을까요?”
“아, 그랬나요?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
공작부인들이 자리에 앉자 어린 예비 신관들이 차와 간식을 가져다가 그들 앞으로 날랐다.
성스러운 공간에서, 미래의 신관들에게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다.
북부 부인들도, 동부 부인들도 말이다.
라보 공작부인이 차를 마시고 쿠키를 한입 먹었다.
차는 향부터 사람의 긴장을 풀리게 했고 맛은 천상에 올라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렀다.
쿠키에 담긴 부드러움은 입에서 녹는다는 표현에 딱 들어맞았다.
“라스타 왕국에서 새롭게 들인 쿠키라더군요. 어떠신가요?”
“뭐, 나쁘지는 않네요.”
맛이 없다고 거짓말할 수 없는 고급짐이 있었다.
맛이 없다고 하는 순간에 모두가 거짓이라고 속으로 비웃을 정도였다.
라보 공작부인이 한입 먹은 쿠키를 접시에 내려놓았다.
“그렇지만 엄연히 동부와 북부의 친교를 위한 모임이 아닌가요?”
그 물음을 시작으로 동부 부인들이 입을 하나둘씩 열었다.
“알펜 왕국의 귀부인들이 화합하는 자리인데 아쉬워요.”
“이 모임의 목적에 맞게 알펜 왕국의 간식을 가져와야 하지 않았을까요? 제 개인적인 생각이랍니다.”
“북부와 동부를 상징할 만한 것은 전혀 없네요. 귀한 것들은 가득하지만요.”
“워낙 알펜 왕국 북부나 라스타 왕국에서 독보적이셨던 터라 이런 모임에서 조금 실수를 하실 수 있지요.”
동부 부인들의 말은 타당한 부분이 있었다.
엄연히 동부와 북부 귀부인들의 화합을 위한 자리임에도 각 지역을 상징하는 것이 없었다.
라보 공작가문과 페루제 공작가문의 상징이라도 있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게다가 신전의 성지를 사사롭게 쓰는 것은 옳지 않지요.”
“성모이시면서 개인적인 일에 신전을 이용한다는 말이 나올까 심히 우려되어요.”
“신실하신 분의 명예에 흠이 갈까 걱정이에요.”
라보 공작부인과 동부 귀부인들은 어느 순간에 입을 다물었다.
북부 귀부인 중 누구도 페루제 공작부인의 편을 들지 않았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주최한 티파티이다.
그들은 그 티파티를 깎아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페루제 공작부인의 사람들이 동부 부인들에게 반박조차 하지 않는다?
이상하고 찜찜했다.
그들의 말을 차분히 우아하게 들고 있던 페루제 공작부인이 찻잔을 내려놨다.
한쪽 다리를 까닥거렸다.
“공작부인!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페루제 공작부인 바로 앞에 앉아 있던 부인 하나가 일어서더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았다.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라보 공작부인도 동부의 다른 부인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게 무슨?”
라보 공작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동부 귀부인들은 너무 놀라서 몸이 굳었다.
어떤 부인은 부채를 떨어뜨렸고 다른 어떤 부인은 입을 하마처럼 벌어졌다.
이에 반해 북부 귀부인들은 다가올 일이 다가왔을 뿐이라는 태도였다.
아니,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눈을 빛냈다.
그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여인은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빌면서 애원했다.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다음에는 실망하시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라보 공작부인에게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