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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86화 (186/221)

186화 이혼에 대처하는 의붓아들

그녀가 란델리노를 데려가는 대신에 해야 할 조건을 제시했다.

“그 아이가 원한다는 전제하에 말하는 것이야.”

“물론입니다! 그도 분명히 원할 것이에요!”

빅토르가 환하게 웃었다.

그들을 따라서 가문을 나갈 수 있다면 란델리노는 그런 위태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란델리노가 그것을 반대할 리가 없었다.

정말로 그가 빅토르 자신의 아들이 된다면 행복할 것이다.

스승으로 그를 가르치면서 아들처럼 여겼다.

진짜로 아들이 된다면, 아버지라고 불러 준다면 그것보다 큰 기쁨은 없으리라.

* * *

빅토르는 자신의 업무들을 제쳐두고 란델리노를 찾아갔다.

그는 저택 내에 있는 유리정원에 있었다.

그는 멍하니 어떤 나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나무는 아주 웅장하고 우아하여 사람을 압도하는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란델리노님,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십니까?”

“스승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빅토르가 말을 걸자 그가 정신을 차리고 환하게 웃었다.

그들은 서로를 반기며 악수를 하고 포옹했다.

몸이 서로 떨어지고 빅토르가 담담하게 말했다.

“저야 평소처럼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정말 다행인 소식이군요.”

정보 첩보를 위주로 하는 <검은 뱀>은 전장이 주요 활동지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중요한 정보가 있는 곳에 위협이 도사리고 있음은 누구나 알았다.

중요한 정보일수록 지키기 위해서 준비한 위협들이 많았다.

“큰일이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다 해결이 되었으니 괜찮습니다.”

어머니에게 죽임을 당한 뻔한 일은 ‘큰일’ 정도로 치부되었다.

권력과 가까워질수록 이런 일도 자주 마주치게 된다.

반응이 무뎌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언제 돌아오신 것입니까?”

“어제 늦은 밤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좀 더 쉬시지 어찌 이렇게 걸음을 하셨습니까?”

란델리노가 제대로 쉬지도 않고 발걸음을 한 빅토르를 걱정했다.

빅토르가 그를 지지해 준다면 어머니의 지지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첫 번째 기사를 무시할 정도로 냉혈한은 아니었다.

빅토르는 한낱 귀족가문의 영애에 불과한 어머니를 위해 기꺼이 손에 피를 묻혔으니까.

그는 건강하게 어머니의 곁에 있어야 했다.

그리고 란델리노에 관해 좋은 말을 계속해 줘야 했다.

“드릴 말이 있어서 이른 시간이지만 오게 되었습니다.”

“어떤 말을 하실지 궁금합니다.”

란델리노는 여유로웠다.

정말로 다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면 전날에 란델리노를 찾았을 것이다.

공적으로, 란델리노의 안위와 관련이 있다면 말이다.

그렇지만 아침부터 이렇게 찾아왔다면 개인적으로 중요한 일이 분명했다.

란델리노에게는 중요하지 않으나 빅토르에게 중요한 지극히 개인적인 용무이리라.

“그것이 말입니다.”

빅토르는 페루제 공작부인의 결정과 제안에 관해 말했다.

그 말을 들을수록 란델리노의 표정이 굳어 갔으며 안색은 흙빛으로 변해 갔다.

듣다 못한 그가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스승님의 말씀에 따르면 어머니가 이혼을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인가요?”

“이혼을 원한다고 해서 바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몇 년이 걸릴 것입니다.”

벨로나 공작과 페루제 공작부인의 이혼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벨로나 공작가문과 루비로즈 백작가문 간의 문제를 조율해야 했다.

이혼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라스타 왕국과 알펜 왕국 간의 문제도 최소화해야 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이혼은 가문 간의 문제를 넘어 국가 간의 문제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음이다.

“저만 제가 스승님의 아들로 입적하여 같이 라스타 왕국으로 갈 수 있도록 하시겠다고 하셨고요?”

“네. 그렇게 배려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란델리노가 속으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라면 몰라도 어머니가 이혼을 결정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꿈속에서는 벌어지지 않았던 일이었으니까.

“교황 폐하께서 허락하시겠습니까?”

알펜 왕국에 악감정이 있는 교황이었다.

과거 알펜 왕국의 공격으로 교황은 성도를 버리고 도망가는 불명예를 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알펜 국왕과 벨로나 공작이 좋을 일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교황 폐하께서 진노를 가라앉으실 만한 것을 찾아드릴 것입니다.”

벨로나 공작과의 이혼을 허락할 만한 것을 신전에 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아직 그 대체품을 찾지는 못했을지언정 말이다.

어머니는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반드시 하는 분이니 능히 교황 폐하를 설득할 것이다.

란델리노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아까 자신이 보던 거대한 나무에 시선을 돌렸다.

“스승님, 저는 이곳에 오면 꼭 저 나무를 봅니다. 왜인 줄 아십니까?”

“가장 눈에 가기 때문이 아닙니까?”

“틀린 말이 아니죠.”

빅토르의 대답은 틀리지 않았다.

이 유리정원에서 가장 눈이 가는 것은 그가 보고 있는 거목이었다.

“여기에 수많은 화려한 꽃들과 나무들이 있음에도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그 화려함을 압도하는 거목이지요.”

공작새와 같이 화려한 꽃부터, 전혀 본 적이 없는 무늬의 잎을 가진 나무까지.

귀족들조차 평생에 한번 볼까 말까 하는 식물들이 있었다.

이 저택의 유리 정원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식물 일부를 가져다 놓은 곳이었다.

그나마 키우기 쉬운 것으로 말이다.

“그 어떤 것도 이 웅장함 앞에서는 그 아름다움이 퇴색이 됩니다.”

그는 란델리노의 말을 경청했다.

란델리노는 드디어 수많은 책무와 부담감을 덜 수 있게 되었음에도 시원해하지 않았다.

“힘은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답고 사람들을 경건하게 만들어요.”

빅토르는 이해했다.

그는 자기 입장에서만 란델리노를 이해하려고 했다.

자신의 가문을 버리고 빅토르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단순하지 않았다.

이혼 후에 란델리노가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고립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빠져서 미쳐 생각하지 못했다.

“그 힘을 얻기 위해서 피가 흐르는 노력을 했습니다.”

이제껏 란델리노가 공작이 되기 위해서 해 왔던 모든 노력을 버려야 하는 것이었다.

그 노력으로 얻은 성과까지도 말이다.

가령 루비카 남작의 지지, 비공식 소드마스터 노엘의 지지, 메디치아 아카데미 입학시험 응시 기회, 알펜 왕국의 사교계 인맥 등 말이다.

란델리노는 복잡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스승님,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었고 어머니의 결정이었습니다.”

“제가 생각이 부족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를 생각해서 해주신 말씀인 것을 아는 것을요.”

“란델리노님…….”

“저한테 고민하고 결정을 내릴 시간을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럼요. 이혼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천천히 생각하고 알려 주십시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란델리노는 빅토르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유리 정원을 나섰다.

* * *

그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일그러지다 못해서 살벌하기까지 했다.

걸음도 빨라졌다.

걸음은 더 빨라서 그는 어딘가로 달려갔다.

“빨리 가야 한다. 쉴 생각하지 말고 따라와라.”

“네!”

“이럇!”

기사 몇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 기사들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사람이 아닌 란델리노의 사람들이었다.

해가 지고 나서 그들은 어느 허름한 별장에 도착했다.

말에서 내린 란델리노가 명령을 내렸다.

“너희는 주변을 경계하라.”

“네.”

그는 별장의 문을 벌컥 열었다.

그곳에는 한 사내가 있었다.

그 사내는 예의없는 방문자에게 비아냥거렸다.

청소했던 바닥이 더려워져 버렸다.

“여기는 제 휴식처입니다. 이렇게 연통도 없이 방문하시라고 알려드린 것이 아닌데요.”

“그대가 쉴 때가 아니야.”

그 비아냥에도 란델리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금 그 비아냥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롬 제국의 재림은커녕 다 포기해야 할지 몰라.”

“뭔가 일이 터졌군요. 앉으시죠.”

그 사내는 과거 멸망한 롬 제국의 재림을 바라는 비밀조직 ‘아나스타시스’인 아나스의 조직원이었다.

란델리노와의 거래를 성립하고 호텔에서 접선한 인물이기도 했다.

란델리노는 의자에 앉아서 빅토르가 해준 이야기를 그에게 털어 놓았다.

“이혼으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많아서 절대로 이혼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남의 일처럼 말하지 말게. 나에게 중요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대 조직에도 중요한 일이 아닌가.”

남의 이야기라서 관심이 없다는 듯한 태도에 란델리노가 짜증을 냈다.

시큰둥한 태도는 그의 조바심을 자극했다.

“어떻게든 마음을 돌려놓아야겠군요. 생각해 둔 방안은 있으십니까?”

“있네. 그것을 위해서 자네들이 해줄 일들이 있어.”

그 사내는 알았다.

란델리노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를 찾아오지 않았을 것임을 말이다.

당사자가 해야 할 판단과 결정을 아나스타시스에 의존하는 나약한 놈이었다면 손을 잡지도 않았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수도 골동품 상점에 이렇게 생긴 거울이 있을 것이야.”

란델리노는 종이에 무언가를 그렸다.

백합 무늬와 푸른 줄기 무늬가 어우러진 손거울이었다.

“이런 설명으로는 찾기 어렵습니다.”

“이 거울은 마나를 넣으면 거울에 푸른빛이 나오지.”

란델리노는 그 거울만 가지고 있는 특징을 말해 줬다.

“알겠습니다. 다른 것은요?”

“다른 것은 이 거울을 구한 다음에 서신으로 알려 주겠네.”

조직의 목표와 란델리노의 목표가 날아갈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겨우 거울 하나를 찾으라니 웃기는 일이었다.

웃겨도 그 거울을 찾는 이유를 물어보지 않은 것은 믿음이었다.

그가 허접한 이유로 거울을 찾는 것은 아니라는 믿음이었다.

“이 일은 반드시 어머니가 수도에 계시는 동안에 처리해야 해.”

“빨리 찾도록 조직원들을 독촉하지요.”

란델리노는 대화를 마치고 별장을 빠르게 나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타고 달려 나갔다.

곧 별장 안에 있던 사내가 나왔다.

“여기도 치워야겠군. 태워라.”

“네.”

별장 주변에 있던 아나스타시스의 조직원들이 명령에 따라 별장을 태워 버렸다.

불이 활활 잘 타올랐다.

* * *

아들이 동분서주하고 있거나 말거나 페루제 공작부인은 여유로웠다.

그녀는 잠시 감정 기복이 있기는 했으나 우아함을 유지했다.

그녀는 몇 부인들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

장미회의 부인들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내가 다른 지역의 부인들과 교류를 하지 않았지. 내가 무심했어.”

“어머, 어찌 그런 말씀을 하세요?”

“부인께서 얼마나 하실 일이 많으신데 그런 자잘한 것까지 신경을 쓰세요.”

“명령을 내리시면 저희가 할 일이지요.”

장미회 부인들이 기겁하며 페루제 공작부인을 옹호하는 말을 쏟아냈다.

그녀의 최측근이 될수록 얻어낼 수 있는 것이 많음을 잘 알았으니까.

“이번에 라보 공작부인과 동부 부인들을 초대해서 북부와의 친교를 다져 볼까 해. 차랑 다과를 마시면서 좋은 시간을 보내는 거지.”

“공작부인의 사려 깊음은 따라갈 수가 없어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역시 페루제 공작부인이세요.”

하도 아부를 자주 들어서 감흥이 없었다.

그녀는 대꾸도 하지 않고 바로 할 말을 꺼냈다.

“2주 뒤에 북부로 돌아갈 예정이니까 일주일 뒤로 날을 잡지.”

“다른 부인들에게도 그리 전달해 놓겠습니다.”

“그리하게.”

새로운 사건을 예고하는 티파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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